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Chapter 28. 초청 (3)
“작전 자체를 제안한 사람은 나야. 구체적인 계획은 귀염둥이랑 내가 상의해서 결정한 거고.”
서연희가 시원스럽게 답했다.
유해빈을 제외한 팬텀 단원들은 자신 외에 다른 멤버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특히나 이번 작전은 여우 가면의 입장에선 꽤 미심쩍은 일일 테고, 그러니 제안한 사람이 나라는 걸 숨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머리가 무척 명석한 듯하니까. 필요 이상으로 단서를 많이 주게 되면 오늘 심가에 방문한 제일고 교수 이도진과 테러조직 팬텀의 간부이자 서연희의 측근인 나를 그리 어렵지 않게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서연희의 설명을 들은 여우 가면이 조용한 시선으로 나와 서연희를 응시한다. 그 모습에 나는 가끔 그녀를 보며 떠올렸던 생각을 되뇌었다.
저 사람…… 보고 있으면 세라랑 조금 닮았다고.
외견 때문에 드는 생각은 아니다. 그야 머리칼은 둘 다 금발이지만 눈동자 색은 다르다. 세라는 푸른빛이고, 여우 가면은 정말 여우처럼 호박색 눈동자.
게다가 세라의 머리칼 색이 훨씬 예쁘고, 길이도 세라는 단발이지만 저 사람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다.
그러니 내가 둘이 닮았다고 느낀 건 외견 때문이 아니다. 그거야 마법으로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고.
그냥,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차분한 분위기가 좀 닮았다. 목소리도, 키도, 눈동자 색도 다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왜 그러죠?]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여우 가면이 의아해하며 던진 질문.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보스와 내가 알아낸 정보가 있으니 둘 다 들어보고, 의견을 말해주면 좋겠어.”
물론 분위기가 닮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우 가면의 정체를 세라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다. 의심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당연한 진리 같은 거다.
만에 하나라도 여우 가면의 정체가 세라라면…… 서연희가 그걸 내게 말해주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서로를 대하며 가지는 원칙.
우리의 모든 행동은 서로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그 원칙이 확고한 이상 서연희를 의심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세라가 여우 가면이라는 걸 내게 알리지 않는다?
그건 프라이버시니 뭐니를 따질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래서 여우 가면이 팬텀에 입단하고 지난 일 년 반 동안, 나는 그녀가 세라일 거라고는 결코 의심한 적이 없다. 그냥…… 좀 닮았네, 걔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이런 생각만 했지.
“알아보니까 심가 방비가 나름대로 철저하더라? 우리 귀여운 아기용은 그때 없었지만…… 왜, 작년 여름에 이집트에서 보물 가져온 적 있잖아? 그때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거야.”
[그때는 일곱 명이었지만 지금은 넷이에요. 전혀 비슷하지 않아요.]
[……저는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보스.]
여우 가면뿐만 아니라 유해빈까지도 뚱한 말투로 답한다. 서연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가늘게 웃기만 했고, 내가 대신 나서 단원 둘에게 일렀다.
“처음 침입할 때가 가장 중요해. 하지만 그건 보스와 내가 대비해둔 게 있으니 너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부에 들어가서 우리 지시에 잘 따라주기만 하면 계획은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사전답사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외곽 지역에 펼쳐진 결계와 함정은 침입자의 유무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 것들이다.
거기서 걸리지 않으면 성공 확률을 50% 이상으로 점칠 수 있을 테고, 그다음부터 헤쳐나가야 할 함정은 유해빈에게 나중에 따로 언질을 둬야겠지.
“정리해서 말하면 이런 거다. 우리 네 명 다 맡은 일이 명확하고, 그중 한 명이라도 소홀히 하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을 테니까, 이 점을 분명히 숙지하도록 해.”
핵심적인 정보를 가진 나는 멤버들을 총괄해 지시하고, 내게 미리 정보를 들은 유해빈은 나를 도와 함정을 돌파하는 것에 주력한다.
주요 정보를 듣지 못한 여우 가면은 보조 역할과 침입을 눈치챈 각성자들이 공격해오는 걸 경계하는 임무를 맡고, 마지막으로 서연희는…… 일단 개입하지 않고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어머, 그래도 돼? 나만 너무 편한 역할이라 너희한테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보스까지 나서실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제 목표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장의 카드, 그런 느낌으로?”
“글쎄요. 그건 너무 계산적인 것 같은데…… 존경하는 보스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해두죠.”
