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Chapter 27. 인기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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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화요일, 오후 두 시 무렵.
그리 넓진 않지만 혼자 살기엔 충분하고도 여유가 있는 집 안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나고 있었다.
“음…… 으음…….”
벌써 하루의 절반 이상이 지나갔건만 여전히 거실 소파에 누워 숙면 중인 누군가.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고등학생쯤 되는 여자애로 보였다.
170cm에 약간 못 미치는 신장.
볼륨감은 부족하나 군살이 별로 없이 탄탄한 몸은 건강한 매력뿐만 아니라 매끈하고 보드라운 느낌도 함께 갖추고 있다.
머리칼은 조금 짧은 편이라 끝이 목덜미에 닿을 정도.
얼굴 생김새는 활달해 보이면서도 그 조형 자체는 대단히 예쁜, 영락없는 여자애였다.
물론 그녀를 아는 이들 대부분은 ‘여자애’라는 말에 착각할 만하다며 웃음을 짓겠지만, 잘못 알고 있는 건 그들이다. 주위의 인식과 달리 그녀는 정말로 여성이니까.
거기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그녀는 성별이 여자이며 종족은 인간이 아니었다.
균열 너머의 세상, 악마에 맞선 저항군을 이끄는 용족. 그들이 이 세상으로 피난을 보낸 어린 공주.
그것이야말로 현재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입가론 침을 흘리며 잠에 빠진 여자애, 제일고 2학년 1분반 출석번호 18번 유해빈의 정체였다.
“흐으…… 프흐으…….”
규칙적인 숨소리를 흘리던 유해빈이 언뜻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자세를 바꿔 새우잠을 자듯 몸을 웅크린다.
잠결에 이불을 걷어찬 지 어느덧 십 분. 쌩쌩 몰아치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웠던 탓이다.
“으으…….”
한기가 스며옴에 따라 그녀가 꿈속에서 떠올리고 있는 광경도 점차 바뀌어 갔다.
비록 숨어 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던 어린 시절에서…… 그다음 맞이해야 했던 순간으로.
저 멀리서 진격해 오는, 영혼이 지배당한 몬스터 군단.
사악한 표정으로 몰살을 외치는 악마들.
슬픈 목소리로 당부하는 가족들.
어두운 하늘 높이 열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균열.
그녀는 저 공간을 지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누구도 모르는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
한데 다음 순간.
“아…….”
스아아아아-
균열 너머에서 한 남자가 빛무리를 휘감고 나타났다. 밝고 환한 빛 따위가 아니다. 칠흑처럼 어두운 빛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빛이 떠나려던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선 악마들을 물리쳐 간다.
콰아아아앙! 슈아아아-!
강대한 악마들조차도 속절없이 당했다. 유해빈은 남자에게 안겨 있는 이 순간을 무척 안락하다고 느끼며 그를 찬찬히 살폈다.
역시나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처럼 보여도.
설령 마왕보다 짙고 흉험한 마기를 두르고 있다 해도.
자신은 결코 그를 두려워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균열이 걷히고 악마들이 도망친 다음.
검은빛의 남자가 유해빈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다가간다.
이어진 선언.
<제가 최선을 다해 용족을 부흥시키겠습니다. 해빈이 저한테 주십시오!>
<어…… 어어?>
유해빈은 검은빛에 끌어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마주한 시선. 남자가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로,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그녀에게 말한다.
<해빈아, 너와 함께 용족을 부흥시키고 싶어.>
<아…… 어…… 교수님, 그으…… 진도가 사알짝, 너무 빠른데요…….>
유해빈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그야 싫은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석적인 코스를 밟아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일단 썸도 좀 타고, 정식으로 사귀고,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면서…… 이것저것 좀 하고, 그런 다음에 용족 부흥의 계획을 현실로 실현하는 게 순서 아닐까.
