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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09화 (109/207)

#109화. Chapter 26. 취업 특강 (4)

“학교 홍보? 아, 벌써 그렇게 됐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육칠 년 전, 내가 학교 다녔던 시절을 떠올렸다.

제일고의 한 학기 커리큘럼은 총 17주로 이루어진다.

우선 첫 8주 차까지가 중간고사 기간.

그리고 9주 차부터 16주 차까지는 기말고사 기간.

마지막 한 주는 종합 성적도 나오고 학기를 마무리하며 보내는 시간인데, 2학년부턴 이때 여러 길드와 기업에서 취업 특강을 빙자해 자기네들을 홍보하러 오곤 한다. 제일고에 방문하는 단체는 평균적으로 열 곳 안팎.

어느 학교에 어느 길드와 기업이 홍보할 기회를 얻을지 물 밑 경쟁이 치열한 거로 알고 있는데…… 영원 길드는 이번에 귀국한 대표 딸, 다시 말해 세라가 책임자를 맡은 모양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이나 학교를 오가며 들은 말들을 상기하며 세라에게 답했다.

“글쎄, 우리 때랑 별로 다르진 않을걸. 제일고로 홍보 오는 데면 이름값이나 조건은 크게 차이 없을 거고, 애들 전공이랑 각자 성격 따라 갈리는 정도? 근데…… 솔직히 너희는 그런 거 고민할 필요 없지 않나?”

한국의 인구 대비 각성자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림잡아 1% 정도.

다만 마력을 아주 조금 지닌 이들까지 모두 포함한 거라 전투 계열로 활동할 수 있는 인원은 그보다 적고, A급 최저선에 도달하는 각성자는 0.01%뿐.

한 해 출생 인구를 칠십만으로 잡아도 겨우 칠십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칠십 명 중 많으면 열 명, 아무리 못해도 대여섯 명 이상은 영원 길드에 입단하는 게 요즘 한국의 추세였다.

규모는 여타 경쟁 길드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계약금과 연봉도 적은 편이나 그래도 거의 모든 각성자가 선망하는 길드.

현재 한태강이 이끌고 있으며 훗날 세라가 이어나갈 영원 길드의 위상은, 최소한 한국에선 그만큼 독보적이다.

“내 생각에 조건을 올리기보단 모집 정원을 늘리는 게 효과 좋을 것 같은데. 정식 계약은 3학년 2학기까지 못 하게 돼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미리 말만 해둬도 다른 길드 제안은 쳐다도 안 보는 애들 있을걸?”

“그건 아빠가 안 된다고 하셔. 고등학교 졸업하는 학생들은 올해도 열 명, 내년에도 열 명. 앞으로 몇 년은 계속 그렇게 뽑을 거고, 할 수 있으면 그 열 명 다 1등부터 10등까지 데려오라고 하시던데. 아, 여기서 1등부터 10등은 지금이 아니라 향후 성장 가능성이랑 멘탈까지 내가 판단해서 영입하라는 뜻이야.”

“어…… 아저씨 아주 살짝, 그으…… 욕심이 쪼오금 과하신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니, 그만큼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신 것 같다는 거니까 혹시 오해하지 말고.”

“누가 뭐래?”

서둘러 변명을 주워섬긴 나를 보며 피식 웃은 세라가 꽤 고민이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린 연봉도 많이 안 주고, 모집 정원도 적고, 일도 바쁜 편이고, 훈련시설이랑 장비 지원은 다른 곳과 비교해도 빠지진 않지만 그건 정말 기본적인 거잖아? 사실 올해 전망이 썩 좋진 않아. 유성 쪽에서 이번에 작정했다는 말도 있고, 우리는 내가 들어와서 며칠 살펴봤는데 딱히 그쪽보다 앞설 게 없더라. 3학년 쪽은 예년 수준이 목표지만 2학년은 그래도 일 년 넘게 남았으니까, 우리 길드에서 개별 학생들한테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을 생각해보려고.”

우려와 다짐이 절반씩 섞인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진 게 있었다.

유성 길드. 심정웅의 가문이 소유한 유성 그룹의 자회사 격인 곳이다.

다만 몬스터와 싸우는 길드라는 건 구색 맞추기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심가의 마학 연구를 실전 형태로 검증하는 게 진정한 존재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긴 애초에 길드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이 세상에 균열 현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온 심가의 연구 집단과 전투 병력 일부를 합쳐 이름만 길드로 바꾼 데니까. 그래서인지 현재도 요직은 대부분 심가에서 독점하고 있고, 신규 충원도 상당히 폐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성? 거기 제일고에선 오히려 너희보다 덜 뽑지 않나? 우리 땐 내 기억으론 딱 세 명 뽑았는데.”

