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26화 (126/207)

#126화. Chapter 30. 선택 (4)

***

‘죽이진 못할 거야.’

하늘을 중심으로 지상까지 몰아치는 거대한 충격파를 시야에 담으며 심이수가 냉철하게 되뇌었다.

방금 심가의 각성자들이 쏘아낸 마탄. 어지간한 헌터나 몬스터라면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버릴 공격이지만 상대가 팬텀의 보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애초에 그녀가 이대로 죽으면 곤란해지는 건 심이수 자신이니 바라지도 않는 일이고.

‘접근해도 될 만큼, 그 정도만 힘을 줄여두면 돼.’

팬텀의 보스가 자신의 전력을 발휘하고부터 이제 십 분 남짓 지났을까. 그동안 심이수와 심가의 각성자들은 멀리 떨어져 원거리에서 상대하는 전법만을 고수해왔다. 사나운 맹수를 사방에서 둘러싸 천천히 힘을 빼놓듯이.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가 너무 강했고, 섣불리 접근했다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삭월 밤엔 그 어떤 영웅과 싸워도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하는 심이수라 해도.

테러조직 팬텀의 보스. 그녀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초고위의 악마조차 넘어선 미증유의 괴물이다. 수적으로 유리하다고 무턱대고 접근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고, 그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정확히 지금까지만.

쿠오오오오오오오-!

붉고 푸른 마탄이 팬텀의 보스를 가격하며 폭발했다. 그때 심이수는 이미 그녀에게 급속히 다가서고 있었고, 손에 마력을 끌어모으며 내심 환희했다.

‘됐어……!’

이젠 접근해서 싸울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타격을 준 게 확실하니까. 폭발이 아주 조금 걷히며 드러난 적의 모습. 여태 쓰고 있던 챙이 넓은 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본래 기품 있는 디자인이던 드레스는 곳곳이 찢겨 피 흘리는 살결을 내비치고 있다.

팬텀의 보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희미하다. 갈수록 흐려지는 이성을 더는 부여잡기도 힘든 걸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고 힘 자체도 많이 빠졌겠지.

심이수는 조소에 찬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테러리스트 주제에, 같잖게 비련의 여주인공인 척 흉내나 내고 있으니 그런 꼴을 당하는 거야.’

그녀가 생각하기에 팬텀의 보스가 이번 싸움에서 한 선택은 최악에 최악을 다시 겹친 실책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꺼내고 나서 곧바로 도주했다면, 그랬다면 쫓아가 위기로 몰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어려웠을 거다. 추격하는 것도,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상대하는 것도, 어느 쪽도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설령 도망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지금처럼 소극적이지 않았다면?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서 소극적이라는 건 우스운 표현일 테지만 심이수로선 그리 여길 수밖에 없다.

물론 팬텀의 보스는 전력을 끌어냈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싸웠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이성을 유지하려고, 우리를 죽이지 않는 선에서 제압하려고 안간힘을 썼지.’

앞뒤 가리지 않고 적들의 목숨을 끊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이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타격을 입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팬텀의 보스는 그러지 않았다. 살생을 자제하고자 애를 썼다. 마치 반드시 지켜야만 할 선이 있는 것처럼.

‘왜 그런 걸까.’

짧게 스치는 의문.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실소가 나올 만큼 우스웠지만 하나밖에 없었다.

‘저런 범죄자들도 꼴에 사랑 같은 걸 한다, 그런 건가?’

팬텀의 보스가 아주 소중히 여기는 듯한 자. 몰래 비고로 침입한 또 한 명의 팬텀 단원.

그자를 위해서 도주하지 않은 걸까.

그자를 위해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연결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인명을 살상하려 하지 않은 걸까.

눈물 나게 감동적인 마음이 너무도 가소로워 하품이 나온다.

‘주제를 알아야지.’

차갑게 되뇐 심이수는 허공을 한 번 더 세게 박찼다. 적과의 거리는 고작 일 미터.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다.

‘당신도, 저기 아래에 있는 쓰레기들도, 살아서는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해.’

