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Chapter 29. 불청객 (3)
***
7월 10일 금요일,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긴 시각.
심이수는 고요하고도 무더운 여름밤 공기 속에서 홀로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예쁘네…….”
피어난 꽃잎을 매만지던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곳에 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쩌면 살아있으면서 유일하게 홀가분한 자유를 느끼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기특하고 고마운 곳이다.
근래 워낙 바빠져 자주 가꿔주지 못했는데도, 그런데도 나무와 꽃은 각자 제 나름대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간다.
“미안해.”
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
이 꽃과 나무들은 부모가 없다. 그들을 돌봐주는 건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잘 해내야 할 텐데. 있는 힘껏 키워내야 할 텐데.
심이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전혀 그렇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데려다 놓고선, 기껏해야 좋은 흙과 거름을 주고, 이따금 마력을 흘려주고, 이렇게 늦은 밤에야 와서 가끔 어루만져주고.
고작해야 그런 정도의 보살핌밖에 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건 부모가 아니야.’
부모는커녕 보호자라고 자처할 수도 없겠지. 그녀는 정원의 꽃과 나무들에 이어 내심 한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지금은 사망한 어머니.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정원을 더욱 잘 가꾸려 했는데.
인제 와서 보면 그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엄마처럼은 못 하고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꽃과 나무들에 그러했던 것처럼 애정을 담아서 보살피지 못하고 있다.
단지 마음의 부담을, 어두운 감정을 덜어내는 쓰레기통처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좋은 흙과 양분만을 주면서.
키우는 게 아니라 필요하기에 사육하듯이.
‘류 씨가 아니라 심 씨처럼.’
그녀의 어머니가 사랑을 준 방식이 아니라, 이곳 심가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처럼.
어느새 심이수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창백한 낯빛에 아련한 자기 혐오가 깃든 채로 그녀는 정원에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가닿은 곳은 한복판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 벚꽃잎을 닮은, 여러 색의 수국이 피어 있다.
그중 하나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심이수는 그 꽃말을 생각했다.
인내심이 강한 사랑.
자신이 그리 해왔기를, 앞으로도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바로 그때.
쿠아아아아아아앙-!
정말 느닷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늘에서 푸른색의 마력이 폭발했다. 천둥 같은 소음을 동반한 압도적인 힘의 격류가 허공을 불사르며 어두운 밤을 밝힌다.
“……!”
고개를 치켜든 심이수는 날카로운 눈길로 그 현상을 바라봤다. 폭발의 여파로 감지한 위력은 능히 S급 이상. 일반적인 헌터가 낼 수 없는 힘이다.
‘균열?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균열 현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근거도 보이지 않는다. 저건 분명 인간이 쏘아낸 마력이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은 심가인데.
누구일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경계하던 자들을 죽이고 행한 짓일까.
목적이 뭐지? 무엇을 위해 저렇게 대놓고 이목을 끄는 걸까.
‘왜 저런 식으로 낭비한 거지?’
심가를 공격하려는 거였다면 지상으로 쏘아내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대체 무슨 의도로…….
그즈음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이들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아가씨-!”
심가 내에서도 정예라 할 수 있는 A급 각성자들.
그녀는 단출하게 명령했다.
“발사 지점이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요. 결계는 작동하지 않았나요?”
“그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감지된 건 전혀 없고, 몇 명이 제압당해 쓰러져 있는 것만 발견했습니다.”
“할아버지는요?”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렸습니다. 곧 이쪽으로 오신다고-”
가신 하나가 다급히 보고하던 와중에 근처의 허공으로 자그마한 틈이 생겨났다.
위유우웅-
이내 찢어진 공간을 넘어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간소한 차림새에 지팡이를 든 노인. 심정웅이 손녀를 향해 물었다.
“어찌 된 일이더냐.”
“글쎄요? 저도 잘 몰라요.”
심이수는 차갑게 답했다.
부리나케 달려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탐욕스러운 노인. 그 눈빛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노망 난 늙은이가…….’
심정웅은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해서 혹여 변수가 생길 걸 우려해 급히 온 거겠지. 그녀를 감시하고자.
심이수는 다시금 싸늘한 어조로 되받아치듯 말했다.
“제가 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무슨 사고가 생긴 건지, 아니면 침입자가 들어온 건지 알아보고 해결까지 말끔하게 해서 돌아올게요. 그러면 안심하시겠죠?”
“네 뜻대로 하려무나.”
심정웅은 담담히 답했다.
방금 살펴본 바론 심이수가 한 짓이 아닌 듯하고, 그렇다면 딱히 문제라 할 것도 없다.
‘하기야 염려가 과했지.’
