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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19화 (119/207)

#119화. Chapter 28. 초청 (4)

두 기념일이 같은 날인 건 우연이 아니다. 한태강이 길드 창립일을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로 정한 것이다. 악마와의 싸움이 끝난 이듬해 여름, 세라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그런 날이다. 본래 기쁨만이 가득했어야 할 날이지만 이제는 슬픔도 스며 있는 날.

거기엔 세라와 한태강이 있을 거고, 많은 이들이 모여 영원 길드의 창립을 축하하고 올리비아 윈을 추억할 거다.

그런 곳에, 그런 날에 나를 부른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태강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지만 그는 결국 나를 그 자리에 부르기로 했다.

내가 자신에게 안겼던 무수한 실망감.

세라에게 줬던 그 많은 상처.

그것들을 단 하루에 모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고 용서해보고 싶다고. 내가 그곳에 온다면 그러도록 노력해보겠다고.

이 제안에 내가 응한다면.

창립일 행사에 간다면.

어쩌면, 아니, 분명 긍정적인 얘기가 오갈 거다.

한태강이 나를 뭐라고 소개할진 모르겠지만 여태 그랬던 것처럼 날 선 말로 박대하지는 않을 터였다. 7월 11일은 그에게 있어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그러니 이 초청은 그가 내게 내미는 마지막 손길이다. 참석한다면, 그러면 무언가 달라진다. 틀림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하지만 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정한 의미로 끝이다. 세라는 몰라도 한태강 본인은 더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하겠지. 이미 너무 많은 기회를 줬고, 마지막까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셈이니까.

내가 답하려 하자 그가 단정적인 어조로 가로막았다.

“지금 말할 필요는 없다. 오면 오는 것이고,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거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도록 해라. 네 생각이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렇게만 이른 그와 나는 별다른 대화 없이 저녁 식사를 해나갔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맛있는 음식들인데도 모래를 씹고 삼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분간이 안 될 만큼 불편한 시간.

세라에 관한 얘기는 일절 화제로 꺼내지 않고 한태강은 사무적인 질문만을 던졌다.

방어 구성체 보급에 관한 이야기.

그간 부지런히 준비한 터라 관련 진행은 얼추 마무리 단계다. 아마 여름방학 기간 내에 첫 시연회를 할 거고, 각성자 장비 시장에 출시하는 것도 올해를 넘기지 않을 거다.

“로열티 쪽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이 바뀌었다면 말하거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

“아뇨, 처음에 정한 그대로 가겠습니다. 저는 단 1원의 수익도 원하지 않습니다. 방어 구성체가 최대한 빨리 보급되기만 한다면요. 더불어 이 부분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곧 C급이 아니라 B급까지도 보급 가능한 수준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연회 전까지 확실히 가닥을 잡아 관련자분들께 말씀드리려 하고, 당연히 제 수익의 용도는 그것과 무관합니다. B급을 넘어 향후 A급, S급까지 올라가더라도요.”

“정 그러고 싶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리고 이제는 8부 능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는, 마력 속성에 관한 연구.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것 같고 아저씨도 그러시겠지만…… 방어 구성체 쪽이 일단락되고 나면 논문을 하나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전 것보다 더 대단한 연구라는 말이 있더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괜히 겸손을 떨 사안은 아니니까요.”

그러자 한태강이 묻는다. 두 번째 연구도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 않을 작정이냐고. 나는 그럴 것이라고 답했고, 그가 무감해 보이는 눈길로 나를 본다.

어째 심가에 방문했을 때와 분위기가 정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사업적인 얘기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오직 서로를 칭찬하고 친분을 쌓아나가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대화였다.

하지만 어제의 대화보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금 이 삭막한 대화가 내게는 더 정겹게 느껴졌다.

겉으로 주고받는 말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중요한 거니까.

사무적인 화제.

못마땅해하는 시선.

그러면서도 나를 뼛속까지, 순수하게 미워하지는 않는 사람.

한 시간 남짓했던 식사는 내게 가시방석처럼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자리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살갑게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라고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물론 변명에 불과한 걸 알지만…… 지난 십 년간 내 본심은 그랬다.

그래서 아쉬움과 안도감이 혼재한 가운데 식사가 끝났고, 밖으로 나온 한태강과 나는 인사를 나눴다.

“들어가거라.”

“네, 아저씨. 살펴 가세요.”

배웅하듯 기다리는 나보다 한태강이 먼저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한데 문득, 먼 곳을 바라보며 그가 말한다.

“만약에 그날 네가 참석한다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나와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세라에겐 오늘도 그날도 내가 불렀단 말은 하지 말고, 네 의지로 찾아온 것으로 해두고.”

“……절대로 말 안 하겠습니다.”

그곳에 가야 할지.

갈 수나 있을지.

그것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힘주어 답했다.

과묵한 저 표정에 가려진 이해심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저기에다 대고 구구절절한 말을 늘어놓는 건……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인파가 많은 여름밤의 거리를 헤쳐나가며 나는 서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우-

신호음이 두 번 간 다음, 수화기 너머에서 상당히 멋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밥 먹고 이제 집 가고 있어요.”

오늘도, 내일도, 집에 들어가면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러나 어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서연희의 말투에서 평소의 상냥한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 그래? 무슨 이야기 했는지 물어봐도…… 아니, 아니야. 전화해줘서 고마워.>

어제야 일부러 뻔뻔하게 나간 거지만 오늘은 실제로도 당황스러운 심경이라 나는 살짝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니, 보인 건 나잖아요. 왜 본인이 그렇게 창피해하냐고요.”

