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Chapter 30. 선택 (1)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미터의 거리를 가로지른 심이수가 손을 휘두른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태도로 그 공격에 대응한 서연희는, 그러나 내심으로는 조금 놀라며 판단했다.
‘얘 제법 강한데?’
그녀에게 그런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랭크로 나눌 수 있는 각성자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힘도, 속도도, 그것들을 펼쳐내는 기술도, S급의 헌터조차 능가할 정도.
콰아앙!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뻗어낸 손이 맞부딪쳤다.
어렵지 않게 충격을 해소한 서연희는 몇 걸음 물러나며 발을 굴렀다. 그리곤 허공에 뜬 채로 전황을 파악했다.
‘……괜찮으려나?’
그녀 자신은 딱히 위험할 게 없다. 방금 공격해온 여성. 의외로 강하다곤 하나 그 이상 고평가할 필요는 없고, 정면으로 맞부딪쳐도 밀리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까…… 단순히 일대일로 벌이는 싸움이었다면.
‘저 애들도 신경을 써줘야 하는데.’
유해빈과 여우 가면. 점차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심가의 각성자들을 감당해야 하는 두 사람이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한 가지 변수가 더 있었고.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맞서고 있는 심가의 여성은 아무래도 통상적인 의미의 각성자라 보기엔 무리가 있을 듯했다.
서연희는 여성이 안개처럼 두르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닮은 마력을 눈여겨봤다.
‘저런 게 있었던가?’
그녀가 알기로 심가가 장기로 다루는 마법 중 저것과 유사한 기술은 없다. 그 연원을 쉬이 파악하기 힘든, 불길한 광채를 뿜어내는 붉은빛의 마력. 흡수 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은 알겠으나 천 년을 넘게 산 서연희로서도 처음 보는 마법이다.
‘쟤 이름이 심이수라고 했지?’
몇 년 전부터 그 존재는 알아왔다. 과거 이도진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 가끔 휴대전화를 보며 한숨을 쉬는 일이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조별과제를 하면서 유달리 비협조적인 조원이 한 명 있어 골치가 아프다고.
그때야 류이수라는 이름밖에 몰랐으나 최근 그의 부탁으로 조사하며 신상명세를 자세히 알게 됐다.
이젠 류이수가 아니라 심이수. ‘천리안’ 심정웅의 손녀이며 유성 길드에 입사해 실질적인 요직을 맡은 여성.
외견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길래 무슨 비밀이라도 숨어 있으려나 싶었는데…… 설마하니 이런 무력을 지녔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포위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둘이라고 방심하면 안 된다!”
유해빈과 여우 가면을 둘러싼 심가의 각성자들이 경계하며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다. A급 이상의 실력자가 스무 명 이상. 게다가 여러 길드에서 차출해 제대로 협력이 되지 않는 오합지졸들이 아니라 오래도록 한솥밥을 먹으며 훈련해온, 협공에 능한 전력이다.
그즈음 심이수도 서연희를 따라 하늘로 치솟으며 차가운 어투로 일렀다.
“뭔가 수작을 벌일 거라면 어림도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 아까 말했지? 당신은 결코 여길 탈출하지 못한다고. 적당히 봐줄 생각도 아닐 거고, 제대로 싸우는 게 어때? 그게 전력은 아닐 거잖아?”
도발하는 말. 서연희는 조금 곤란해하며 있는 그대로 답했다.
“음…… 그러면 네가 죽는데?”
“어디 해봐.”
콰아앙!
허공을 박찬 심이수가 돌진했다. 더욱 팽창한 붉은빛 눈동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서연희까지도 가두려 한다.
스아아아…….
가뿐한 손길로 마력을 흩어낸 서연희는 기시감처럼 스치는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비슷한가?’
심이수가 두른 저 정체불명의 마력이 어쩐지 눈에 익은 느낌이다. 정확히 대상을 지칭한다면…… 그것과 외양이 닮았다.
서연희 자신의 힘.
장생종으로서의 본령을 개방했을 때 떠오르는 형상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니까 쟤가 나에 대해 아는 게 있었지?’
처음 대면했을 때 심이수가 말했다. 왜 하필 오늘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고. 그건 테러조직 팬텀의 보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전설 속의 흡혈귀가 실재했다는 걸, 그 두 가지 사실을 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장생종임을 알고, 달이 뜨지 않는 삭월엔 장생종이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다는 걸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이니까.
그런 정보를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해야겠지만…….
‘심정웅이 말해준 거면 크게 이상할 건 없고, 그러면 비슷하게 흉내를 낸 건가? 그건 좀 대단하네.’
서연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심가에서 장생종의 흔적을 연구해 성과가 있었던 듯하다고. 그걸 기반으로 장생종의 힘과 유사한 마법을 창안했고, 심이수는 지금 그걸 발현하고 있는 거라고.
거기까지 알면 충분했다. 한결 마음이 놓인 서연희는 여유롭게 심이수를 상대해나가며 한편으론 두 가지 일을 더 수행했다.
피유웅! 콰아앙!
하나는 심가의 각성자들과 싸우고 있는 단원들을 엄호해주는 일.
다른 하나는…….
‘도진이는 잘 하고 있으려나?’
심가의 비고에 침입한 이도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그곳의 정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통신을 연결했다간 발각될지도 몰라 먼저 묻진 않았으나 그가 연락할 수 있도록 마력 구성체를 활성화해뒀다.
그리고 십여 초쯤 지났을까.
<보스, 별일 없어요?>
이도진의 목소리였다. 심이수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서연희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응, 괜찮아. 끝났어?>
<아니요, 실마리는 찾았는데…… 들어가진 못했어요.>
<필요한 게 뭔데?>
서연희는 설명을 듣지도 않고 물었다. 비고에 들어가려면 뭔가 필요한 거겠지. 분명 자신이 구해다 줄 수 있는 것일 테고.