그녀는 그래서 잠시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고,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남자가 갑자기 표정을 바꾼다. 굉장히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그래? 싫으면 말고. 난 보스랑 짝짜꿍해야지.>
<엥? 아니, 잠깐만요, 제가 언제 싫다고->
유해빈의 다급한 외침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것이다.
퍼억!
“으아아아아!”
둔탁한 충격과 함께 비명을 내지른 유해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
주위를 둘러보니 집 안이다. 대각선 살짝 위편으로 소파가 보인다.
“꿈이었네…….”
상황을 깨닫고 나온 안도의 한숨. 아무래도 잠결에 뒤척이다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충격으로 깨어난 모양이었다.
“이도진, 나쁜 놈…….”
유해빈은 방금 꿈에서 자신을 몹시 매몰차게 대한 그의 이름을 원망스레 중얼거렸다. 악몽이라곤 해도 그렇게까지 못된 행동을 할 줄이야. 물론 꿈을 꾼 건 자신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건 꿈을 꾼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인간이 평소에 날 얼마나 애타게 했으면 이런 꿈을 꾸겠어?’
합리화를 마친 그녀는 다시 소파로 올라가 몸을 누였다. 아슬아슬하게 잠기운이 남아 있고, 당장 눈을 감으면 두어 시간은 더 잘 수 있겠지. 지금 일어나도 상당히 늦은 시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어제’라고 할 수도 없는 새벽녘에 잠이 든 데다 그녀에겐 늦잠의 당위성을 설명할 근거도 있으니까.
우선 첫 번째, 미녀는 잠꾸러기다.
이어서 두 번째, 아기는 원래 잠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해빈은 억지로 졸음을 끌어모으며 일렀다.
“용용이는 아가야…….”
용용이, 다시 말해 유해빈 자신이 미녀라는 것은 그야말로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사실. 게다가 보살펴줘야 할 아기용이기까지 하니 잠을 조금 많이 잔다고 흉볼 사람은 없을 터였다.
“으음…….”
이불을 몸에 칭칭 두르고, 머리 쪽으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유해빈은 나직이 침음했다.
잠이 올 것 같기도 한데 반대로 곧 잠기운이 달아날 것 같기도 한 대치 상태. 그렇게 일이 분이 지났다.
‘아, 됐다.’
유해빈은 눈을 감고서 배시시 웃었다. 드디어 의식이 혼곤해지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띠리링- 띠리리리링-
머리맡에 대충 놓아두었던 휴대전화가 세차게 울렸다.
“뭐야…….”
투덜거리며 뻗어낸 손에 휴대전화가 잡혔고 유해빈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화면을 바라봤다. 단 하나의 일만 아니라면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용납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를 건 상대가 바로 그녀의 잠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
몽롱한 기운이 스며 있던 유해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발신인 ‘용사 이도진’. <용족 부흥의 사명을 띤 남자 이도진>의 줄임말.
재빨리 전화 수신을 누른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어? 뭐야, 뭐예요?”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린다.
저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문데. 혹시 내일 저녁에 만날 약속의 계획을 미리 짜두고 의견을 구하려는 걸까? 그게 아니면…….
‘그냥 오늘 만나고 싶다거나?’
둘 중 무엇이든 정말 반가운 일이다. 마음이 장밋빛 상상을 피워냈고, 그녀가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을 품게 만든 사람, 이도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묻는다.
<일어났어?>
“에이, 한참 전에 일어났죠. 설마 방학했다고 늦잠이나 자고 그러겠어요?”
유해빈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자 그가 재차 물었다.
<좀 갑작스러운데…… 너 오늘 따로 일정 있나?>
“음…… 글쎄요? 특별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없는데…… 왜요?”
마음속으론 쾌재를 부르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뗀 반문에 이도진이 제안했다.
<아, 잘됐네. 급한 일 없으면 오늘 만날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아?>
“어, 음…… 언제, 어디서요? 당장은 안 되고, 두 시간 있다가는 돼요.”