어렴풋이 기억을 되살려 묻자 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응, 마법 전공 애들 필기 1등부터 3등까지였을 거야.”

“그치? 걔들 헌터도 안 하고, 유성에서 전액 장학금 받고 제2 대학 갔잖아. 솔직히 말만 길드지 바로바로 실전 실험 가능한 연구소로 보는 게 맞을걸.”

“여태까진 네 말대로 그랬는데, 올해부터 달라질 거래. 앞으로는 길드로서도 제대로 활동할 거라고.”

“……인제 와서?”

“그러게. 갑자기 왜 방침을 바꿨는지 이유까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래.”

그러면서 세라가 들고 온 가방을 끌어당긴다. 거기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켜더니 언뜻 보기에도 아주 잘 만든 ppt 하나와 제일고 2학년 학생들의 이름과 특기 사항이 기재돼 있는 문서 파일을 함께 열었다.

“우리 쪽에서 데려가고 싶은 애들 후보야. 스무 명이고, 이중 절반이 목표. 최종적으로 영입 제안은 내년에 할 거지만 잘 알아보고 정한 거니까 이변이 없는 한 이 명단에서 벗어날 일 없을 거야.”

무기술 전공에서 열 명.

마검술 전공에서 다섯 명.

마법 전공에서 다섯 명.

그렇게 2학년 학생들 총 스무 명이고, 내가 보기에도 A급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듯한 애들이었다.

그 애들에 관해 영원 길드에서 조사한 정보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고, 내게 특히나 익숙한 이름 셋도 보였다.

세아와 진유리, 그리고 유해빈.

나는 조금 난처한 심정을 담아 세라에게 물었다.

“……이거 딱 봐도 대외비인데 내가 봐도 되나?”

“뭐야,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게?”

“말하겠냐.”

“거봐. 아무튼, 도진이 네가 학생 신분으로 홍보 듣는다고 생각하고 피드백해주면 고맙겠는데. 우리 쪽에서 미처 고려 못 한 것도 코멘트 해주면 좋고.”

“맨입으로?”

“뭘 원해?”

찌르듯이 반문한 세라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거리가 가까웠다. 향수가 옅게 스민 체향이 차분하게 전해져 온다. 쓰던 거 아직 그대로 쓰네, 얘한테 잘 어울리는 향이긴 해, 내가 멍하니 그런 감상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세라가 산뜻한 말투로 일렀다.

“생각나는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 나중에, 우리 만날 때 말해줘도 되고. 어지간한 건 다 오케이 해줄게.”

“……초밥 사주니까 됐어.”

“……그래?”

미묘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다시금 태블릿을 응시한 세라가 발표와 보고의 중간쯤 되는 느낌의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료 조사도 대본도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수준이고, 제일고 교원으로서 아는 것들 몇 가지만 참고하라고 일러주다가 세라에게 물었다.

“너 일요일까진 일 안 맡았었지? 이 자료를 어제 받아서 다 파악했어?”

“응? 내가 만든 거지.”

“…….”

“왜? 좀 괜찮아? 어제는 이거 만드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자긴 했는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거로 보면 영원이 세계 최고 길드 같은데.”

“‘이거로 보면’?”

“아니, 내 말은, 실제로도 엄청 좋은 길드인데 자료가 너무 좋다는 뜻이지.”

“칭찬 고마워. 아, 물론 나랑 우리 길드 양쪽 다.”

괜히 말 잘못 했다가 쩔쩔매는 꼴이 된 나를 보며 웃은 세라가 태블릿 화면에 내 피드백을 덧붙인다.

살짝 기운 각도로 내려다보이는 옆얼굴. 일요일에 나와 그런 갈등을 겪은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차분한 표정이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세라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전체 구성은 이런 식이고, 개별 학생들이 세부적으로 길드 고르는 기준이 될 법한 요소들은-”

하긴 죄지은 사람과 피해자 입장은 다른 법이지. 잘못한 사람으로서 도와달라는 거 열심히 도와주는 게 최선이려나.

한데 바로 그때.

치카치카- 치카치카치카-!

조금은 격렬하게 들리는 양치 소리에 이어 인기척이 거실로 다가왔다.

오늘 땀을 좀 많이 흘려 찝찝하다며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세아가 입에 칫솔을 문 채로 나와 세라를 쏘아보고 있다. 이어서 입가에 흰 거품을 약간 묻힌 상태로 싸늘하게 묻는다.

“무스 애기해?”

“아…… 일 얘기? 그러고 보니 세아한테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얘가 학생 눈높이에서-”

“……기아어바.”

