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Chapter 28. 초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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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는 다섯 개, 작게는 예순두 개로 봤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답변. 심정웅의 옆에 자리해 있던 심이수는 적잖이 감탄했다.
‘……정말 제법인데?’
이도진이 말한 그대로다. 이곳까지 오며 그가 감지할 수 있었을 결계와 함정의 수는 예순둘. 그것들이 십여 개씩 5단계로 구성되니 크게 다섯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모두를, 마도 명문 심가가 유구한 세월로 쌓아 올린 정수를 단번에 간파해낸 것이다.
‘소문만큼은 하네.’
그것이 이도진에 대한 심이수의 평가였다.
세간에서 일컫는 그는 한 세대에 겨우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마학의 천재. 특히나 ‘눈’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다고 들었다.
복합 계통의 방어 마법.
최근에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마력 속성 연구.
둘 다 발상도 대담하고 그걸 실행하는 능력도 훌륭하나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따로 있단다.
마력 구성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감각. 그것만은 마학 역사를 통틀어도 비견할 자를 몇 명 찾기 힘든 수준이라고.
그리고, 심이수가 보기에도 ‘역사’라는 단어로 거론할 정도는 되는 듯싶었다. 바꿔 말하면 딱 거기까지만.
‘제일 큰 거랑 제일 작은 거는…… 그것까지 알긴 어렵겠지?’
다섯 갈래로 나뉜 예순두 개의 구성체. 그것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몇 개의 마법을 자아낼 수 있는지.
다섯 개의 중심축이 되는 마력 구성체. 그것들마저도 하나로 모아내는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까지 알 수는 없을 터였다. 파악했으면서도 숨기고 있을 확률은…… 심이수가 생각하기엔 몹시 희박했고.
‘말이 안 돼.’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그는 일개 인간이다.
마도 명문이라 불리는 곳의 모든 걸 단기간에 알아낼 수는 없겠지. 한낱 인간 따위가 그 정도의 감각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그녀는 내심 조소 어린 말을 되뇌었다.
‘송장 같은 늙은이가 의심도 많지.’
분명 그녀와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텐데도, 묵묵히 이도진을 응시하던 심정웅이 눈을 번뜩이며 물은 것이다.
“자네가 본 것이…… 그게 전부는 아닐 터인데.”
심정웅이 영웅으로서 지닌 이명은 ‘천리안’. 눈이 좋기로는 그 또한 역사라는 단어에 모자라지 않다.
단지 마학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 심가를 다스리며 단련한, 사람을 상대하고 판단하는 직관력. 그런 면이라면 작금에 그를 따를 자가 드물 거고, 심정웅은 지금 그 직관으로 이도진을 살피는 중이었다.
알았는데도 숨기는 게 있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혹여 심가에 해가 될 인물인지.
모든 것이 이 한 번의 문답으로 판가름 날 터였다.
그리고…….
이도진이 멋쩍어하며 답한다.
“더 작게 보면 첫 번째가 아흔아홉, 그리고 배수로 늘어난다고 보았습니다만 갈수록 정확하지 않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호오…… 그랬는가?”
낮게 이르는 심정웅의 어조에 경탄이 한가득 서렸다.
첫 단계에서 발현할 수 있는 마법의 수를 99개로 본 것. 그것이 단계를 거치며 배수로 늘어나리라고 추측한 것.
틀린 답 중 가장 훌륭한 답이고, 심이수는 마음속으로 내린 이도진의 평가를 한 단계 이상 상향했다.
‘눈은…… 기록상 남은 순수한 인간 중에선 역대 최고라고 봐도 되겠어.’
가장 중요한 마법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하다.
세부적인 경우의 수를 틀리고, 배수로 늘어날 거라고 잘못 추측한 것도 당연하다.
그 정도만 해도 심가가 마련해둔 함정의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통찰력이고, 이젠 심정웅도 더 숨기는 게 없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저리 반기는 것을 보면.
“허허, 이리 기쁠 수가 있나. 석년에 자네 어머니, 정세빈이의 영특함에 감탄한 것보다도 놀랍고 기쁘구먼. 어디 보자……. 자네는 마학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고.”
“과정입니다. 순수 마학과 실용 마학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비논리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고찰한 것을 구현하고, 실재하는 현상을 고찰해가는 과정 자체가 마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 말이 백번 옳아. 뛰어난 마학자는 뛰어난 기술자여야 하며, 또한 강한 헌터여야 하네. 정세빈이의 지론도 그랬지. 잘 배웠구먼, 잘 배웠어…….”
기꺼워하며 고개를 주억이던 심정웅이 문득 흥미로워하듯 물었다.
