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Chapter 30. 선택 (5)
“괜히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어떻게 봐도 당신의 실책이었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삭월을 결행 날로 정한 것에 대한 책망은 아니다. 그녀는 서연희가 장생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까.
고작 네 명으로 마도 명문 심가에 침입한다는 무모한 작전을 감행한 걸 비판하려는 뜻도 아니겠지.
자주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살가운 사이는 더더욱 아니지만, 그녀가 어떤 성품인지는 파악하고 있다.
하겠다고 나선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나중에 불평하는 사람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든 안 되든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본인도 참여하겠다고 동의했으니까.
여우 가면. 그녀는 무척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적인 사람이다. 타인을 판단할 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이런 뜻이 된다. 그녀가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어조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까의 내 행동은 그만큼이나 얼빠진 짓이었다고.
테러조직 팬텀의 실무 책임자로서, 이번 일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보스와 단원 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자로서, 나는 여우 가면에게 그따위 명령을 내리면 안 됐다.
서연희를 엄호하라고 지시한 건…… 기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다.
“만약 당신 명령에 따라 내가 보스를 구하러 갔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커요. 나와 보스는 포위당했을 거고, 당신은 움직일 수 없었고, 심정웅은 별다른 방해 없이 마법을 발동한 여파를 떨쳐냈겠죠. 새로 들어온 저분도 당장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니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길면 십 분 정도 버텼겠지.”
그녀의 말이 옳다. 심정웅을 인질로 잡아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무이한 활로였다.
설령 서연희가 많이 다치더라도, 우리 모두 붙잡히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보스가 초인적인 생명력을 지녔다는 건 나도 알아요.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으니까. 당신은 나보다도 더 잘 알겠죠. 그런데…… 그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지시를 내릴 수 있죠?”
여우 가면의 비판은 방향성 면에서 옳았으나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그녀의 책망보다, 나는 그보다도 더 멍청했다. 서연희는 단지 남들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게 아니니까.
초인, 인간을 뛰어넘었단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삶의 어느 순간엔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 그녀는 그것을 아예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생명체라는 범주로 온전히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죽지 않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이 세상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 개념적인 힘이 그녀의 죽음을 거부한다. 설혹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 할지라도.
서연희 본인보다도 내가 잘 아는 사실. 한데 그런 내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여우 가면조차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올바른 선택을 간취해내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해빈을 흘끗 바라봤다.
못마땅한 듯하면서도 한마디도 나서지 않고 나와 여우 가면의 대화를 지켜보는 모습. 하나의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심지어 유해빈까지도 여우 가면의 판단이 전략적으로 옳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고.
반론할 여지는 전혀 없고, 나는 담담히 수긍했다.
“미안하다. ……내 실수가 맞았어. 괜히 화풀이한 것에 불과해.”
“…….”
나직한 어조로 인정한 말에 여우 가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후우…… 하고 아주 희미한 한숨을 내쉬더니, 언쟁을 마무리하려는 듯 침착하게 일렀다.
“당신에게 보스가 정말 중요한 존재라는 건……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올바른 판단을 내렸어야 해요.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건 실수의 이유가 되지 못하니까. 되려 그 반대죠. 당신은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만큼이나…… 아니,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당신도 분명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서 이 일을 하는 걸 텐데, 그걸 망각하지 말라고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보스를 위해서도, 그리고 오늘 당신이 이끌어야 했던 우리를 위해서도.”
거기까지 말한 여우 가면이 여전히 가느다란 숨소리만 내는 서연희를 고요한 눈길로 살폈다.
일 초, 이 초, 오 초.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여우 가면이 공터 가장자리로 걸었다. 그리곤 뒷모습만 보인 채로 말한다.
“난 먼저 가볼게요. 알아서 들키지 않게 돌아갈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보스를 보살피기도 바쁠 테니까. 신입 분도…… 수고하셨어요.”
피유웅-!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여우 가면의 기척이 멀어졌다. 초장거리 공간이동 마법을 써줬어야 할 서연희가 혼절해 있으니 원래 거주지로 단번에 돌아갈 순 없을 거고, 안전한 장소에서 차근차근 복귀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서양인인 듯하니 짧게 걸리진 않겠지만…… 나도 지금으로선 그것까지 걱정해줄 여유가 없다.
공터 벤치에 누여놓은 서연희를 안아 든 나는 유해빈에게 제안했다.
“우리도 이만 해산하자. 오늘은…… 너한테도 정말로 미안했어. 너 집에 가는 건 내가 마법으로 보내줄게.”
“아니에요. 어차피 집까지 얼마 안 걸리는데…… 조심해서 걸어갈게요.”
쓰고 있던 용 가면을 벗어서 마력으로 불태우고, 마법으로 변장한 외견도 본래대로 되돌린 유해빈이 시무룩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어렵사리 웃으며 그 애에게 일렀다.