입속에 거품이 있어 발음이 정확하진 않지만 기다려보라고 말한 듯한 세아가 다시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가운데 세라의 표정을 살피니 적잖이 난감해하는 듯 보였고, 나는 재빨리 조언처럼 일렀다.

“쟤 대충 알아.”

“그런 것 같았어. 나한테 안 따진 건 도진이 네가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뭐, 그렇지.”

“차라리 그날 바로 연락해서 얘기하는 게 더 괜찮았을 텐데. 네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닌데…… 세아가 나 저렇게 보는 거 보니까, 되게 마음이 안 좋네.”

“어쩔 수 없어. 너 가고 나면 내가 말해볼 테니까 일단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그즈음 배달시킨 초밥이 도착해 탁자에다 올려두었고, 세아가 욕실에서 나왔다.

“잘 먹을게.”

“응. 세아도 많이 먹어.”

“……잘 먹겠습니다.”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초밥을 먹던 중에 세라가 내게 설명한 것과 같은 내용을 세아에게도 알렸다.

이번 달 말에 제일고에서 진행되는 길드 설명회. 본인이 영원 길드의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우리한테 의견을 구하고 싶다고.

가만히 다 듣고 난 세아가 단출한 어조로 비판의 뜻을 표했다.

“밀실 회의.”

“어…… 그럼 우리 집이 밀실인가?”

“오빠 조용히 해. 그리고…… 학연이랑 지연.”

“음…… 인정할게.”

“담합, 독과점, 카…… 음, 카르텔, 불공정거래.”

“아…….”

세라는 드물게도 할 말을 잃은 듯했고, 나도 너 그거 뜻은 정확히 알고 쓰는 말이냐고는 차마 묻지 못했다.

하지만 불만을 표하면서도 애가 질문에는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답해줬고, 내 동생이 무려 반 가까이 해치운 식사가 끝나고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세라가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려다줄게.”

“안 그래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라가 반색하듯 웃는다.

하지만…….

“세라 언니 내가 데려다줄게.”

소파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세아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선언했다. 그리곤 말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가더니 신발을 신는다.

세라와 나는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따라가 줄까?>

<……아니야, 괜찮아. 세아랑 이야기 잘 해볼게.>

이어서 육성으로 전한 인사.

“그럼 잘 가.”

“……응, 또 연락할게.”

띠리릭.

둘이 나가고 집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며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래도 쟤네가 친자매 사이나 다름없는데 설마 심하게 다투진 않겠지. ……부디 그럴 거라고 믿고 싶다.

***

“화해했어?”

“응?”

아파트 단지를 나선 이후에 불쑥 들려온 질문이었다.

한세라는 나란히 걷고 있는 이세아를 바라봤다.

미세하게 떨리는 표정에, 정면만 쳐다보는 모습.

이윽고 이세아가 재차 물었다.

“오빠랑 언니, 싸웠잖아. 화해한 거야?”

한세라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아니, 화해 못 했어.”

“근데 어떻게?”

‘어떻게’라는 건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일까. 한세라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도 이세아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싸우고, 화해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걸까.

그것 자체가 궁금한 데다, 동시에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있을 터였다. 때려놓고선 뻔뻔하게 사과도 안 했느냐고.

한세라는 상냥한 눈길로 이세아를 말없이 바라봤다.

떠올릴 때마다 항상 마음 한구석이 아린, 여동생 같은 아이다. 아무리 저쪽에서 싫어해도 자신은 나쁘게 생각할 수 없는 아이다. 힘이 닿는 한 보살펴주리라 다짐했던 아이다.

그래서, 한세라는 언니가 동생에게 일러주듯 이세아에게 답했다.

“세아 너도 도진이랑 싸우면 가끔은 정식으로 미안하다고 할 때가 있고, 또 가끔은 사과까지 안 해도 알잖아? 내가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니다, 나도 미안하다, 그냥 서로 표정만 봐도 이해할 때 있잖아.”

“……이번에 그랬다고?”

“응, 내 생각에는 그래. 도진이가 한번 봐준 거지. 그래도 사과 제대로 할 거야. 이대로 넘기는 건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니까. 사과할 수 있을 때 사과할게. 세아 너도 속상하게 해서…… 언니가 미안해.”

“…….”

이세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볼멘소리처럼 한마디만 꺼냈다.

“……난 그냥 넘어갈 때 많은데.”

“동생은 그래도 돼. 너무 자주는 말고, 가끔은.”

“그럼, 세라 언니는 왜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데? 친구라서? 아니면…… 약혼자라서?”