“자네의 연구도 그런 관점에 의거해 실용과 마학 양쪽을 고루 성취하고자 한 것이겠지? 구분 따위에 의미는 없겠지만 말일세.”
“네, 바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혹여 어르신께서 제 연구에 지적해주실 부분이 있다면 새겨듣겠습니다. 실은 어제부터 그걸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사교적인 대화가 오가며 이도진의 표정도 처음보다는 긴장이 풀려가는 듯했고, 그의 눈에서 비치는 감정은 두 가지였다.
이 나라 마학을 이끌어온 거두에게 품는 호의.
그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지적 향상심.
심정웅이 귀여운 손주를 보는 듯한 눈길로 이도진의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가 말을 거들어서 무얼 하려고. 잘 하고 있네, 그렇게만 해나가면 돼. 자네 논문은 나도 읽어보았네. 젊은 패기가 느껴져서 아주 좋더구먼. 자네만 한 나이 때는, 그래, 응당 그래야 하는 법이지.”
심이수가 보기엔 이것도 은근히 이도진의 재능을 시험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는 시험 문제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얼간이가 아니었고, 반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조금은 부족함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굳이 따진다면 그렇기는 하나…… 그것도 의도된 구성이 아닐까 추측했다네. 이수야, 너는 이 할아비와 도진 군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겠느냐.”
“으음…… 잠시만요?”
느닷없이 지목당한 심이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이어서 애매하다는 듯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이런 거 지적할 자격은 없는데…… 연결이 살짝, 정말 살짝 헐거운 느낌이 있긴 했어요. 근데 선배님도 그거 아시는 것 같고, 그럼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죠? 지금은 C급까지 통용되지만 B급, A급, 계속 올라가야 하니까.”
“…….”
놀란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던 이도진이 이내 나직이 말했다.
“구성 연결에 여유 둔 거랑 그 이유. 그거 알아내서 나한테 물어본 사람이 지금까지 열 명도 안 돼.”
연구를 보조한 제일고 서상욱 교수와 ‘몽상가’ 아르노 뒤레. 그 외엔 메일로 질문해온 극소수의 세계적인 석학들까지만. 그렇게 열 명도 되지 않는단다.
“아…… 진짜요? 그냥 혹시나 해서 던져본 건데, 인생 업적이네요.”
너스레처럼 겸손을 떤 심이수는 이도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시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녀를 향해 보내는 눈빛이 아까와는 판이했다. 또래 중에 이제야,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고 여기는 반가움.
심정웅이 적절하게 말을 거들었다.
“내 손녀라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아이도 자네만은 못해도 제법 재능이 있다네. 들어보니 안면도 있다 하고,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싶어 부른 것이야.”
“뭐…… 그러시대요.”
“저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연구 얘기는 편하게 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 그래……. 젊은 아이들끼리 어울려야 뭐가 되어도 되지 않겠나.”
흐뭇해하며 읊조린 심정웅이 심이수와 이도진에게 제안했다.
“자리가 좁구먼. 식사를 준비해뒀으니 가세나.”
노구를 일으킨 심정웅을 부축하듯 심이수가 따랐고, 이도진도 함께 목조 건물을 벗어나 저택의 중심부로 향했다.
식사 자리는 무척 화기애애하게 이어졌으며 심정웅은 단 한마디도 사업적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시원한 차를 한 잔 마신 노인이 일렀다.
“이수야, 도진 군과 산책이나 하고 오너라. 이 할아비는 기운이 없어 쉬고 있으련다.”
“아, 네. 선배님, 배도 부른데 좀 걷고 오실래요?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제가 가꾸는 정원이 있는데, 꽃이 꽤 예쁘거든요.”
“그래.”
선선히 답하고 자신을 따라나서는 이도진을 심이수는 흘끗 바라봤다.
객관적으로 보면 대단히 매력적인 외모. 또래 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 서글서글한 성격.
그녀는 다시 한번 결론을 내렸다.
‘딱히 끌리진 않네.’
과거 대학에 다닐 때, 이도진과 같은 조가 된 자신에게 조를 바꿔줄 수 있냐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부탁해왔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 애들이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하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다. 그때도, 지금도.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쓸 만한 사람인 건 사실이니까.’
그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 자신을 달래며 심이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사로운 감정놀음이 개입될 일은 아니다. 진실로 중요한 게 있다면 그런 건 쓰레기처럼 무가치하다고, 그녀는 그리 여기며 지난 수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심이수와 이도진을 바라보며 노인은 마음 깊이 환희했다.
‘저 눈이면, 저 눈이 있으면…… 그러면 능히 성취할 수 있음이야.’
