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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11화 (111/207)

#111화. Chapter 27. 인기인 (1)

“그게, 저야 상관은 없는데…… 제가 그 선배한테 이미지가 별로 안 좋을 거라서요.”

“네가 무슨 실수라도 했더냐.”

심정웅이 눈가를 옅게 좁히며 물었다.

심이수. 오래전에 죽은 넷째 아들이 세상에 남긴 사생아. 혈연관계로야 자신의 손녀딸이지만 노인은 그녀에게 혈육으로서의 정 따위를 품고 있지 않다.

그저 자질이 좋아서, 필요에 의해 거두어 심가의 그늘에 들였고 이번 일 또한 마찬가지. 가문의 어린 여아 중 이도진에게 내밀 패로 그녀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에 고른 것이다.

나이도 엇비슷하고, 재능 또한 심가의 아이들 가운데 이도진과 가장 어울릴 만하고, 대학에 다니며 가볍게나마 안면도 있었다 하고, 그 외 다양한 요소들까지 착 맞아 떨어지니까.

해서 일이 잘 풀리겠구나 싶었건만…… 느닷없이 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을 거라니.

실망감과 추궁을 담은 노인의 어조는 지극히 건조했고, 한데도 전혀 겁을 먹은 기색 없이 심이수가 태연하게 답했다.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선배랑 안면 있던 게 거의 삼 년 다 돼 가는데…… 그때 제가 이래저래 아프고 시간도 없었던 거. 그래서 좀 폐를 많이 끼쳤거든요.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하면 의식 마법 준비할 때 마법진 잘못 그리고, 촉매 빠뜨리고 오고, 수식 틀리게 쓰고, 그런 실수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사과는 했느냐.”

“네, 사과는 했고 죄송하다는 의미로 점심이라도 사드릴까 했는데…… 바쁘다고 거절하더라고요. 그 후로는 연락한 적 없으니까, 솔직히 초면인 것보다 못한 사이죠.”

“…….”

심정웅은 잠시 침묵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심이수가 이도진에게 솔깃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다른 아이들을 데려다 놓을 순 없는 노릇. 서두르진 말고 미끼부터 던져보는 게 옳겠지.

“그러하다면은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진 말아라. 내가 자리를 마련해 볼 터이니 우선 얼굴을 비추고, 그런 다음에 차후의 일을 생각해보자꾸나.”

“음…… 네, 알겠어요.”

한데 별다른 거리낌 없이 선선히 답한 심이수가 문득 웃음을 짓는다. 노인이 이유를 물었고, 그녀가 여전히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린 채로 답했다.

“아, 별건 아니에요. 그냥, 정말로 할아버지가 손녀한테 연애 조언을 해주는 것 같아서…… 좀 우스워서요.”

심정웅은 웃지 않았다. 비난, 조소, 조롱, 그 정도 소소한 반항일 뿐이다.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고, 노인은 필요한 것을 물었다.

“약은 잘 챙겨 먹느냐.”

“물론이죠. 요즘은 아침에 일어날 때 피곤하지도 않은 게, 백 살까지도 거뜬히 살지 않을까 싶네요.”

이것 또한 조롱.

심정웅은 나직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면 되었다. 이만 가보거라.”

“네, 쉬세요.”

그리고 사뿐히 몸을 돌린 심이수가 목조 건물을 나서려던 그때.

“네가 보기에는 그 아이가 어떠하더냐. 거북하지 않더냐.”

심정웅은 무심코 그렇게 물었다. 심이수가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창백한 얼굴 가죽에 담긴 의아해하는 기색. 그러다 이내 대수롭잖게 답했다.

“글쎄요, 전 그런 거 관심 없거든요. 이성적인 호감은 전에 알 때도 그렇고 어제 볼 때도 그렇고 전혀 안 들던걸요. 인간적으로 싫다는 건 아니니까 염려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정말로 신경을 쓰신다면요.”

고개 숙여 인사한 심이수가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다.

