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Chapter 31. 파혼 (1)
‘오래 잤나 보네?’
유리창 밖, 뜨는 것도 못 봤는데 어느새 서쪽으로 꽤 기울어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서연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아…….”
눈을 찡그리며 작게 소리를 냈다. 몸이 쿡쿡 찔리는 듯한 감각. 다른 곳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특히나 어깨와 가슴께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심이수라고 했던가. 어제 심가에서 싸운 여자에게 당한 상처. 서연희가 기억하기로 여태 이만큼 크게 다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좀 창피하네.’
심가 따위에, 그것도 고작해야 스물세 살밖에 안 되는 여자애한테 이렇게나 위기에 몰릴 줄이야.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지만 그걸로 창피함이 가려지는 건 아니고, 서연희는 뺨을 살짝 붉히며 덮고 있던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볼에 홍조가 스민 이유는 따로 있고.
‘어젯밤에…… 좀 그랬지?’
정확히 기억 나는 장면.
흐릿하게만 떠오르는 기억.
둘 중 어느 쪽이든 정말 창피하면서도 심장이 쿵쿵 뛰는 건 마찬가지다.
전후를 다 떼어놓고 이도진과 했던 일을 있는 그대로만 나열해 보면, 둘 다 옷을 벗고(서로 찢었다), 몸을 꼭 붙여서 밀착시키고(서로 안았다), 한 명은 힘껏 끌어안고(이도진), 다른 한 명은 그에게 안겨 입으로 이것저것 했다(서연희).
그전에는 이도진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치료했고, 그 이후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고, 이도진이 잠든 그녀 옆을 밤새도록 지키며 손을 잡고 마력을 전해줬다. 얼핏 잠이 깰 때마다 그러고 있었으니 정작 본인은 한숨도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웠겠지.
‘다치는 거도…… 무조건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이도진이 몹시 걱정한 걸 잘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오른 생각. 그걸 유치하다 여기면서도 입가에 해사한 미소를 그린 서연희가 방의 정경과 자신의 모습을 둘러봤다.
방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피투성이였던 침대는 이불도 시트도 깔끔하다.
피에 젖었을 드레스는 보이지 않고, 그녀가 입기엔 커다란 이도진의 옷이 입혀져 있다. 속옷은 입고 있지 않다. 이 옷을 입은 기억도 없고, 속옷을 벗은 기억도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하아…….”
밀려오는 창피함에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던 그때, 문밖에서 이도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짜로 별일 없는 거 맞지? 진짜, 진짜로?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전화하나?’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내용으로 볼 때 상대는 이세아인 모양이었다. 한데 이도진은 평소 동생에게 그러했듯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지 않고, 걱정스러워하며 무언가 동태를 살피듯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얘기해. 진짜, 어제 누구랑 싸우거나 위험한 일 없었던 거 맞아? 응? 왜 죄인 다루듯이 의심하냐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빠 어제 꿈자리가 좀 사나웠는데 혹시나 해서 그러지. 아니, 의심이 아니라…… 일부러 말투 안 좋게 하는 거 아니고, 알았어, 고칠게. 그러니까, 진짜 딱 한 번만 더 물어보는데…… 아, 응. 알겠어, 알겠어. 그만 말할 테니까 화내지 말고. 그래, 아니면 다행이고……. 응, 아침 든든히 먹고, 훈련 열심히 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오빠한테 꼭 연락해야 한다. 응…… 끊어.>
‘저렇게 걱정할 거면서 영국에는 왜 보낸 거람?’
쩔쩔매는 대화에 내심 되뇐 의문. 하지만 그 덕에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으니 불평할 건 아니고, 서연희는 이불을 덮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이도진의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열린 문. 이도진이 방에 들어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때, 마침 일어났다는 듯이 슬쩍 눈을 뜬 서연희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나 오래 잤어?”
“지금이 벌써 네 시예요, 네 시.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잠이잖아요.”
멋쩍어하며 퉁명스럽게 꺼낸 대답. 서연희는 웃으며 그에게 일렀다.
“미녀는 잠꾸러기라잖아.”
“그러면 좀 더 자요.”
“어머?”
방 안에 달콤한 공기가 흐른다. 이도진은 방금보다도 더 멋쩍어하며 멀리 창문 쪽을 바라봤고, 서연희는 상반신만 침대에서 일으키며 그에게 물었다.
“나 옷은 언제 갈아입혔어?”
“피 묻은 거 입고 어떻게 자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마법 써서 손 안 대고 갈아입혔어요.”
“음…… 그런 뜻으로 물은 거 아닌데. 그냥 입혀줬어도…… 아무튼 그래.”
“…….”
다시금 침묵이 일었다. 어색한 침묵은 아니다. 할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그중에 어떤 걸 먼저 꺼낼지 생각하느라 생긴 잠시의 휴식.
하지만 서연희는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이도진은 지금,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
아마 본인은 그녀가 달갑게 여기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을 말을 꺼내야 할지, 그렇게 한다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그런 부분을 고민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해주면 되지.’
그녀는 이도진이 고민하지 않도록 배려해주기로 했다. 그가 뭘 말하려 하는지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니까.
“다녀와도 돼.”
“네?”
창밖을 보고 있던 이도진이 몸을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서연희는 다시금, 상냥함과 이해심을 가득 담은 어조로 물었다.
“한태강이 부른 거 맞지? 오늘 창립일 행사 오라고.”