날 때부터 하늘이 정해준 수명. 이젠 지연시키는 것조차 어려운 신체의 노화. 그 저주스러운 굴레를 떨쳐낼 수 있을 터였다.
‘수호자’ 이시혁.
‘대마법사’ 정세빈.
아득히 위대했던 두 영웅이 이 세상에 남긴 재능,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저 눈만 그의 것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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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스킬 ‘인식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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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잘 넘긴 것 같은데…….
심이수와 함께 잘 가꾼 정원을 걸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심정웅은 나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 자기 쪽으로 끌어드리려는 작정인 듯하나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일부러 저택을 둘러보게 한 것도 그 일환인 듯했다.
내가 뭘 봤는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지를 살펴보려고.
저쪽에서 적당히 구미가 당길 만큼 답해주긴 했으나 자칫하다간 들켰을지도 모른다. 심정웅과 심이수,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 발동한 인식지배 스킬이 없었다면.
콧노래를 부르며 정원을 둘러보던 심이수가 자랑하듯이 묻는다.
“예쁘죠?”
“그러네. 저건 무슨 꽃이야?”
“아, 저거요?”
자기가 가꾸는 정원이라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심이수가 막힘없이 꽃의 이름과 꽃말을 설명해나간다.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지는 모습에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니 그녀가 옅게 웃으며 일렀다.
“저 이 집 들어오기 전에는 엄마랑 둘이 살았거든요. 저희 엄마가 꽃가게를 하셨는데…… 보고 들은 게 이거라서 저도 꽃 관련은 그럭저럭 잘 알아요.”
“……어머니?”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심이수는 사생아다. 심정웅의 넷째 아들이 죽기 전, 각성자가 아닌 여성과 만나다 생긴 딸.
그자는 심이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건 심가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솔직히 잘 됐어요. 저희 엄마 병 때문에 너무 많이 아프셔서, 보는 저도 힘들었거든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꽃을 바라보는 심이수의 표정이 너무도 먹먹해 보였으니까.
아마 그녀는 이렇게 바라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살아주면 좋겠다고.
꼭 낫게 해주고 싶고, 그게 안 된다면 자기가 대신 아파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제발 살아달라고.
그걸 원하지 않았을까.
정원에 잠시 침묵이 일었고, 곧 심이수가 표정을 밝게 하며 일렀다.
“아무튼, 그래서 이 집 들어와서도 꽃은 계속 가꾸고 있어요. 엄마가 보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래……. 근데 저 꽃은 뭐야?”
뭐라 답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어 화제를 돌릴 겸 내가 물은 말.
심이수의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벚꽃잎처럼 예쁜 꽃잎이 핀 꽃이었는데, 모양은 같지만 색이 제각각이었다.
심이수가 웃으며 설명한다.
“저건 수국이에요. 여름에 피는 꽃인데, 시기 따라서 색이 변하고 어디서 키우느냐에 따라서도 다른데, 그래서인지 꽃말도 여러 개예요.”
“여러 개면 각각 뭔지 알려줄 수 있어?”
“음…… 흰색은 변덕, 청색은 냉담, 분홍색이랑 보라색은 꿈, 진심 이런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요, 그리고…….”
거기서 말을 멈추던 심이수가 옅게 웃는 얼굴로, 의연하게 일렀다.
“인내심이 강한 사랑이라는 뜻도 있고요.”
한데 바로 그 직후.
“커흑, 흐윽, 아…… 하아, 하아…….”
갑자기 심이수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하며 땅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내가 다급히 다가가자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게 유전인 건지 뭔지, 저도 엄마 따라서 지병이 좀 있어서…… 가끔 이러거든요.”
그렇게 말한 심이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본래 창백하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오후 일곱 시.
집에 돌아온 나는 거실 위편에 떠올라 있는 홀로그램 두 개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여우 그림이 그려져 있고, 또 하나는 용 그림이 그려진 통신 마법.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에는 여우 가면을 쓴 금빛 머리칼의 여성이, 또 한쪽에는 용 가면을 쓴 유해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유해빈은 경쾌하게, 여우 가면은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저쪽에선 집이 아닌 다른 공간처럼 보이겠지만 나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서연희가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작전 회의를 좀 할까 해서 모이라고 했어. 나랑 내 귀염둥이는…… 우리는 실제로도 아는 사이니까 보다시피 같이 있고.”
[아…… 그러네요?]
정황을 아는 유해빈이 시큰둥하게 이른 말. 여우 가면은 말없이 나와 서연희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차갑게 묻는다.
[이번 작전을 누가 제안한 건지, 그것부터 알려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