콰악!

심이수의 왼손이 피 흘리는 여성의 멱살을 쥔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힘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팬텀의 보스가 흘려낸 피. 그것을 전신으로 흡수하며 심이수는 오른손을 뒤로 젖혔다. 손바닥을 쫙 펼쳐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드는 동작. 이어서 손에 붉은 마력을 실어냈고, 그대로 적의 가슴께에다 찔렀다.

파아아아-!

새빨간 피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심이수의 손은 적의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 심장 근처의 부드러운 살결을 헤집고 들어가 있다. 떠오르다가 다시 내려오는 핏줄기가 심이수의 얼굴을 적신다. 그것이 그녀의 힘이 되었고, 손끝으로 흡수해가는 피와 존재력을 실감하면서…… 심이수는 경악에 몸을 덜덜 떨었다.

‘이게…… 도대체…….’

너무 많다.

너무 강하다.

너무 깊고 넓다.

도저히…… 지금 당장은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

“으으…….”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린 심이수가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팬텀의 보스와 접촉한 상태에서 흡수한 힘. 그건 전투 중 조금씩 얻어낸 피 따위와는 총량과 순도,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쿠우웅.

온몸이 천 근 바위에 짓눌린 듯이 내려앉는 감각.

심이수는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달이 뜨지 않는 삭월에 압도적으로 강해지는 이점이 모래성처럼 흩어지고 있음을 선명히 감지했다.

‘이렇게 되면…….’

긴장감에 온몸이 급격히 더워지며 식은땀이 흐른다. 팬텀의 보스는 아직 의식이 있다. 탈진 상태에 가깝게 지쳐있으며 명료한 이성이라 할 만한 것이 남아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바로 그때.

슈아아아아아-!

푸른 빛무리가 심이수와 팬텀의 보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어진 폭발.

콰아아아아아아앙!

빛무리가 터져 나가며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팬텀의 보스 쪽으로는 전혀 여파가 미치지 않고 오로지 심이수 쪽으로만 향한 공격. 초일류의 마법사만이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기술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고난도인 마법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뒤이어서…….

콰앙!

소리의 도달보다 빠르게 날아온, 흰색 가면을 쓴 남자가 팬텀의 보스 곁에 멈춰 섰다. 그가 손을 휘두른다.

스아아아아-

남자의 양쪽 어깨 위로 펼쳐진 검은 날개 형상의 마력이 팬텀의 보스를 부드럽게 감싼다.

“아아…… 아…….”

흐느낌을 닮은 음성. 이지를 잃기 직전인 팬텀의 보스가 낸 소리였다.

흰 가면의 남자가 슬픈 어조로, 침착하게 이른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예요. 괜찮아요…….”

퍼억! 퍼어억!

팬텀의 보스를 감싼 검은 마력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춘 그녀가 저항하며 일으킨 충격인 듯했고, 마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뒤틀리는데도 남자는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심이수에게 경고했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오면…… 너는 반드시 죽어.”

“와…… 이 상황에서도 센 척하시네?”

여상스럽게 되받은 심이수였지만 내심으로는 계산이 복잡했다.

비고에 침입했던 팬텀 단원은 역시나 그자였다. 테러조직 팬텀의 두 번째 서열로 추정되는 남자.

직접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보스를 대신해 대부분의 작전에서 실무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다고 알려져 있고, 그가 어느 정도로 전면에 개입하느냐에 따라 팬텀의 전력이 족히 두 배 이상 상승한다는 평가까지 받는 자다. 지닌바 무력 또한 ‘철권’ 염의준을 일대일로 상대해 살해했을 정도니 최상.

‘그래도 싸워볼 만은 한데.’

엄밀히 따진다면 아군이 유리하다.

저쪽은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보스를 제외하면 고작 세 명. 반면에 이쪽의 전력은 여전히 건재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좋지 않은 변수가 있다면…… 다름 아닌 심이수 자신.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아.’