“너 오늘 저녁부터 너희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온 거로 되어 있잖아. 마법 타고 가서 조용히 복귀해야지.”
“아, 맞다. ……저 지금 좀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요.”
“피곤해서 그렇겠지. 빨리 집 들어가서 쉬어라.”
쉬이익- 위유웅-
내가 손을 휘두르자 우리 정면에 두 개의 공간이 열렸다. 하나는 내가 사는 집과 연결된 마법, 다른 쪽은 유해빈을 자기 집으로 보내줄 공간이동 마법.
이 근방에 감시하는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서연희를 품에 안고 희뿌연 빛을 내는 공간 쪽으로 걸었고, 그때 유해빈이 물었다.
“아니면…… 저도 같이 갈까요? 교수님 혼자 보스 간호하시려면 힘들 텐데-”
“아니야, 괜찮아.”
“……그래요?”
“그런 것까지 너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 좀 미안하고, 당분간 일 문제로 부를 일 없을 테니까 방학도 했는데 푹 쉬어.”
“……네.”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하면서도 유해빈이 공간이동 마법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서연희가 있는 쪽을 보더니, 정말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제가 잘못한 건 없는데…… 근데…… 마음이 좀 복잡해요.”
그러더니 폴짝 공간을 뛰어넘어 사라진다. 유해빈까지 자리를 떠난 다음, 나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논리적인 말로 내 실책을 지적한 여우 가면.
본인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건만 심적인 부담을 받게 된 유해빈.
그나마 조금 식었던 몸이 다시 뜨거운 열로 달아오르고 있는 서연희까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나 자신이.
슈아아아아-
마법으로 연 공간을 지나친 나는 다음 순간엔 집 현관에 서 있었다. 그 직후 신발만 대충 벗어 던지고 서연희를 안은 그대로 내 방에 뛰어들어갔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한시가 급하고,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흐윽…… 아…… 아아…….”
의식 없이 식은땀을 흘리던 서연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고통에 겨워하는, 나지막한 비명. 방문을 벌컥 연 나는 곧바로 그녀를 침대에 누였다. 몸에 열이 오르며 배어 나오는 피가 침대 시트와 이불에 묻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슈우우우…….
침대에 누워 있는 서연희의 외견이 바뀌어 간다. 팬텀의 보스로서 구현한 모습에서, ‘안개의 마녀’ 서연희로서의 외모로.
나는 그녀의 변화를 보며 걱정에 이를 악물었다.
저 마법마저 저절로 풀린다는 건…… 정말 티끌만큼의 힘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이후 무슨 말을 듣든, 어떤 식으로 놀림을 당하든 감수해야 한다. 차라리 기운을 회복해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서연희의 옷깃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찢겨 있는 검은 드레스 풍의 의복. 힘을 주어 완전히 찢어냈다.
부욱-
양옆으로 갈라진 옷이 흘러내렸고, 속옷만 겨우 걸친 그녀의 나신이 내 앞에 드러났다.
어디부터,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가장 시급해 보이는 건 가슴께의 상처였다. 심이수의 공격에 당해 특히나 크게 벌어져 있고, 거의 뼈까지 보일 만큼 깊게 관통돼 피를 흘리고 있다.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댄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마력을 전했다.
스으으…….
아주 조금 상처가 아물었으나 뚜렷한 차도를 보인다 할 순 없다. 서연희는 너무도 강한 존재여서 내가 치료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가슴 다음엔 어깨와 쇄골, 목 뒤와 옆구리 위, 하복부와 허벅지까지 쓸어내리며 마력을 주입했다.
“하아…… 흐읏……!”
상처에 자꾸만 자극이 가해져 고통스러운지 서연희가 눈가를 찌푸린다. 나는 힘겹게 그녀의 표정을 외면하며 치료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후우…….”
눈썹 아래로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훔쳐낸 나는 축 늘어져 있는 서연희를 내려다봤다. 이걸로 응급처치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은 나는 힘껏 마력을 흘려냈다. 이번엔 치료 목적이 아니다. 행동을 제한하는 일급 마법.
그걸로 서연희의 전신을 감싸듯 둘러친 순간,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이내 터져 나온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
“아…… 아아아, 아아아아-!”
서연희가 몸부림친다. 붉게 물든 눈에선 명확한 의식을 찾아보기 어렵고, 그저 괴로워하는 것에 가깝다. 너무 지나치게 소모한 힘을 채울 수 없어 균형이 흐트러진 거다. 내가 구현한 마법도 풀어내지 못할 만큼 지친 상태로.
그리고…….
그토록 지옥 같은 고통을 견디며, 한데도 그녀는 저항하고 있다.