심정웅은 어둑한 실내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방금의 질문은 필요해서 한 것이었냐고. 하지만 명확하게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

6월 28일 월요일, 오전 11시 정각.

제일고에선 1학기 방학식이 얼추 마무리되고 있을 그즈음, 내 눈앞에 홀로그램 메시지가 나타났다.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0.1%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3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를 일 개체 이상 제거할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S급 균열 사건으로부터 한 달이 넘게 지나 드디어 맞이한 3권. 내가 여태 계속 주목해 오던 태그는 가장 마지막의 ‘어반 판타지’다. 도시를 무대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인외 존재들이 등장하는 장르.

악마나 몬스터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놈들은 이 세상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존재니까. 어반 판타지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종족이라면 흡혈귀와 늑대인간 정도.

여기까지가 개중에 확정적인 정보라 할 수 있을 테고, 나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미지에 가까웠다.

우선 태그 중에 ‘여름방학’. 시간적인 배경은 여름방학 기간인 오늘부터 8월 29일 일요일까지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것과 ‘어반 판타지’ 태그가 공존하고, <킬 더 이블>의 양대 주인공이라 해야 할 세아와 진유리는 여름방학 기간의 대부분은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에 머무를 거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정보.

“거기 뭐가 있나……?”

각 권의 태그는 세아와 진유리 기준으로 나타나고, 그렇다면 어반 판타지 태그도 런던에서 일어날 사건 때문에 기재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세아와 진유리니까. 나야 현재로선 가끔 얼굴 비추는 조연이나, 잘 쳐줘 봐야 주조연 정도의 비중 아닐까. 저 오빠 저거 나올 때마다 짜증 난다고 욕이나 실컷 들어먹는 그런 캐릭터.

물론 런던에선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세아와 진유리가 서울에 와 있을 때 어반 판타지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가정보단 런던에서 일이 터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고 서울은 별일 없이 무탈하게 지나갈 거라는 의미는 아니고.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인 내가 3권에서 수행해야 할 고유 퀘스트.

3권 종료 시점까지 팬텀의 일원으로서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를 일 개체 이상 제거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서울에도 있다는 거다. 인간이 아니지만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기준을 엄격하게 잡는다면 몬스터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영혼이 종속당해 자기 의지로 사고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내가 유심히 살핀 단락이 있다.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라는 점.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이건 홀로그램이 펼쳐놓은 함정이었다.

‘서울 내에서’ 인외 지성체를 제거하라는 게 아니다. ‘서울 내의’, 다시 말해 서울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인외 지성체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균열 너머에서 나온 악마를 처리하는 식으로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는 없다고 봐야겠지. 그놈들은 여기를 침공하러 오는 거지 여기 사는 게 아니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는 둘이다. 서연희와 유해빈.

하지만 설마하니 그 둘을 제거하라는 건 아닐 테니까, 서연희와 유해빈 외에도 인외 지성체가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할 터.

대체 어떤 존재일까.

흡혈귀……는 아닐 텐데. 늑대인간은 <세계의 수호자>를 쓸 때 떠올린 적이 없고. 유령? 요괴? 개조인간?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은마산 유적 같은 케이스를 생각해보면 나는 몰랐지만 정말로 늑대인간이 있을 수도 있고.

“……모르겠다.”

하소연처럼 되뇐 나는 외출할 준비를 했다. 슬슬 방학식이 끝날 시간이니까. 세아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영국에 가니까, 오늘은 방학식 마치고 나오는 애를 픽업해서 드라이브도 하고 외식도 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현관을 나서려는데…….

우웅, 우웅-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을 나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한태강’.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한 다음 연락해야 할 거 아니냐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하소연을 되뇌며 나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안 받을 수는 없으니까.

“네, 아저씨.”

수화기 너머에서 한태강이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대단히 못마땅한 기색이 스민 목소리로 대뜸 본론부터 꺼낸다.

<오는 금요일에 시간이 되더냐.>

“금요일…… 네, 특별히 일정 없습니다.”