얻은 것이 아득히 컸다. 그래서 문제였다. 현재로선 원활하게 전투를 이어나가기 어려울 듯하니까.

적들은 당연히 그녀를 집중적으로 노릴 테고, 구태여 그런 리스크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충분한데.’

그리고, 심이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저쪽에서 적절한 판을 마련해줬다.

“그의 말에 따라.”

지상에서 발해진 차분한 말. 심이수를 비롯한 심가의 각성자들이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아…….”

“어르신-!”

여우 가면을 쓴 팬텀의 범죄자. 심정웅을 제압해 그녀가 흉험하게 빛나는 손을 노인의 주름진 목 앞으로 두고 있다.

말하자면 인질. 너희의 행동에 따라 심정웅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크으윽…….”

땅에 몸을 누인 노인이 침음한다. 공중에 떠 있는 흰 가면의 남자를 증오 어린 눈길로 노려보면서도 자신은 상관하지 말고 공격하라고 말하진 않는다.

‘늙은이가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되네.’

기껍게 되뇐 심이수는 공격 의사가 없다는 뜻을 보이려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흰 가면의 남자에게 일렀다.

“할아버지를 풀어줘. 그러면 쫓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

쿠웅! 퍼어억!

팬텀의 보스를 감싼 검은 마력에서 충격음이 울리는 가운데 흰 가면의 남자가 지상으로 내려갔다.

여우 가면을 쓴 단원, 용 가면을 쓴 단원과 합류한 그가 목소리도 내지 못하게 제압한 심정웅까지 끌고 멀리 저택 외곽으로 향했고, 심이수와 심가의 각성자들이 굴욕에 찬 표정으로 쫓았다.

다른 사람들은 진심.

심이수는 그저 연기력을 발휘한 태도.

이윽고 테러리스트들이 저택의 가장 외곽, 마력으로 방비하고 있는 담장까지 이르렀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가만히 서 있던 흰 가면의 남자가…… 돌연히 심정웅을 수직 방향으로 던져냈다.

이어진 푸른빛의 폭발.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정원에서 처음 봤던 빛무리와 같은 마력이 검은 하늘을 물들였고, 심이수가 심정웅을 안전하게 받아냈을 때 팬텀의 조직원들은 벌써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건넨 물음. 심정웅이 그제야 책망하듯 외쳤다.

“어째서 그냥 보냈느냐! 그놈들이 가져간 것이, 그걸 되찾아야 하거늘……. 어서 쫓아가라, 어서!”

“……이미 늦었어요.”

심이수는 낙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즐겁게 중얼거렸다.

‘뭘 가져갔든, 그딴 건 이제 나한테 필요 없고요.’

***

+

<킬 더 이블> 3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심가의 비고(祕庫)에 잠입해 ‘천리안’ 심정웅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탈취하고, 추적을 따돌려 완벽하게 도주할 것

-기한: 7월 10일 오후 8시~7월 10일 자정

-인원: 이도진, 서연희, 유해빈을 포함한 팬텀의 멤버 4인

-클리어 보상:

1) OX 질문 1회

2) 보상 수령 시점, ‘서울 내’ 인외 지성체의 숫자

+

이걸…… 과연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적이 없는 어둑한 공터에 멈춰 선 채로 조용히 고개를 올렸다. 홀로그램 너머로 어두운 하늘이 비친다.

“후우…….”

담배를 한 대 꺼내 겨우 네다섯 호흡만에 다 피운 나는 곁에 내려놓은 서연희를 바라봤다.

“…….”

의식 없이 혼절한 그녀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내고 있다. 이것도 잠깐의 유예겠지. 이러다 다시 깨어나면, 힘을 지나치게 많이 소모한 그녀는…….

그러기 전에 마쳐둬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여우 가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내 눈길을 깨닫고 그녀도 나를 마주 본다. 어쩔 수 없이 차갑게 들리는 추궁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째서 지시에 따르지 않았지?”

그러자 여우 가면도 싸늘하게 답한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요. 내 선택이 옳았어요.”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괜히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어떻게 봐도 당신의 실책이었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