실낱처럼 미약하게 전해지는 시선. 극히 흐릿하게나마 서연희는 나를 보고 있다. 괴로워하면서도 내게 사과하고 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고. 너도 많이 다쳤을 텐데…… 아프지 않냐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균형이 깨진 장생종으로서의 서연희가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벗어나려 한다. 껴안은 팔을 결코 떼어내지 않으며 그녀에게 일렀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괜찮으니까, 그래도 돼요. 나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만큼 그렇게 해도 돼요.”
퍽! 퍼어억!
서연희가 강하게 쥐지도 못한 주먹으로 내 등을 친다. 심가에서 싸우며 크게 다친 자리. 많이 아팠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아아……!”
안간힘을 쓴 서연희가 결국엔 내 팔을 풀어냈다. 자유로운 손으로 내 옷을 모두 찢어버렸고, 내 가슴에다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댄다. 그녀가 흘린 땀과, 얼굴에 묻은 피와, 입술을 통해 닿는 타액이 느껴진다. 뜨거운 혀가 내 가슴을 핥아 올리고, 가지런한 치아가 내 살갗에 자국을 남긴다. 나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뒀다.
장생종으로서 내 피를 가져가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내 동반자인 서연희가 나를 의지하는 것이니까.
조금만 이렇게 있겠다고. 내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할 수 있으니까, 괴롭지만 이걸로 견뎌보겠다고.
나는 오래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서연희의 행동이 진정돼 간다. 이젠 몸을 뒤틀며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치아가 피부에 닿는 느낌도, 혀의 감촉도 조금씩 잦아든다.
문득, 서연희가 고개를 살짝 올렸다. 기운 없는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괜찮은데.”
“그러면 누워 있어요.”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 들어 침대에 누였다.
탈력감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서연희가 장난스럽게 이른다.
“약속, 지켜줬네.”
“무슨 약속이요?”
“나 지켜준댔잖아.”
“아…….”
침입 작전을 세우면서 그녀에게 했던 약속.
지켜주기는커녕 이번에도 도움만 받았는데. 그런데도 서연희는 행복해하며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이 너무 예쁘고, 그만큼이나 미안하다고 느끼며 답했다.
“정작 약속한 건 못 지켰잖아요. 이렇게 고생시키고, 오히려 누나가…… 나 지켜줬잖아요.”
“괜찮아.”
서연희가 또 한 번 옅게 웃는다. 내게 이 말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너한테 보호받는 거, 응, 그거 나쁜 기분은 아닌데…… 그래도 아직은, 내가 너 지켜주는 게 더 좋아.”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은 서연희가 내게 일렀다.
“나 피곤한데…… 불 좀 꺼줄래?”
“알겠어요. 일단 주무세요. 잠들고 나면, 계속 옆에 있을게요.”
“내 옆에서 같이 자게?”
“자긴 뭘 자요. 간호해줘야지.”
정신을 차렸다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길게 보면 며칠 정도는 그녀의 옆에 있으며 거동을 도와주고 마력을 전해줘야겠지. 그 후에도 정상 컨디션을 되찾을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보호해야 할 테고.
“응……. 미안한데…… 그러면 신세 좀 질게. 그걸로 용서해줄 테니까.”
“제가 용서 안 받고 싶은데요. 지은 죄가 얼만데 계속 갚아야지.”
그녀가 다 낫고 나서야, 그제야 용서를 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희가 놀리듯이 답한다.
“으응, 그거 말고.”
“그럼요?”
문득 드는 예감.
아니나 다를까 조금 기운을 회복했다고 서연희가 바로 공격에 나섰다.
“나 정확하게는 아니라도, 기억은 나는데. 내 옷 찢고, 그다음에…… 뭐했더라……?”
“빨리 자요.”
“응…… 너도 좀 쉬어.”
내 방의 불을 끈 나는 문밖으로 나섰다. 문을 닫기 직전에 서연희가 내게 말했다.
“도진아, 고마워.”
“……제가 훨씬 더 고마워요.”
그리고 방문을 닫은 나는 욕실로 향했다. 피가 묻은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한심한 새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얼간이.
나 자신이 수긍하는 자기 혐오. 힘겨워하던 서연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서연희는 죽지 않는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방법은 오로지 하나. 나만이 아는 그 방법은 아직 먼 이야기다.
불로불사. 서연희는 노화하지 않고, 죽지 않고, 하지만 그게 고통조차도 겪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고.
치가 떨리는, 나 자신을 향한 경멸과 분노가 멈추지 않는다.
쏴아아아-
차가운 물에 간단하게만 몸을 씻어낸 나는 다시 내 방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방 안에 서연희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들린다.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잘하고 싶은데, 잘 해내야 하는데,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염치가 없는 것 같다고.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다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선택해야 한다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걸 해내려면 무엇은 할 수 없는지.
그걸 알아야 하고,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한다고.
여우 가면의 말이 옳다.
원하는 게 있다. 해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걸 망각해서는 안 돼.
***
7월 11일, 일요일 오후 네 시.
방 안에 스미는 햇살에 서연희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