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Chapter 28. 초청 (1)
애초에 유성전자에서 만나자고 청한 것도 그자가 지시한 거겠지. 방어 구성체 보급 얘기를 할 거였다면 서상욱 교수와 함께 불렀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심가로 나를 부르고 싶어 하는 게 훤히 느껴졌으니까.
게다가 주고받은 메시지와 전화 통화로도 내막을 엿볼 수 있었다. 티가 나지 않게 심정웅을 언급하며 은근히 그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려던 대화의 흐름.
무슨 이유인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분명 심정웅이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거다. 물론 나 역시 심가를 살필 필요성이 있으니 모른 척하며 응했고.
오후 아홉 시. 이래저래 오늘 해야 할 일을 얼추 마친 나는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왜?>
“아, 그냥 뭐 하고 있나 싶어서. 밥 먹고 있어?”
런던과 서울의 시차는 여덟 시간. 한국이 더 빠르니까 저쪽은 오후 한 시, 점심 무렵이겠지. 수화기 너머에서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응.>
“거기 음식은 입에 맞고?”
<아…… 교수님이셔?>
<……순두부찌개 먹고 싶어.>
“벌써 그러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진유리의 물음이 얼핏 들려오는 가운데 투덜거리듯 세아가 꺼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앞으로 런던에서 두 달 가까이 더 지내야 하는데.
<그래서 저녁은 한식 먹으러 갈 거야. 유리랑 같이.>
이어서 세아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오늘의 일정을 보고했다.
첫날인 월요일은 짐을 풀고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거로 안다. 어제부턴 샬럿 테이트의 소개로 영국 쪽 사람들도 만나고 훈련도 하느라 바빴고,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그래? 많이 피곤하겠네. 쉴 때는 푹 쉬고, 다른 거 별일은 없지?”
<딱히 없어.>
“……다행이네.”
<근데 아까 훈련하면서 샬럿 선생님이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세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심 상념을 이어나갔다.
세아에게도 진유리에게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러면…… 이건 왜 이런 거지?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진행 중입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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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가 런던에 도착해 고작 만으로 이틀. 그 짧은 기간 만에 3권 진행률이 무려 15% 이상 상승했다.
이유가 뭘까. 세아 본인의 말뿐 아니라 상태추적 스킬로 파악하기에도 위험한 일은 없었던 듯한데.
내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있다는 뜻이니 당연히 좋은 소식은 아니고, 부족한 정보로나마 짐작해 보면 가능성은 크게 셋으로 열어둘 수 있었다.
첫 번째, 단순히 초반부라 분량이 많이 할애됐다.
두 번째, 2권의 실질적인 종결 시점과 3권 시작 시점 사이의 공백. 그 당시의 일이 어느 정도 언급된 거다.
마지막 세 번째, 가장 내키지 않는 가정이지만…….
“밤에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 밖에 나와 있으니까 더 조심해.”
3권의 태그인 ‘어반 판타지’.
그와 관련한 빌드업이 진행되고 있는 거라면…… 애가 위험한 사건과 맞닥뜨릴 일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우려는 모르고 세아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받는다.
<……나한테만?>
“…….”
저렇게 답하니 할 말이 없다. 하긴 누가 누구보고 훈계인가 싶겠지.
그래도 영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조심하겠다는 대답 정도는 들을 수 있었고, 통화를 마무리한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할 일이…… 너무 많네.
때와 장소와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내일은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을 해야 하고.
“후우…….”
한숨을 쉬며 눈을 붙이니 금세 수마가 밀려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어느새 다음 날 아침. 열두 시간 가까이 잔 거다.
안 그래도 바쁜데 괜히 시간을 손해 본 것 같다고 느끼며 나는 심신 양면으로 채비를 마쳤고, 시계가 정오를 향해갈 무렵엔 몹시 으리으리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내 어머니 정세빈의 가문인 정가와 쌍벽을 이루었으며 현재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마도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심가.
드물게 근처를 지나친 적도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 온 건 처음이고, 내가 긴장감을 갈무리하던 그때.
끼익-
문이 열리며 저택 안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온다.
낯익은 외견은 아니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깨닫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여성이 무척 반가워하며 인사한다.
“아, 선배님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손님 마중 좀 나가라고 하시길래 누군가 했는데.”
“할아버지? 그러면…….”
미리 조사해뒀으면서도 놀란 것처럼 말을 흐리자 안색이 창백한 여성, 심이수가 밝게 웃으며 답한다.
“네, 심정웅. 그분이 저희 할아버지세요.”
“아…… 그랬어?”
이 시점에 이미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심정웅이 나를 부른 이유. 황당하다면 황당하고, 나로선 티끌만큼도 내키지 않는 목적인 듯했다.
제자로 삼고 싶다거나 그런 제안을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은가 본데.
심이수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내게 일렀다.
“일단 들어오시고, 제가 앞장서면 그거랑 똑같이 걸어주세요. 여기 집 안이 외부 사람한테는 좀 사납거든요.”
경고라기엔 지나치게 명랑한 말에 알겠다고 답한 나는 대문을 넘었다. 바로 그 직후.
두근.
발을 내디디자마자 은은하지만 적대적인 마력이 내게 스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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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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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비치는 정경을 빠르게 훑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사전답사를 오지 않았고, 내게 엿보는 눈 특성이 없었다면.
