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Chapter 29. 불청객 (1)
한세라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맞네, 확실히 어제랑 다르긴 하네요.”
편안한 웃음이 담긴 말. 방금까지 그녀와 있으며 짓던 것과 다른 표정일까. 아니면 같을까. 뒷모습만 보여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이도진이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나갔다.
“좀 회복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 일은 더 거론 안 할게요. 왜긴 왜야, 이제 말하면 제가 손해일 것 같아서 그러죠. ……술요? 별로 안 마셨어요. 내일 작업할 것도 많고…… 그리고, 너무 늦게 안 들어갈 거라고 말했잖아요. 아니, 뭘 더 마셔요, 내일 진짜 바쁘다니까. 집에 가면 술 깨고 미리 좀 처리해놓을 거예요. 네, 네, 들어가요.”
이도진이 휴대전화를 내리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한세라는 몸을 돌렸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지금도 궁금하지만.
어쩌면…… 이도진에게는 더는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거짓말이었어.’
추모 광장에서 그녀가 이도진에게 물었던 말. 자신을 좋아했냐고.
이도진은 답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그건 거짓말이다. 친구로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서도 좋아했을 거다. 아주 오래, 아주 많이, 열다섯 살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무리 거짓을 말하며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한세라는 그런 것도 알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지금도 의미가 있을까?’
예전에 이도진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건 너무나도 확실하지만……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떨까.
과거가 아니라 현재만을 놓고 본다면…… 그때의 대답을 온전히 거짓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내 잘못이야.’
그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걸 한세라는 안다. 얼간이처럼 살았으니까. 이해해주는 척하고 응원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그건 이도진에게 위로로 다가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부담이고, 일상 속에서 그나마 마음 편히 있을 장소까지 빼앗았을 거다.
닫힌 공간에 천천히 물이 차오르듯이. 상냥한 말로 부드럽게 목을 조이듯이. 무지가 함부로 빚어낸 잔인함.
‘……괜찮아.’
한세라는 그렇게 되뇌었다.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책망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거야.’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틀림없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온 마음을 다해 전하려는 말이 있고, 오지 않길 바라면서도 기다리는 순간이 있다.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할 수 있어.’
다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한세라만이 가능한 일.
‘내가 말해줄 수 있어.’
먹먹한 슬픔보다 간절한 진심. 그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한세라는 집으로 향했다.
***
7월 8일, 목요일 오후.
한창 토론을 벌이다 잠깐 가진 휴식 시간에 심이수가 물었다.
“선배, 무슨 생각 해?”
“그냥, 별생각 안 했는데.”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집을 어떻게 하면 잘 털어먹을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다고는 답할 수 없어 나는 그렇게만 둘러댔다.
그러자 심이수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슬슬 배고픈데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
“같이 시간 보내주는데 밥까지 먹여주면 좀 미안한데.”
“선배가 왜? 할아버지가 언제든 오라고 했고, 내가 시간 나서 심심해서 불렀고, 그리고 선배랑 토론하면 이득 보는 건 난데. 아까 연구실에서 그러더라고. 오늘도 괜찮은 거 있으면 알아내서 자기들한테 알려달라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나한테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 있나?”
“어차피 뻔한 건데 뭘. 어서 일어나요,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부탁드렸어.”
에어컨을 튼 것도 아니고 밖엔 쨍쨍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알맞게 쾌적한 대청마루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심이수와 함께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향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두 번째 찾아오는 거고, 그러니 도합 세 번째 방문. 내가 얻은 것도 있고, 불가항력으로 저쪽에 제공하게 된 것도 있다.
그중 내가 얻은 것은…….
“할아버님은 식사하러 안 오시고?”
“오늘은 기운이 없으시다니까. 아니면 가기 전에 한 번 뵙고 가.”
“그래야겠네.”
심가 내부의 동향.
밤이 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낮의 상황은 그런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결계, 함정, 각성자가 몇 명 상주하고 있으며 그 수준이 어떠한지까지.
+
<킬 더 이블> 3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심가의 비고(祕庫)에 잠입해 ‘천리안’ 심정웅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탈취하고, 추적을 따돌려 완벽하게 도주할 것
-기한: 7월 10일 오후 8시~7월 10일 자정
-인원: 이도진, 서연희, 유해빈을 포함한 팬텀의 멤버 4인
-클리어 보상:
1) OX 질문 1회
2) 보상 수령 시점, ‘서울 내’ 인외 지성체의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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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찾아내야 할 장소.