그 물음에 한세라는 고민했다. 어느 쪽도 다 마음에 있는 생각이고, 그러나 그중 어느 쪽이 더 큰지를 고르긴 어려웠다. 고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니까.

해서 한세라는 이번에도 있는 그대로 답했다.

“음…… 글쎄? 어느 쪽이든 그건 별로 안 중요해. 도진이니까. 그래서 사과하고 화해하고 싶은 거야.”

그때 마침 발길이 택시 정류장 근처에 이르렀다.

한세라는 저 멀리 도로에서 택시가 오는 걸 보고 이세아에게 일렀다.

“언니 저거 타고 갈 테니까 집에 들어가 봐.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세아가 나직이 답한다.

“이제 둘이 잘 지내라고 중간에서 말해주고 그런 거 안 할래. ……굳이 안 해도 알아서 하는 거 같으니까.”

“그래?”

한세라에겐 오히려 칭찬처럼 들리는 말. 택시에 탄 그녀는 유리창 너머의 동생에게 손을 흔들었다. 작게나마 마주 손을 흔드는 게 무척 귀여웠고, 얼핏 떠오른 생각.

‘저렇게 뚱해 있으니까…… 분위기가 좀 닮은 것 같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생각을 사뿐히 흩어냈다. 아무래도 이세아에게 지나치게 실례인 생각이어서.

***

이후 별다른 사건 없이 보름가량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지난주 치러진 기말고사에서 세아는 다시 전교 3등에 등극했고, 1학기의 모든 점수를 합산한 종합 등수로도 3등이었다.

성적은 이미 나왔고 문제 풀이도 끝낸 터라 수업 시간에 할 게 없는 6월 24일 목요일. 나는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일렀다.

“여러분, 한 학기 정말 수고 많았어요. 여름방학 푹 쉬고, 다음 학기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봐요. 조금 있으면 특강 시작할 테니까 여기 계시면 되고, 수고 많이 했다, 얘들아.”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도진쿤 안녕!”

짝짝짝-!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와 서상욱 교수는 강의실을 나왔다. 이번 달에만 서너 번은 묻고 답했건만 영 안심이 안 된다는 기색인 서상욱 교수가 내게 일렀다.

“도진 군, 자네 나랑 정말 약속한 거야. 다음 학기 시작했는데 느닷없이 어디 스카우트 됐다고 사직서 내고 그러면 내가 진짜 미워할걸세.”

“오우, 그건 저도 좀 슬프니까…… 다음 학기에도 학교 나오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우리가 함께했던 지난 넉 달을 생각하게나. 부디 날 배신하지 말라고.”

“아, 네…….”

그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아련하게 말하는 건데.

쓴웃음을 지으며 복도를 걸어가던 와중에 서상욱 교수가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수업 시간 특강은 어디 길드라고 했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가물가물하는구먼.”

“유성 길드에서 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나한텐 그렇게 잘 대해주면서 대체 왜 이렇게 학생들한테 관심이 없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것도 마음속으로만 삼키며 연구실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복도를 돌아나가던 그때.

“선배님!”

등 뒤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이 학교 내에서 본 적이 없는 젊은 여성이 밝게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온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적으려나. 170cm를 넘길 듯한 늘씬한 체구에 피부가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아주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반면 짓고 있는 표정은 흡사 강아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해맑아 뭔가 이질적인 위화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손에 든 가방을 고쳐 쥐고 다가온 그녀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한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어진 적막. 서상욱 교수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 누구신지…….”

나도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선배님? 설마 서상욱 교수를 부른 건 아닐 테고 나한테 하는 말 같은데. 하지만 내 기억엔 없는 사람이다.

“아, 못 알아보시는구나.”

어색한 침묵에도 개의치 않은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이내 자그마한 직사각형의 종이를 나와 서상욱 교수에게 한 장씩 건네준다. 고급스럽게 디자인된 명함이었다.

[유성 길드 인사팀, 대리 심이수]

심이수. 여전히 낯선 이름인데.

하지만 ‘이수’라는 이름만 떼서 보면 어쩐지 처음 듣는 게 아닌 듯하다. 자주 들은 건 아니지만 특정 시기엔 분명히 안면이 있었던 듯한 느낌. 그리고 내가 그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기 전에, 여성이 내게 말한다.

“그때 조별과제, 민폐 끼쳐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 너였어?”

이제야 명확히 겹쳐 보인다. 세아보다도 작은 체구에 굉장히 동안이었던 얼굴. 불과 몇 년 만에 다른 사람처럼 몰라보게 성장했으나 강아지 같은 인상을 주는 표정만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엔 심이수가 아니라 류이수.

내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조별과제를 수행했던, 그중에서도 트롤 역할을 담당했던 여자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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