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Chapter 30. 선택 (3)
평범한 각성자의 것이 아니다.
악마나 몬스터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의 시체지?
인간과 닮았고,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 그리고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짐작이 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킬 더 이블> 3권의 고유 퀘스트,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를 일 개체 이상 제거하라는 임무에서 ‘서울 내의 인외 지성체’는…….
심가 내부의 인물이거나, 혹은 그들이 조종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내 짐작이 옳다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시신과 신체 조직들이 멸망한 장생종의 것이라면.
거기까지는 사고의 방향이 명확해졌으나 당장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크게 노한 심정웅이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오고 있다.
“어디에 숨겼느냐-!”
나를 노려보며 떨쳐낸 일갈. 이어서 노인이 지팡이를 두어 번 휘둘렀다.
슈아아아아아-!
불길한 빛을 뿜어내는 마탄이 급속도로 우리에게 접근해왔고, 그 뒤론 흡사 그물망 같은 형태를 이룬 마력의 감옥이 우리를 가두고자 세차게 날아든다.
판단을 내릴 여유는 지극히 짧았다. 내가 선택한 대처는 방어가 아닌 회피.
굳이 심정웅을, 그것도 놈이 훨씬 유리한 이 비고에서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까. 공간이동 마법을 발현해 지상으로 올라가면 그뿐이다. 하지만…….
피슈우우-
내가 구현한 마력 구성체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든다. 지하실 전역에 펼쳐진 디스펠이 마법적인 원거리 이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탈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걸 깨닫자마자 나는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모았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저 마탄. 튕겨 내도 다시 추격해오는 유도 계통의 마법이다.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은 없었고, 속에서 울컥 핏덩이가 솟구치는 게 느껴진다.
터어엉!
마탄이 폭발하며 일어난 충격. 십여 미터나 뒤로 밀려난 나를 대신해 유해빈과 여우 가면이 나섰다.
“하아아아!”
유해빈이 양손으로 뻗어낸 마력이 심정웅의 속박 마법을 일순간 정지시켰다. 여우 가면이 푸르게 빛나는 손을 내리친다.
파아아아-!
실이 끊어지듯 마법이 해체됐고, 흩어지려 하던 마력이 심정웅에게 되돌아갔다. 다시 원위치로 복귀한 나는 다른 두 사람과 대형을 갖추며 지시했다.
“70% 이상은 내가 막아줄 수 있다. 뭘 해야 할지 알겠지?”
“이해했어요.”
“후우…… 해볼게요.”
여우 가면의 짧은 대답과 한숨이 곁들여진 유해빈의 각오.
타아앙!
나는 심정웅을 향해 달렸다. 나와 유해빈과 여우 가면. 세 사람이 각자 맡은 일은 단순한 작업이고, 그러나 셋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오늘 작전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나와 대적하려 하는가-!”
진노한 심정웅이 지팡이를 바닥으로 세게 내리찧는다.
쿠아아아아아!
희미한 조명만 있을 뿐 어둑하던 비고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물, 불, 흙, 바람, 전격 등 다채로운 속성 마법이 사방에서 생성됐다.
계통 또한 다양하다. 적을 속박하고, 기운을 빼앗아가고, 판단력을 흩뜨리고, 한순간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마법들이 우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
마력흡수는 쓰지 않는다. 지금은 별반 효과가 없을 테니까.
그 스킬로 한 번에 흡수할 수 있는 총량보다 이곳의 마력이 훨씬 거대하다. 공간이동을 막는 디스펠을 무력화할 수는 없고, 당장 발동하는 건 낭비에 가깝다.
터엉! 콰아앙!
가용할 수 있는 특성과 스킬, 내가 가진 전투능력을 모조리 사용해 비고의 마법을 다루는 심정웅과 맞섰으나 대등한 싸움이라 하긴 어려웠다. 이곳에선 저자가 나보다 강하고, 내가 막아내지 못한 잔여 마법은 여우 가면이 처리했다.
둘이 힘을 합쳐 간신히 버티는 수준. 시간이 초조하게 흐른다. 십 초, 이십 초, 일 분, 삼 분. 싸움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심정웅을 살폈다.
“허억, 허어억…….”
저자는 지쳐있다. 이 비고의 마법이 얼마나 강력하든, 심정웅이 얼마나 고명한 마법사든,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그저 늙은 육신이 이만한 싸움을 오래 버텨내지 못하는 거다.
“…….”
장기전으로 끌고 갈수록 승산이 높겠지. 나는 선택해야 했다.
계속 전투 국면을 유지해 천천히 제압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아직 비장의 수단을 감추고 있을 놈을 상대로, 본래 계획대로 진행하는 게 옳을까.
결단은 빨랐다. 후자를 택한 나는 여우 가면에게 눈짓하며 일렀다.
“몰아붙여.”
타앙!
그녀가 적에게 접근해 유려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이어나간다. 근접전에 취약한 심정웅은 자신을 보호해줄 마법만 발현하면서도 신중하게 틈을 노리고 있다.
“커허억!”
여우 가면의 주먹이 심정웅의 복부를 강타했다. 노인이 빛살처럼 튕겨 나갔고, 여우 가면이 쫓는다.
바로 그때.
지친 눈을 번뜩이며 심정웅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놈들-!”
쿠오오오오오-!
늙고 앙상한 몸이 어마어마한 마력을 담아낸다.
이 비고에서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만들어낸 공격 마법.
정통으로 맞으면 진다. 보물을 되찾아야 하니 우리를 소멸시키려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정도의 위력과 효과는 지니고 있다.