심가의 비고가 어디인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바가 있었고.
그에 비하면 마학 연구에 쓰일 화두 몇 개 던져주는 건 싸게 먹힌 거지.
다만, 이걸 심가에 제공했다고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긴 한데…… 그런 방면에서 곤란한 점도 하나 있었다.
“맛있지? 난 이 집 들어오고 나서 제일 좋은 게, 밥이 처음 먹었을 때 너무 맛있더라고. 진짜 울 뻔했는데. 아니다, 울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아무튼, 선배는 여태까지 다섯 번도 안 먹었으니까 아직 감동이 살아있으려나?”
“몇 번 더 먹어보고 말해줄게.”
“음…… 그러니까 또 올 거라는 뜻이네? 나야 좋지.”
심이수와 조금…… 아니, 좀 과하게 친해졌다. 대표적인 예가 반말. 월요일에 왔을 때 나를 배웅해주면서 다음부터는 반말을 쓰겠다더니 오늘은 정말로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그것 자체가 거북한 건 아니다. 예전에 같이 조별과제 할 때야 ‘아니,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니까.
원체 사교성은 좋았고, 대학 다닐 때와 달리 무책임한 것도 아니라 성격만 놓고 보면 대하기 불편한 느낌은 없다.
연구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내 또래 중에선 이만한 애가 없고, 목적이 있어 가까워진 것만 아니라면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목적이 있기에 그녀와 교류하게 된 거고, 그래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찝찝했다.
“또 멍하니 있네. 피곤해?”
“아, 요즘 좀 바빠서.”
“그러면 오래 붙잡아두고 있기도 미안하니까, 밥 먹고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고 집 가. 다음에는 언제 올 계획?”
“내일부터 주말까진 집에 틀어박혀서 논문 쓸 거고, 다음 주에 시간 나면?”
“뭐, 좋아. 난 선배랑 달라서 방학 같은 게 없으니까…… 업무 끝내고 둘 다 시간 괜찮을 때 부를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심정웅에게 들러 인사하고 목조 건물을 나선 나는 주위 정경을 바라봤다. 조만간, 구체적으로는 이번 주 토요일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맞이한 7월 10일, 토요일 밤. 서울에서 드물게 인적을 찾을 수 없는 공터에 네 사람이 모였다.
“지금 몇 시지?”
“이제 딱 아홉 시요.”
챙이 넓어 얼굴까지 가릴 수 있는 검은색 모자를 쓴 서연희의 질문에 용 가면을 쓴 유해빈이 답했다.
여름이라 일몰이 무척 늦긴 하나 그것도 이만큼 시간이 늦어지면 밝은 햇빛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더군다나 또 한 가지.
“근데…… 오늘 진짜 어둡네요. 달도 안 뜨고 안개까지 있어서 그런가?”
유해빈이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달이 뜨지 않고 온통 깜깜한 하늘. 희미하게 전해져왔을 별빛조차도 자욱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연희를 바라보니 그녀가 생긋이 웃으며 일렀다.
“마침 잘됐네. 어두울수록 안 들킬 거잖아? 빨리 끝내고, 시간이 좀 늦었지만 다 같이 밥 먹으러 가. 준비는 해뒀으니까.”
“……가면 쓰고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아.”
유해빈이 의아해하며 던진 질문에 내가 답했고,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여우 가면이 경고하듯 말한다.
“다들 여유롭나 보네요. 그건 좋지만…… 그러다 긴장이 풀리지 않도록 해요. 실수하면 당신들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니까.”
“교ㅅ- 아니, 선배님…… 저 솔직히 여우 저 사람 살짝 마음에 안 드는데요. 뭔가 자기 혼자 잘났다는 느낌이잖아요.”
“실제로도 일은 잘하니까 참아주라.”
게다가 여우 가면 입장에선 우리가 좀 많이 풀어져 있는 거로 보이기도 했을 테니까.
평소엔 굳이 저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제의 두 번째 작전 회의 때도 그랬고, 오늘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저기압인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일이 위험하다는 방증이기도 할 테고.