“‘예우’라고 하면 또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여서 섭섭한데.”
“그럼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응, 그건 좋네.”
나란히 앉은 가운데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이며 서연희가 답했다. 여우 가면은 우리가 뭘 하든 관심도 없는 듯하고, 유해빈이 시큰둥하게 말한다.
[제가 비록 신입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사적인 행각은, 저희 조직의 기강도 있는데 두 분이 자중하셔야 할 부분이 아닐지…….]
“아, 뭐, 그래.”
“음…… 하긴, 사적인 건 사적으로 하면 되니까.”
[알아야 할 건 다 끝났나요?]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진다고 생각한 건지 여우 가면이 물은 말.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녀가 다시 묻는다.
[그 나라 시각으로 7월 10일 저녁이라고 했죠? 그전까지 또 회의할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세요. 따로 시간을 내야 하니까.]
“우선 이번 주는 없을 거야. 난 딱히 상관없는데, 내 귀염둥이가 토요일까지 계속 일이 있어서. 얘가 인기가 많거든.”
[……알겠어요.]
짧게 답한 여우 가면이 통신 연결을 끊었다. 홀로그램에서 그녀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나는 유해빈에게 오늘 심가에서 살핀 마법의 종류와 수준을 상세히 일러줬다.
이내 이삼십 분이 지나 그것까지 마무리된 다음.
“그럼 난 가봐야겠네. 해빈이 잘 자고, 내 귀염둥이도 푹 쉬어.”
“……귀염둥이 그거, 일할 때만 그렇게 부른다고 약속했잖아요.”
내가 허용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팬텀 단원들이 있을 때 나를 부를 호칭이 없다길래 적당히 알아서 부르라고 했더니 그녀가 거론한 단어.
거부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다른 후보는 더 심각해서 차라리 귀염둥이가 낫겠다 싶었다. 당연히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 때는 극구 사양하고 싶고.
항의하는 눈길로 바라보자 공간 마법의 빛무리를 두른 서연희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해빈이 통신 마법 켜져 있으니까 아직 일하고 있는 거 맞잖아?”
슈우우우…….
유해빈의 통신 마법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서연희도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우우웅-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유해빈. 내가 전화를 받자 굉장히 서운해하는 투로 불평한다.
<저기요, 이도진 교수님……. 진짜, 일하실 때 말투가 너무 차가우신 거 아니에요?>
“솔직히 그렇긴 한데…… 너만 듣는 게 아니라서 그건 어쩔 수가 없어. 이해 좀 해주라.”
<완전 명령조로, 목소리도 되게 깔면서 말하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수업했으면 절대 지금처럼 인기 안 많으셨을걸요?>
그러고도 서운함이 풀리지 않는지 몇 마디를 더 구시렁거리곤 나서야 화제가 바뀌었다.
<보스는 가셨죠?>
“어, 바로 갔지.”
기왕 저녁 시간에 왔으니 같이 밥 먹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이기도 하고, 조금 섭섭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시시콜콜 얘기할 내용은 아니라 이후엔 다른 대화가 이어졌고, 그러다가 유해빈이 문득 궁금해하며 묻는다.
<근데 보스가 말씀하신 거요, 토요일까지 일 있으시다는 거. 그건 뭔지 물어봐도 돼요?>
“그냥 뭐, 내일이랑 모레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있어서.”
<……여자요? 아직은 약혼 관계이신 그분?>
“너도 가만 보면 은근히 눈치가 빠르네…….”
<척하면 척이죠. 그러면 다른 한 명은 누군데요? 설마 또 여자? 또?>
“아니, 그건 아니고…… 걔 아버지가 잠깐 보자고 하셔서.”
<와우…… 아주 난리 났네요, 난리 났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유해빈이 재차 물었다.
<보스는 아세요?>
“말했지.”
<후…… 계속 들으면 머리 아플 거 같으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안녕히 주무시거나 말거나.>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나도 내가 떳떳하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뜻하지 않게 일곱 살이나 어린 용한테까지 질책을 들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래……. 내가 쓰레기지, 내가 쓰레기야…….”
자조 어린 말을 되뇐 나는 근심과 걱정을 잊고자 집안일에 열중하기로 했다.
서연희가 오기 전에 집을 치워두긴 했지만 한 번 더 깨끗하게 거실과 부엌을 청소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밖에 나가서 담배도 피우고, TV도 보고, 이것저것 하고 나니 어느새 밤늦은 시각이었다.