어차피 심이수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심정웅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어떠한 행위도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원인을 파악하고, 그걸 제거하면 이 잠깐의 소요도 마무리되겠지. 손녀는 충분히 그리 하겠노라 확언할 만한 능력을 갖춘 존재다. 아주 기특한 꼭두각시.
심정웅은 마지막으로 경고의 뜻을 담아 그녀에게 일렀다.
“조심하거라.”
손녀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서.
심이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할아버지, 눈이 달려 있으면 하늘을 좀 보세요.”
심정웅은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깜깜한 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곳엔 단 한 점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다.
그는 짤막하게 답했다.
“그렇구나.”
오늘은 음력 초하룻날, 달이 뜨지 않는 삭월이다.
‘무신’ 한태강.
‘소드 퀸’ 샬럿 테이트.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
단 세 명의 괴물만 제외한다면 이 별에 심이수를 막을 자는 없다.
***
+
-스킬 ‘상태추적’을 발동합니다. (랭크 B)
1) 대상자: 심정웅
2) 조건: 마법 발현
3) 현재 상황: 조건 충족
+
제어폭발 스킬을 멀리 허공으로 쏘아내고 기다린 십여 초. 계획은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끼익-
목조 건물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앙상한 체구의 노인이 걸어 나온다.
‘천리안’ 심정웅.
그가 통신 마법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슈우우우-
곧이어 공간을 타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역시 선배님……. 이런 머리는 진짜 잘 돌아가시네요.”
유해빈이 순수한 감탄으로는 들리지 않는, 뭔가 다른 의도도 담겨 있는 듯 모호한 말을 중얼거린다.
평소였다면 그거 무슨 뜻이냐고 추궁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 나는 가만히 시야에 비치는 광경만 주시했다.
방금 발동한 제어폭발.
나는 그걸 특정한 목표를 노리고 쏘아내지 않았다. 심정웅의 거처도 아니고, 다른 건물이나 각성자들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심가의 초입 근처 허공이 착탄 지점. 그들의 전력을 약화하는 데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고, 되려 반대라고 해야겠지. 그게 내 의도이기도 했다.
놈들의 전력을 이 근처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 가능하다면 심정웅까지도.
일이 잘 풀린다면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최선.
하지만 이대로 머무른다고 해도 제어폭발의 발동 없이 무턱대고 덤비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심가의 각성자들이 폭발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심정웅을 제압하면 되니까.
그리고 상황은 내가 상정한 것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뭐야!?”
“다섯 명씩 셋으로 나뉜다. 샅샅이 수색해!”
소란을 감지하고 뛰쳐나온 심가의 각성자들이 떠들썩하게 이곳저곳을 누빈다. 하지만 이곳까지 당도하는 데는…… 그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지.
심정웅의 거처는 심가 내에서도 특히나 엄중하고 삼엄한 금지. 내가 알기로 이 근처에는 순찰 인원도 없다시피 하고, 심이수 정도의 최측근이 아니면 결계를 지나서 오는 것도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내게 주어진 여유는 고작 1분, 혹은 그 이하. 그 안에 저 목조 건물 주위를 면밀히 분석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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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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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힘껏 특성을 발동하고 감각을 끌어 올려 살펴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저곳에 뭐가 숨겨져 있는 걸까.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요새로서 갖춘 기능은 중요한 게 아니다. 초고도의 은닉 마법. 그걸로 뭘 감추고 있는지, 심가의 비고로 통하는 길이 어디인지. 그걸 알아내야 했다.
“슬슬 이쪽으로 올 거예요. 네 번째까지 지났고, 다섯 번째밖에 안 남았어요. 삼십 초 안에 돌파해야 해요.”
여우 가면이 침착한 어조로, 그러나 재촉하듯 알린 말. 더는 패를 아껴둘 때가 아니고, 내키지 않는 가운데서도 나는 마력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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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존재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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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
심장이 뛰는 감각과 함께 왼쪽 가슴 근처가 불에 댄 듯이 달아오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연희가 새겨준 달 문양, 검은 심장을 봉인하는 술식이 조금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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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소량 회복됩니다. (랭크 F -> 랭크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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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초 남았어요. 19, 18…….”
“……그렇게 안 세어도 다들 아는데.”
여우 가면의 통보와 유해빈의 투덜거림. 내 옆으로 다가온 서연희가 묻는다.
“괜찮아?”
“네, 거의 다 됐어요.”
존재흡수와 엿보는 눈.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마법적인 결계를 파악하는 면에서는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들.
그걸로 실마리가 잡혀간다.
“아…….”
나도 모르게 흘려낸, 경탄에 가까운 음성. 저 초라한 목조 건물 주위로 얼마나 아득한 마학이 집적해 있는지 이제야 명확히 깨달았다.