<그러면, 그날 나랑 저녁 한 끼 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왜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은 알고 있고 만나는 게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었다.

한태강이 다시금 일렀다.

<세라한테는 말을 안 했으니 너도 굳이 얘기하지 말거라.>

“……네.”

상세한 시간과 장소는 주중에 알려주겠다며 한태강이 전화를 끊었다.

“후우…….”

머리가 지끈지끈한다. 하지만 늦게 가면 세아가 기다릴지도 몰라서 심호흡하고 이번에야말로 집을 나서려는데…….

우웅.

이번에도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

세라에게서 온 것이었다.

-한세라: 바빠서 연락을 못 하고 있었네. 갑자기 말해서 미안한데, 토요일 시간 돼? 특강 도와준 거 답례도 하고, 술 한잔 사고 싶어서.

-이도진: 그래

-한세라: 저녁 7시 괜찮지? (11:05)

-이도진: 응 더 빨라도 상관없어

-한세라: ㅋㅋㅋ. 7시로 해. 학교 방학했으니까 좀 늦게 들어가도 되잖아?

-한세라: 나중에 장소 정해서 알려줄게.

-한세라: 네가 말해줘도 되고.

-이도진: 괜찮은 데 있나 찾아볼게

-한세라: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11:06)

금요일에 한태강을 보고, 토요일에 세라를 본다.

왜 일정이 이렇게 잡힌 거지? 한태강은 세라한테 말 안 했다는데…… 아니, 말을 안 했으니까 이렇게 된 거려나.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는 수 없다고 수긍한 나는 이제 정말로 집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우웅-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도 아니고, 메신저 앱도 아니고, 문자 메시지였다.

“이건 또 뭔데…….”

내용이 상당히 길었다. 일전에 방어 구성체 논문을 발표하러 갔던 학회에서 만난, 유성전자 전무이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 성이 심 씨였는데, 드릴 말씀이 있다고 근시일 내로 한번 볼 수 있겠냐는 요청이었다.

방어 구성체 보급 얘기는 안 꺼내는 걸 보니 그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번 건 답장하지 않았다. 앞의 두 연락만 해도 머리가 아프니까. 이건 여유가 있을 때 답장하려고.

“……이제 진짜 나간다.”

흡사 다짐에 가깝게 말한 나는 문고리를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데…….

우웅, 우웅-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두 명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ㄴㄴ: 내일 볼래? (11:07)

-ㄴㄴ: 이제 너 당분간 통금 해제니까 좀 늦게까지 (11:08)

-이도진: 네...

-ㄴㄴ: 응? 대답이 기운이 없는데

-ㄴㄴ: 별로 안 내켜?

-이도진: 아니에요... 좋아요... 그럴 일이 좀 있어서...

-ㄴㄴ: 그래 ㅎ

-ㄴㄴ: 내일 너 세아 배웅하고 나서 연락할게

-이도진: 네...... (11:08)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유해빈이었다.

-용용이: 도진쿤!!

-용용이: 방금 방학식 끝났어요 ㅋㅋㅋ (11:07)

-용용이: 그래서 말인데요

-용용이: 도진쿤도 나도 시간 많아졌는데 친목도 다지게 저녁 사주실 의향 있으신가용? (어미를 활용한 언어유희임 ㅎ)

-용용이: 내일이나 모레요 (11:08)

-이도진: 그래... 원하는대로...

-용용이: 흠... 대답이 좀 뜨뜻미지근한데

-이도진: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좀 피곤해서...

-이도진: 모레로 하자 모레로

-용용이: 좋아용 (11:09)

그리고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방학식이 벌써 완전히 끝났다고? 보통 열한 시 반은 돼야 끝나고, 그래도 아직 이것저것 할 거 남았을 시간인데.

그 말인즉슨…….

우웅, 우웅.

마지막으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통화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세아가 내게 묻는다.

<교문에 안 보이는데 어디야?>

“아, 나 지금 가고 있는데…….”

방학식 끝나고 나오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아침에 호언장담했던 나는 변명처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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