그리고 욕실에서 손을 씻고 양치를 하려다가…… 그대로 옷을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낮에 외출하고 와서 샤워를 안 했으니까. 세아가 있을 때야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들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다.
여름철이라 시원하게 틀어놓은 물로 말끔히 몸을 씻어낸 나는 수건으로 물기만 닦고 욕실을 나섰다.
“이게 자취지, 이게 독신이지.”
며칠 지났다고 벌써 세아에 대한 죄책감이 많이 흐려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불을 켰는데…….
“……?”
“으응……?”
개어놓은 이불 위에 엎드려 있던 서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문장이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뭐야, 이 사람 왜 여기 있어. 자기 집 간다고 공간이동으로 갔잖아.
왜 내 방에 있지? 왜 졸다가 깬 것처럼 눈 뜨다가 깜짝 놀라서 나를 보는 거지? 저 사람 지금 시선이 어디를 보는 거지? 왜 얼굴이 빨개지고 경악한 표정이지? 내가 지금…… 뭐 입고 있더라?
모든 판단은 일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내려졌다.
서연희가 거짓말을 한 거다. 집에 간다고 해놓고서는, 공간 마법으로 아주 짧은 거리만 이동한 거다.
이 집 거실에서, 내 방으로.
놀라게 해줄 작정이었겠지. 그리곤 나와 같이 저녁을 먹고, 맥주도 한 캔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의논하고, 그럴 생각이었을 거다.
하지만 변수가 하나 있었다. 내가 곧장 방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
유해빈과 전화를 하고, 집안일 하고, 그러느라 방에는 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연희는 나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와 마주친 거다.
“아…… 그게 있잖아, 장난치려고 했는데…….”
내 추측이 맞았네.
눈길을 돌릴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그럴 여유가 없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서연희가 중얼거린 말.
나는 선택해야 했다.
괜히 모양 빠지게 민망해하며 자리를 피하거나, 기겁하며 가리거나, 그런 식으로 행동할지.
아니면 오히려 태연하게 행동할지.
내 선택은 후자였고, 나는 겉으로 들리기엔 창피해하지는 않고, 하지만 황당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어?”
“전에도 봤잖아요.”
당장 최근에만 해도 검은 심장을 봉인할 때 술식 효율 때문에 홀딱 벗고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이래저래 아예 처음 보는 건 아닌데.
“그때는…… 일이었잖아? 지금은 좀, 마음의 준비가…….”
그렇지. 나도 서연희와 같은 생각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보게 되는 것과 지금 이건 다른 영역이지. 그럴 땐 시선을 피해줬으니 확실히 본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사태가 더욱 혼란스러워질 걸 아는 나는 차분하게, 퉁명스럽게 부탁했다.
“저 옷 좀 입게 나가줘요. 밥은 먹을까 말까 했는데…… 먹어야겠네. 뭐 먹고 싶은지나 생각해둬요.”
“아, 응……. 그래.”
서연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겨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을 나서더니 문을 닫아준다.
“……미치겠네.”
혼자 남은 나는 애써 당황스러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어색하지 않게 무슨 대화를 할지 생각하며 거실로 나와 보니까…….
-나 갈게. 아까 미안했어.
집 안에 서연희의 기척은 없고 쪽지 한 장만 달랑 놓여 있었다.
“진짜 부끄러웠나 보네…….”
나도 창피하긴 한데, 육탄 공격이라는 게 어감은 이상하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승리를 거둔 게 뿌듯하기도 하고, 이렇게 이겨놓고 뿌듯함을 느끼는 게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대단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다음 날, 7월 2일 금요일의 저녁.
나는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정중한 복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덥긴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약속 시각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건만 상대가 나보다 앞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36 영웅의 한 사람.
초일류 길드 영원의 수장.
그리고 내게는…… 세라의 아버지.
한태강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일찍 왔구나.”
“늦게 도착해 죄송합니다.”
나눌 말이라고는 고작 그 정도였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애정 어린 말을 건네고, 환하게 웃으며 답할 사이가 아니게 되었다.
침묵에 이어 그가 단박에 본론을 꺼냈다.
“조만간에 너를 한 번 부르도록 하마.”
“……언제 말씀이신가요.”
그가 답했다.
“7월 11일 창립일 행사. 오지 않아도 좋지만 만약 그 자리에 참석하겠다면…… 나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마.”
7월 11일.
그건 한태강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날이다.
영원 길드의 창립일.
그의 아내 올리비아 윈의 생일.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그가 내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