유해빈과 내가 속닥거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우 가면이 그 이상 참견하지는 않았고, 나와 담배를 한 대씩 피운 서연희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슈우우우-
그녀가 펼쳐낸 공간 마법이 우리를 먼 곳으로 이끌어간다. 다음 순간 눈에 비친 광경은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의 담벼락. 그와 동시에 나는 마력을 끌어냈다.
+
-스킬 ‘인식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A+)
-스킬 ‘형상화’를 발동합니다. (랭크 A)
-스킬 ‘기척감지’를 발동합니다. (랭크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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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희가 걸어준 변장에 더해 우리 모두에게 형상화 스킬을 발동했다.
말하자면 이중 변장.
서연희도, 유해빈도, 여우 가면도, 그리고 나도, 심가의 평범한 각성자처럼 모습을 바꾸었다. 인식지배 스킬이 그 효과를 더욱 극대화할 거고, 기척감지로 예기치 못한 접근을 방지했다.
거기까지 첫 번째 준비를 마친 나는 재차 마력을 운용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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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상태추적’을 발동합니다. (랭크 B)
1) 대상자: 심정웅
2) 조건: 마법 발현
3) 재발동 대기시간: 23시간 59분 59초
4) 현재 상황: 조건 미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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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을 최대한 넓게 잡았는데도 재발동 대기시간이 하루. 그동안은 세아를 상태추적 스킬 대상자로 지정할 수 없다. 나로선 어마어마하게 큰 리스크를 감수한 행동이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부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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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진행 중입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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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진행률에 변화가 없다. 한 시간 전 세아와 통화하면서 들은 바로 오늘은 훈련만 열심히 할 계획이라고.
빨리 끝내고, 내일 밤까지 연락 자주 하면서 신경 쓰면 돼.
불안감을 힘겹게 달랜 나는 이제 마지막 작업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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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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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감각을 집중하며 나는 높다랗게 세워진 담벼락에 손을 댔다.
파지직-
침입자를 감지하는 보랏빛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저항했고, 저택 외곽으로 둘러쳐진 1단계 결계가 발동하기 직전에-
“으음…….”
유해빈이 나서며 자기 마력을 퍼뜨린다. 순도 면에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극히 순수한 마력이 일순간이나마 보랏빛 마력의 운동을 중화시켰다.
막아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고작해야 0.1초 미만. 하지만 내겐 충분하고도 넘치는 여유였고, 나는 담벼락과 맞닿은 손으로 간섭 마법을 흘려보냈다.
위유우웅-
담벼락 위편, 아무것도 없이 바깥과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침입자를 막아서는 방어벽이 자리한 허공에 원형의 공간이 열렸다. 사람 한 명이 통과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좁은 통로. 나는 그곳을 올려다보며 일렀다.
“내가 먼저 간다. 보스, CCTV 안 걸리게 부탁드립니다.”
“응. 놀기만 하는 것도 미안하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서연희가 답한 말을 듣고 나는 땅을 박차며 열린 공간으로 뛰쳐 올랐다.
타악.
발에 닿는 잔디의 감촉. 그 외엔 감지되는 게 없다. 우선 첫 번째 침입만큼은 무사히 해낸 것이다.
“집 진짜 넓네요…….”
“어디로 가죠?”
유해빈의 감탄을 자르듯 여우 가면이 던진 질문.
나는 단출하게 답했다.
“일단 중심부로 갈 거다. 그러다가 발각되면…… 그다음부터는 둘씩 나눠야 해.”
나와 여우 가면.
서연희와 유해빈.
둘로 나누어지게 되더라도 우리가 노리는 목표는 하나다.
커다란 한옥들에 가려진, 저기 먼 곳에 있을 심정웅의 거처. 그곳에 펼쳐져 있는 초고도의 은닉 마법. 심가의 비고는 분명 그 근처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밤은 여전히 새까맣다. 안개가 하늘을 흐릿하게 가렸고, 달빛은 그런 게 있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둡고 고요한 적막. 신중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한 걸음 앞장서며 멤버들에게 일렀다.
“가자.”
세 번이나 초청을 받았고, 언제든 원할 때 방문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저택. 그곳에 기어이 몰래 침입한 불청객이 된 나는 빠른 걸음으로 땅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