무턱대고 이 저택으로 잠입했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으리라고.
당장 눈에 들어온 결계가 열 개. 모두 A급이며, 개별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고 상황에 맞게 조합할 수도 있다. 내가 본 경우의 수만 해도 족히 수백 가지.
게다가 그 모두를 관장하는 핵심적인 마력 구성체는 엿보는 눈 특성으로도 온전히 다 파악하긴 어려웠다. 아무리 못해도 S급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심지어 이건 겨우 저택 초입에 설치된 함정이고, 내부로 더 갈수록 고위의 마법이 도사리고 있을 터.
그런 길을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며 심이수가 내게 말을 건다.
“그런데 선배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지. 뭔데?”
내가 답하자 흥미를 담은 듯한 물음이 이어졌다.
“저번에 제일고에 홍보 갔던 거,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는데 들어 보니까 영원 쪽 반응이 더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정보력에서 차이가 났다고. 그거 혹시…… 선배님이 좀 도와주신 거예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거니까, 들어도 비밀로 할게요.”
“조언을 살짝 해주긴 했는데.”
나는 솔직하게 일렀다. 심이수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한데 예상과 달리 그녀가 아주 밝게 웃으며 답한다.
“아, 역시 그렇죠? 하긴 얼마나 준비 열심히 했는데 그냥 밀릴 리가 없지.”
“내가 알기로는 유성 쪽도 반응 좋았어. 오십 대 오십이라고 봐도 될걸.”
“외부 도움받아서 오십 대 오십이면…… 만족스럽진 못해도 나쁘진 않네요.”
심이수가 아쉬워하며 고개를 주억인다.
외견이 확연히 바뀐 것처럼 내가 알던 것과 다른 모습.
발전적인 마음가짐이나 경쟁의식이 강한 애는 아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심이수는 이런 일에 무관심했다.
단지 대학교에서의 공부나 과제 따위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성격 자체가 바뀐 걸까.
그런 의문을 되뇌며 나는 그녀를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
내부로 갈수록 결계와 함정의 수준이 높아진다. 정면으로 맞붙으려 한다면 36 영웅에 근접한 강자가 최소한 두어 명은 필요할 정도.
그것조차도 심가의 각성자들은 고려하지 않고 설치된 마법만 상정한 거니까…… 어지간해선 침입할 엄두도 내지 않는 게 옳은 판단이겠지.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에 목조 건물이 하나 보였다. 저택 내부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초라하고 낡은 모습.
“다 왔어요. 저 집이에요.”
심이수가 사근사근하게 일렀고, 나는 홀로그램의 메시지를 읽었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 측정 불가능한 구성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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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눈으로도 아예 해석할 수 없는, 그야말로 초고도의 마법이 저곳에 펼쳐져 있다.
목조 건물을 전방위로 방어하고 있는 마력.
극히 미세한 마력만으로도 A급 이상의 공격 마법을 구현해낼 수 있는 마법진.
그런 것들이 평범한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극도의 조형미를 갖춘 듯이 정교한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나는 목조 건물이 자리한 땅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감각과 엿보는 눈 특성으로도 어렴풋하게밖에 감지되지 않는다. 뭔가 있다는 것만, 그것이 다른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윽고 목조 건물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 힘겹게 걸어 나온다.
36 영웅의 최연장자, ‘천리안’ 심정웅. 그가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이군그래. 나를 기억하시겠는가.”
“물론이죠, 어르신.”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내 부모님의 장례식장에 저자가 조문을 온 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들어가서 말씀 나누세요. 선배님도요.”
심이수가 나와 심정웅을 목조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어둑한 공간에서 나와 마주한 심정웅이 대뜸 내게 묻는다.
“이곳까지 오면서 몇 개를 보았는고.”
나는 질문의 진의를 곧바로 눈치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자신의 손녀사위가 될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시험하려는 거다.
***
7월 1일 목요일, 오후 한 시.
자택에 머무르고 있던 서연희의 눈앞에 문득 빛무리가 나타났다.
위유웅.
황금빛과 푸른빛이 차분한 빛을 발하는 직사각형의 마력 구성체.
팬텀 단원들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이었고, 상단에는 아름다운 여우 그림이 그려져 있다.
빛무리를 흘끗 바라본 서연희는 조금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니?”
이내 통신 마법 화면에 보이는 여성. 팬텀의 여우 가면이 그녀에게 묻는다.
<정말로, 심가에 침입할 건가요?>
“응, 어제 말했고, 너도 참가하기로 했잖아.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니?”
마치 질책하는 듯한 반문에 여우 가면이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명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불가능에 가까워요. 반드시 가야 한다면 인원을 더 보강하고, 계획을 더 늦춰서->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싸늘한 대꾸.
서연희는 차가운 눈길로 여우 가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타이르듯이, 무언가를 다시금 상기시키듯이 일렀다.
“너한텐 의견을 낼 자격이 없어. 알고 있잖아?”
<……알고 있어요.>
슈우우…….
짧은 말을 끝으로 통신 마법이 종료됐다.
이제 홀로 남은 공간. 서연희는 마음속의 감정을 언어화해 되뇌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