<그거까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건 너무 민망해서 노코멘트. 너도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걸? ……아니려나? 오히려->

“……그냥 안 들을게요.”

저걸 들어버리면 기껏 잡은 승기가 다시 그녀 쪽으로 넘어갈 듯한 불길한 예감에 나는 상세한 이유를 듣길 거부했고, 조금은 목소리가 편안해진 서연희가 내게 일렀다.

<오늘까진 마음의 준비가 덜 돼서 진정할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내일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일도 꼭 전화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어요.”

이내 나도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방금 서연희와 대화하며 머릿속이 맑아졌고, 확고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영원 길드의 창립일 행사에 참석하는 게 맞는지.

참석한다면, 그때 내가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해가던 시점.

우우웅-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세라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디야? 밖인가 보네?>

“아, 산책 좀 한다고.”

<이 더운 날?>

언뜻 의아해하며 장난스럽게 묻는 말. 나는 태연하게 거짓으로 답했다.

“안 그래도 더워서 슬슬 들어가려고.”

나야 한태강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세라가 욕을 하거나 때려도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부녀 사이에까지 불화를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

<그래, 더운데 빨리 들어가. 그리고 전화는 왜 했냐면, 우리 내일 만나기로 한 거 혹시 깜빡 잊어버렸나 해서.>

“그걸 까먹겠냐.”

내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세라도 마주 웃으며 일렀다.

<하긴 그렇긴 한데…… 혹시 몰라서 전화해봤어. 일곱 시에 맨날 보던 데서. 이것도 안 잊어버렸지?>

“응. 나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더우니까 둘 다 먼저 와서 기다리지 말고 정확히 일곱 시에 만나자. 괜찮지?”

<난 십 분만 일찍 올게.>

“……그럼 여섯 시 오십 분에 만나는 거로 하자.”

<그래, 들어가.>

통화를 마친 다음, 나는 무더운 여름밤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데.

잘 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았다.

***

“그래, 들어가.”

<응, 너도 오늘 바빴을 텐데 푹 쉬고.>

이도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잦아들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한세라는 침대에 누운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고운 입가의 선이 가늘게 내려앉았고, 푸른빛 보석 같은 눈동자엔 고민을 담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인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방을 나선 그녀는 귀가한 한태강에게 물었다.

“저녁은 드시고 오셨어요?”

“먹고 왔다. 너는?”

“아직 안 먹었어요. 저도 일 끝나고 방금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아빠랑 저녁 같이 먹으려고 비서실에 여쭤봤는데, 일찍 퇴근하셨다고 하던걸요.”

“중요하게 회의할 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 좀 만나고 오는 길이다.”

“아직은 제가 몰라도 되는 일이요?”

“너한테 맡긴 업무만 해도 바쁠 텐데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지.”

“도와드려도 되는데.”

한태강의 서툰 설명에 한세라는 미안해하듯이 답했다. 그리고 내심으로만 생각했다.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나 보네.’

불안함은 어느 정도 걷혔다. 남은 건 궁금해하는 마음이고, 그건 내일 차분히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만큼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았다.

“이제 어디 갈래? 2차는 내가 살 테니까,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그러면 간단하게 맥주만 한잔 마시고 가자. 나 내일 연구실 가야 해서 술 더 오래는 못 마시겠네.”

“……그래?”

7월 3일 토요일, 오후 9시.

만난 지 고작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도진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오래 있진 못하겠다고. 곧 가봐야겠다고.

한세라는 그게 서운했으나 이해는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의아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은데.’

스스로 눈치채진 못한 듯하나 한세라는 알 수 있었다.

이전보다 더 거리를 두려고 한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를 밀어내려고 한다.

말투와 표정, 목소리와 행동, 마음이 담아내는 그 모든 면에서.

맥주는 마시고 가겠단 것도 예의상 한 말이겠지.

이만 자리를 파하자고 했다면…… 그는 거절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의문과 서운함을 모두 감추며, 한세라는 이도진과 어둑하고 조용한 가게로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왜 더 차가워진 걸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고, 넌지시 살피는 것도 잘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이도진을 잘 안다 한들 이렇게 마음을 닫고 숨겨버리면, 이렇게 정보가 없다면, 듣지 않고 목격하지 않았던 광경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으니까.

두 사람이 한 잔씩 들고 있던 술이 빠르게 비워졌다. 두 잔째, 이내 세 번째 잔까지. 그러고도 시간은 밤 열 시에도 미치지 못했고, 하지만 이도진은 슬슬 일어나자며 자기 쪽에서 계산을 마쳤다.

“오래 못 있어서 미안.”

“아니야, 내일 일 있다며. 오늘 재밌었고, ……다음에 또 봐.”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서운한 게 없는 것처럼 인사를 건넨 한세라는 멀어져 가는 이도진을 바라봤다. 그는 인사하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홀가분하게 여겼을까, 아니면 아쉬워했을까. 둘 다라면…… 그중에 어느 쪽이 더 본심에 가까울까.

한세라는 이도진과 반대편으로 걸으며 계속 그걸 생각했고, 정확히 알고 싶다고 느꼈다. 그녀 스스로 고민해서 알지 못할 문제라면…….

‘물어보면 되잖아.’

한세라는 지나온 길을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야 어른스러운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고,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이윽고 먼발치에 이도진의 모습이 보인다. 한세라는 마력까지 끌어올려 심호흡하며 기척을 가라앉혔다. 그렇지 않아도 창피한 일인데 침착하지 못한 언행까지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이도진이 휴대전화를 귓가로 가져간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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