“그렇긴 한데…… 저 그 얘기 한 적 없는 거 같은데요.”
“당연히 알지. 저번에 한태강이 너 불렀을 때,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맞아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어제보다 몸 상태도 괜찮고, 급한 일 있으면 너 부르면 되고. 기운이 없어서 싸우지는 못해도 피신할 수는 있어. 오늘은 달도 뜨니까.”
“그렇게 해도 돼요?”
“응, 원래 갈 생각이었지? 거기 가서…… 할 일 있잖아.”
“네.”
굳은 어조로 답하는 이도진의 표정에 결의가 내비친다. 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지만 간밤의 일로 한층 더 결심을 굳힌 걸까.
서연희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갗에 닿는 이도진의 옷. 그 감촉을 느끼며 그에게 일렀다.
“나 거실에 있을 테니까, 준비하고 옷 갈아입고 가봐. 너무 늦게 가는 거도 그렇잖아?”
“……고마워요.”
그리고 사오십 분이 지난 다음.
준비를 마친 이도진이 현관을 나서고,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서연희는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했다.
‘미안해.’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 올리비아 윈에게 건네는 말. 오늘은 영원 길드의 창립일이기도 했으나 그것보다 앞서 그녀의 생일이다.
서연희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 자신과 샬럿 테이트, 정세빈과 올리비아 윈.
예전에는 이날 넷이 모이기도 했다. 올리비아 윈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그런 날에 이도진의 등을 떠밀어준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서연희로서도 결코 양보할 수는 없었다.
‘마음고생 하는 거…… 더 보고 있기 싫으니까.’
비단 서연희 자신을 위한 일만이 아니다. 그것보다도, 이도진을 위한 일이다.
그나마 결심이 섰을 때, 할 수 있을 때조차 망설인다면 이후에는 더 힘들어질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전부 다 하고 와.’
이도진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겠다.
힘에 겨운 일까지 부여잡고 있기에는…… 이미 그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
7월 11일 오후 5시 30분.
잘 꾸며진 연회장에 서 있던 한세라는 아버지 한태강의 모습을 눈여겨봤다. 복잡한 행사는 끝났고 남은 건 모인 사람들이 저녁 식사 겸 보내는 시간뿐.
한데 한태강의 얼굴이 어째 침착해 보이지 않는다. 겉보기엔 으레 그렇듯 묵묵히 자리해 있는 듯하지만 자식인 한세라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한태강이 아까부터 문 쪽을 쳐다본다. 꼭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듯이.
‘안 올 텐데.’
한세라는 거의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한태강이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그녀로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오늘 오는 거면…….’
마음에 일렁이는 쓰라림을 감추며 한세라는 한태강을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을 알아챈 그가 묻는다.
“피곤하진 않고?”
“괜찮아요. 이것도 일이라면 일인데, 그래도 또 나머지 반은 휴식이잖아요.”
길드의 창립일.
고인이 된 어머니의 생일.
두 가지 의미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자리고, 평년보다도 조금 더 많이 참석한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다음 대에 영원 길드를 이끌어나갈, 전도유망하기 그지없는 인재와.
조금 복잡하긴 했어도 그런대로 버틸 만은 했다. 어느 자리를 가든 관심이 쏠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다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길드의 창립일은 기뻐해야 할 일.
작고한 어머니의 생일이라는 건 그녀를 기리는 추억과 먹먹한 슬픔이 함께 드는 일.
그리고 한 가지 더.
“…….”
“피곤하면 말하거라.”
“그런 건 아니에요.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고요.”
한태강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일이 있다. 태연하게 둘러댄 한세라는 다른 곳으로 향했고, 푸른빛이 감도는 술이 담긴 잔을 하나 들고 연회장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역시나 오지 않는다. 한태강이 문 부근을 살피는 시선도 점차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시계가 오후 6시에 다다랐을 즈음. 문득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응?”
근처에 있던 이들이 의아해하며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폈다. 새로 음식이라도 내오는 걸까. 그렇게 짐작한 이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 주목했고…….
“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감탄을 흘렸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차분한 느낌을 주는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 탄탄하고 훤칠한 체격이 저절로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흘려냈고, 용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수려했다.
개중에 상당수의 이들에게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눈에 익은 외견이었고.
“그 사람…… 맞지?”
“그런 거 같은데?”
제1 아카데미 고등부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것으로 알려진 청년. 하지만 그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는 썩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수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평가를 받는 천재적인 마학 연구자.
‘수호자’ 이시혁과 ‘대마법사’ 정세빈, 위대한 두 영웅이 세상에 남긴 축복.
그리고, 이 연회장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한세라의 약혼자.
이도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한태강에게 다가가고 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한태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세라에게는 보였다. 웃는 일이 대단히 드문 그녀의 아버지가 옅게나마 웃고 있는 모습이. 그리곤 이도진에게 묻는다.
“식사는 아직이지?”
“네.”
“일단 밥부터 먹거라. 세라랑 얘기 좀 나누고 있고.”
그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한 이도진이 곧바로 한세라 쪽을 본다. 아직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걸어오는 이도진을 응시하며 한세라는 애써 웃었다.
“깜짝 놀랐네. 어떻게 온 거야?”
“그냥…… 와봐야 할 거 같아서.”
단출한 대답.
차마 내키지 않는다는 심정을 감추고, 너무나도 미안해하는 마음 또한 감춘 말.
한세라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응당 그랬어야 하는 일이지만.
해줬어야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괜한 말을 한 것이 후회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