이내 이도진이 답했다.
<심가 각성자의 피가 필요해요. 가능하면 직계에 가까울수록 좋아요.>
<응, 삼십 초만 기다려줘.>
선선히 답한 서연희는 일단 통신을 마쳤다. 그리곤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멀리 어두운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뜨지 않은 깜깜한 밤. 상당히 부담이 있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때는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
슈우우우우…….
그녀의 주위로 붉은 안개가 스며간다. 희미한 별빛만 제외하면 온통 어둡기만 하던 하늘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달빛을 대신했다.
장생종의 차대 여왕. 그러한 존재로서 지닌 힘을 꺼낸 서연희는 벌써 몸에 열이 오르고 판단력과 자제력이 점차 흐려져 가는 걸 느끼며 심이수에게 일렀다.
“조심해.”
차가운 경고. 이어서 서연희는 손을 뻗었다. 압도적인 힘의 흐름이 심이수가 구현한 모든 공격과 방어를 무산시킨다.
심이수가 두르고 있던 마력이 자취를 감췄고, 서연희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다.
파아아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심이수의 어깨를 가볍게 갈라낸 서연희는 솟구치는 핏줄기를 붉게 물든 시야로 담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목이 마르고 몸이 뜨겁다.
저 피를 마시면…… 조금은 괜찮아질지도 모르는데.
격이 없고 비천한 자들이 갈망했던, 버러지 같은 생각.
서연희는 코웃음을 치며 공간 마법의 마력 구성체를 발현했다.
‘난 그런 걸 원하지 않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죽지 못해서 살았다.
원하는 게 없이 살았고, 인간의 피를 마셔서 힘을 충당하고 싶다는 생각도 결코 한 적이 없다.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지금은 그것과 별개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고.
‘도진이가 속상해할 거니까.’
그 이유 하나면 족했다.
위유우웅-
공간 마법이 심이수의 핏줄기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이도진이 있는 장소. 그곳으로 피를 보내고, 그가 할 일을 마치고 나오는 즉시 심가를 빠져나가면 된다.
그리고.
공간 마법이 해제된 직후.
서걱-!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붉디붉은 핏줄기가 넘실거린다. 심이수의 혈액은 이미 공간을 타고 사라졌는데.
타앙!
뒤편으로 물러선 서연희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어깨, 갈라진 옷의 틈새로 붉은색이 비친다.
장생종의 차대 여왕이자 테러조직 팬텀의 보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서연희 자신이 흘린 피였다.
“좋은데?”
나직이 발해진 말. 텅 빈 하늘을 천천히 걸으며 심이수가 기껍게 웃는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서연희의 피가 그녀의 얼굴을 적신다.
혀로 입술을 핥아 입가의 피를 지워낸 심이수가 주먹을 꾹 쥐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이제껏 그녀가 두르고 있던, 그러나 서연희의 힘에 압도당해 모습을 감췄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나타나 끝없이 크기를 키워간다.
만월의 장생종이 그러하듯이.
달이 전혀 뜨지 않은 삭월에.
장생종에게 막대한 힘을 전해주는 달이 자신에겐 오히려 방해라는 것처럼.
“좀 더 있으면 더 좋겠는데…… 협조해줄 거지?”
비릿하게 웃은 심이수가 서연희를 향해 달렸다.
***
위유우웅-
공간 마법의 빛무리가 나타났다. 내 눈앞에 보인 건 적지 않은 양의 혈액. 나는 주저 없이 손을 휘둘렀다.
스으으으…….
내 손길에 따라 허공에 일렁이던 핏줄기가 둥근 모양을 이룬다. 오른손으로 그걸 잡아챈 나는 손을 정면의 석벽으로 가져갔다.
쿠우웅, 드르륵-
여태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석벽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린다.
오로지 심가의 피를 지닌 자에게만 입장을 허락하는 장소. 아주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극히 미세한 마력조차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그곳에 발을 들였다.
“…….”
석벽을 지나 다다른 내부는 족히 수백 평을 넘어서는 넓은 지하실이었다.
낡은 책장에는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다. 하나하나가 죄다 값어치를 매기기 어려운 보물.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도의 마법 실험에 무척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재료들이 지하실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엔 눈길을 주지 않으며 나는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저런 게 심정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보물일 리는 없겠지. 다른 것들이 있을 거고,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샅샅이 탐색해 그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스윽.
나는 품에서 자그마한 천 주머니를 꺼냈다. 일견 평범한 주머니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연희가 건네준 물건, 아공간과 연결된 마법 물품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을 모두 담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넉넉한 용량이고, 왼손에 주머니를 꼭 쥔 채로 나는 다시금 걸었다.
그리고 맞이한 장소.
“…….”
지하실 가장 안쪽의, 환한 빛을 뿜어내는 벽면.
그곳에 무언가 걸려 있다.
인간을 닮은 오래된 시체 한 구. 하지만 썩지 않고 형체를 유지하고 있으며 마력적인 흔적이 느껴진다.
각성자의 시체는 아닌 듯한데. 악마나 몬스터의 시체는 당연히 아닐 테고.
확실하진 않지만…… 우선 이것부터 담아둬야 하려나.
벽면에 걸린 시체만이 아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뼈와 살가죽과 혈액과 장기도 옆에 놓여 있다.
다 합치면 두어 구쯤 될 듯한데…… 가져가는 김에 이것들도 가져가야겠지.
바로 그때.
끼이익-
내가 지나쳐 온 곳.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석문이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