물론 순순히 맞아줄 생각은 없고, 나는 유해빈에게 지시했다.
“쏴버려.”
“이야아아아아아-!”
유해빈이 새된 목소리로 외치며 양손을 천장으로 올렸다. 그 손엔 압도적인 순도와 위력을 지닌 마력이 일렁이고 있다.
저 애가 가진 가장 강력한 능력. 드래곤 브레스가 천장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앙-!
한 줄기 빛이 되어 뻗어간 브레스를 비고의 흡수 마법이 막아냈다. 하지만 온전히 다 막을 순 없다.
마력흡수가 공간이동 디스펠을 전부 해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용족의 공주가 몇 분이나 힘을 모아서 쏘아낸 브레스를 일개 마법이 완벽히 방어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그 결과로…… 공간이동을 철통처럼 무산시키던 디스펠에 자그마한 금이 갔다. 그걸 깨달은 나는 즉시 스킬을 발동했다.
+
-스킬 ‘마력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소량 회복됩니다. (랭크 E)
+
랭크는 E급에서 그대로지만 심장 근처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조금 더 강해졌다. 틀림없이, 검은 심장의 존재력이라 해야 할 것이 강해진 거다.
나로선 뼈아픈 대가. 하지만 그걸 통해 얻은 것도 컸다.
유해빈의 브레스에다 마력흡수 스킬까지.
디스펠이 상당히 약해졌고, 드디어 공간이동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
슈아아아아아-!
나는 재빨리 달려가 심정웅의 마법 앞에 있던 여우 가면을 끌어안았다. 공간이동의 영역권에 그녀까지 들어왔다.
퍼어어어엉!
내 등에 심정웅의 공격 마법이 와닿았다. 마력흡수로 방어했음에도 순간적으로 의식이 혼미해졌고, 극도의 고통과 무력감이 밀려온다.
“……!”
내 팔에 안겨 있던 여우 가면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마음속으로만 되뇐 말이 그녀에게 들리진 않았을 테고, 나는 어렵사리 정신을 부여잡으며 내가 맞은 마법의 반동을 이용해 유해빈 쪽으로 날았다. 왼팔로 여우 가면을 끌어안고, 오른팔로는 브레스의 여파로 기진맥진한 유해빈을 품에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위유우우우우-
공간이동 마법이 발동됐다.
“네 이놈드으으을-!!!”
심정웅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제 내 시야에 비치는 장소는 지상의 어두운 밤.
나는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걸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며 일찍 빠져나온 것이다. 홀로 적들과 맞서고 있을 서연희. 그녀가 너무도 걱정됐으니까.
그리고 목격할 수 있었다.
“……!”
허공에 위태롭게 멈춰 있는 서연희. 그녀를 향해 무수히 많은 마탄이 날아간다.
심가의 정예 각성자들이 전력을 다해 쏘아낸 공격. 선두에서 지휘하는 건 심이수였다. 서연희는 힘겹게 피하며 맞서고 있으나 확연히 열세.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말 거다.
“보스-!”
내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달려가려던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심정웅이었다. 비고를 빠져나와 공간이동으로 우리를 쫓아온 거다.
쿠오오오오오오-!
뒤편에서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마 심정웅이 쏘아내려 하는, 나를 노리고 발현한 마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일 따윈 하지 않고 양쪽 팔로 안고 있던 여우 가면과 유해빈을 멀찍이 내팽개쳤다.
어디 쏠 테면 쏴. 얼마든지 맞아줄게. 그걸로 죽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어.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다. 저 공격에 당해 죽어버리면…… 그러면 서연희를 지켜줄 수 없으니까.
이 작전을 계획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이번 일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삭월을 결행 날로 정한 것도, 작전을 수행해나가며 우리에게 닥칠 위험도, 그 모두를 책임지겠다고.
서연희가 내게 물었다. 자기를 지켜주겠다는 뜻이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다짐을 꼭 지켜야 하니까.
그런 말을 해놓고선 눈 뜨고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서연희가 다치는 일 따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날 공격해도 상관없어.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그녀를 지킬 거야.
하지만…….
곧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엿보는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심정웅이 발현한 저 마법의 주된 목적은 공격이 아니다. 저기에 맞으면 일순간은 아예 움직일 수 없다. 공격보다는 되려 속박을 위한 마법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브레스 발동으로 기운이 없는 유해빈은 대응할 수 없다. 그나마 멀쩡한 멤버는 여우 가면.
그녀에게 명령했다.
“보스에게 가!”
제발 부탁이니 서연희가 다치지 않게, 그녀를 엄호해달라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 이내 심정웅의 마법이 내게 다가온다.
콰아아앙!
“크윽!”
할 수 있는 모든 방어를 펼쳐냈음에도 타격이 작지 않았던 나는 멀리 튕겨 나갔고, 그러면서도 하늘로 시선을 고정했다.
여우 가면은 서연희에게 향했겠지. 둘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도 상세를 회복해 유해빈까지 넷이 힘을 합쳐 심가를 빠져나가면 된다.
그리고…… 내 눈앞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펼쳐졌다.
타앙!
여우 가면이 달리고 있다. 하늘로 향하는 게 아니다. 내가 튕겨온 곳, 심정웅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마법의 반동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심정웅이 여우 가면에게 제압당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면 서연희는?
쿠아아아아아아아-!
수백 개의 마탄이 쏘아져 간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서연희가, 어떠한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폭발에 휩싸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