이곳까지 오며 돌파한 다섯 개의 결계. 그건 사실 이 목조 건물 자체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저택 외곽에서부터 돌파한 모든 결계와 함정. 그것들이 진정으로 감추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알겠다.
나는 확신했다.
심가의 비고는, 심정웅이 가장 아끼는 보물은 틀림없이 여기에 있다고.
그리고 파악했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때 여우 가면이 알렸다.
“십 초 남았어요.”
“됐어.”
나는 재빨리 목조 건물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그러면서 쫓아오는 세 사람에게 일렀다.
“작전 변경. 나 혼자 갑니다. 눈치 못 채게 시간 끌어주세요.”
여우 가면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다. 나 혼자 들어가서 보물만 가지고 나오면 되고, 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적들이 우리를 넷이 아닌 셋으로 여기게 하는 것.
내가 심가의 비고에 침입한 걸 알지 못하게, 우리가 다섯 번째 결계를 돌파해 심정웅의 거처 근처에 당도한 것조차 알지 못하게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일 것.
그러는 동안 나는 보물을 탈취하고, 네 사람 모두 심가를 탈출하면 된다.
“조심해.”
“조심하세요, 화이팅!”
서연희와 유해빈은 결단이 빨랐다. 자신들이 본래 맡은 역할, 시간을 버는 일에 집중하려 하는 거다. 그러나 의외로 여우 가면이 즉각 수긍하지 않았다.
“둘씩 나눠서 행동하기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명령이다. 보스를 지켜.”
“…….”
내가 강경한 어조로 지시하자 그녀도 결국 서연희와 유해빈을 따라서 이 근방을 벗어난다. 그리고 홀로 목조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무척 세심한 방식으로 마력을 운용했다.
은닉 마법이 감추고 있는 장소. 그 흐름을 파악해 시작 지점까지 타고 올라간다.
위유우우…….
허공에 빛무리가 어린다. 복잡하고 정교한 마력 구성체. 그걸 손바닥으로 거두며 부드럽게 휘둘렀다.
슈아아아악-!
빨려 들어가는 감각. 다음 순간엔 지하실 특유의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쿠웅.
발에 닿는 단단한 감촉. 내 눈앞엔 거대한 석벽이 서 있다.
***
“당신들…… 정체가 뭐야?”
천천히 걸어오던 여성이 궁금해하듯 묻는다. 서연희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그녀를 비롯한 팬텀 멤버들은 현재 이도진의 능력을 통해 변장하고 있었다. 복장도 생김새도 흔히 볼 수 있는 심가의 구성원처럼.
그러자 여성이 황당하다는 듯이 답한다.
“이 집 사람들은 내가 잘 아는데…… 다들 기운이 축 처지긴 했어도 당신들처럼 위험한 분위기 티 내고 다니진 않거든. 다시 물을게. 거기 불청객들, 여기는 왜 찾아왔고, 정체가 뭐야?”
“직접 알아보는 게 어때?”
도발하듯 서연희가 이른 말. 한데 여성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럴까?”
타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움직임에 따라 주변 모든 곳에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왔고, 서연희와 단원들에게 다가간다.
피하기 쉽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서연희는 침착하게 지시했다.
“그냥 있어도 돼. 신경 쓸 거 없어.”
“자신 있나 보네?”
여성이 재차 말하며 시선을 집중한다. 그녀가 움직인 마력의 효과는 디스펠. 그것에 닿은 침입자들의 외견이 바뀌어 간다.
이젠 심가의 각성자라고 볼 수 없는 모습. 세 명 모두 가면을 쓰거나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여성이 놀란 투로 중얼거렸다.
“당신들…….”
“우리가 누군지 아니?”
“알지…… 당연히 알지.”
낮게 이른 답에 서연희는 일순간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의 목소리. 경쾌하게 재잘거리는 듯했던 말투에, 흡사 광기에 닮은 기쁨이 서려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확인하듯 묻는다.
“테러조직 팬텀, 맞지? 당신이 보스고.”
“그래, 맞아. 나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잘 아나 보네?”
여성이 답하지 않는다.
그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서연희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들었다.
“……마워.”
“응?”
시선을 내리깔고 어떤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던 여성이 서연희를 똑바로 본다. 이어서 강한 열망을 담아 일렀다.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어째서?”
서연희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여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스아아아아…….
짙은 안개가 일어나며 하나로 뭉쳐간다. 그것이 점차 붉게 물들어가더니…… 마치 거대한 눈동자와 같은 형상을 이뤘다.
창백한 낯빛에 희열이 가득한 여성이, 심이수가 선언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오늘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온 이상, 당신은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해.”
콰아아아-!
붉은 눈동자가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