그야 씻고 꾸미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야 하니까.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오늘 일정의 청사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남들 시선도 피하고 드라이브 겸 차로 멀리 가서 예쁜 카페에서 시간 보내다가, 저녁에 바다도 보고, 백사장 걸으면서 얘기 좀 하고, 그런 다음에…….’
그다음 목적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자고 갈 순 없으니 아마 이쪽으로 복귀하겠지만…… 그래도 반가운 변수가 하나 있기는 했다.
‘이세아 영국 갔잖아.’
얄미운 시누이는 아까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체류 기간은 두 달. 중간에 잠깐 돌아온다고 쳐도 그게 오늘일 리는 만무하다.
그런고로, 오늘은 확정적으로 이도진의 집이 빈다. 그 혼자만 지내는 것이다.
방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고, 그렇다면 거기서 신세를 져도 괜찮지 않을까.
수학여행 때 이틀 같은 방을 쓴 적도 있으니 일이 어떻게 잘 풀리면 오늘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망상을 하는 유해빈의 입가가 풀어졌고…….
<우리 집 와주면 좋겠는데. 남들 눈에 안 띄게.>
“어…… 네……?”
그녀는 당황해 말을 흘렸다. 꿈속의 일과 비슷한 양상. 그야 궁극적인 목적지는 그의 집이 맞긴 하지만…….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른데요…….’
하지만 이것 또한 망상일 뿐이었다. 그녀가 당황해하는 걸 느낀 건지 이도진이 서둘러 해명처럼 일렀다.
<아, 너만 부른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상의할 일이 있어서 보스도->
<해빈이 준비 다 되면 말해줘. 이쪽으로 불러와 줄 테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이도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
팬텀의 보스 서연희였다.
“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유해빈의 심정은 모르고 이도진이 야속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보스는 공간이동으로 먼저 왔고, 너도 준비 다 되면 마법으로 부를 거야.>
“……보스는 언제 왔는데요?”
<아까 열두 시쯤?>
“…….”
유해빈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두 시도 넘은 시각.
보스는 정오에 왔다면서 왜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그녀를 부르는 걸까. 그동안 둘이 뭘 하고 있었길래?
<너 메시지를 안 읽더라고. 자고 있나 해서 점심 먹고 전화한 거지.>
“아…… 늦잠잔 건 아니고 전화를 안 보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두 시간쯤 걸린댔지? 준비되면 연락해주라.>
“……삼십 분만 있으면 돼요. 보스랑 저랑 집으로 부르는 거면 ‘그쪽’ 관련 일이잖아요. 바로 갈게요.”
<그래? 일찍 오면 좋긴 하지.>
“네,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마무리한 유해빈은 곧바로 욕실로 직행해 몸을 씻었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보스와 이도진 두 사람이 밀폐된 공간에서, 침대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 공간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대충 갈 수는 없고, 어느 정도는 옷차림과 머리칼에 신경을 써 삼십 분쯤 지난 다음.
슈우우우…….
유해빈의 눈앞에 붉은 안개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바닥 부근에서부터 이 미터 정도 높이까지 이어진 마법 문이 열린다.
“후우…….”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심호흡한 그녀는 문 너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고…….
“어, 왔냐.”
“어머, 해빈이 오랜만에 보네. 한 달도 넘었나?”
처음 들어온 집 안, 기다리고 있던 이도진과 서연희가 그녀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경쾌하게 외치며 유해빈은 생각했다. 또 뭔가 사건이 일어나려는 모양이라고. 그러니 있는 힘껏 활약해 이도진을 도우리라 다짐했다.
‘뭔가 보여주겠어.’
이건 후발주자로서의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기회이기도 할 테니까.
한데 세 사람이 거실에 함께 둘러앉고 나서, 이도진이 그녀와 서연희를 보며 미안해하는 듯한 눈길을 보낸다.
그리곤 사과를 전했다.
“보스한테도, 해빈이 너한테도, 많이 미안하네.”
“어…… 왜요?”
유해빈의 물음에 그가 답했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 이번 일은 정말로 나쁜 일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