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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29화 (129/207)

#129화. Chapter 31. 파혼 (2)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면으로 본다면 오히려 쓸데없는 참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세라 자신과 이도진, 두 사람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는, 짜증과 화풀이에 가까운 참견.

“이거 마셔볼래? 도수도 별로 안 세고, 깔끔하게 괜찮아.”

“그래? 아, 저기 있네. 안 그래도 목 좀 말랐는데 마시고 밥 먹어야겠다.”

“내 거 마셔도 되는데.”

“아니, 그냥 잔 하나 가져올게.”

한세라가 내민 잔을 거절한 이도진이 연회장 한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술이 담긴 잔을 골라 손에 들고 걸어왔고, 한세라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도진에게 쏠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감지했다.

그를 유심히 쳐다본다. 이번엔 그녀를 본다. 그다음엔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흘끗흘끗 살피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모습.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그건 손바닥 보듯 알기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안 될 텐데.’

아마 외부에서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터였다.

“맛있지?”

“응, 그러네.”

“음식은 저쪽에 있어. 같이 가자. 난 아까 먹었으니까 뭐가 맛있는지 알거든.”

“근데…… 너랑 나랑 음식 취향은 다르지 않나?”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네가 뭘 좋아할진 알잖아? 자신 있으니까 믿어봐.”

“내 기억으로는 전에도 그 말 듣고 갔다가 당황했던 적 있는데.”

“글쎄? 그런 적이 있었어? 난 기억이 안 나네.”

“……한 번만 더 속아본다.”

표면적으로는 대단히 친밀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고, 한편 길드 외부의 참석자 몇 명과 대화 중이던 한태강은 내심 담담히 수긍했다.

드러내지 않으려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만…… 자신이 지금 상당히 기뻐하고 있음을.

그와 함께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덕담처럼 말한다.

“허허, 한 대표께서도 아주 좋으시겠어요. 저리 듬직한 사윗감이 있으니 말입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참석자들이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처럼, 혹은 겁을 상실했냐는 듯 황당해하며 말을 꺼낸 이를 보고, 다음으론 한태강의 표정을 살핀다. 대놓고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발언이었으니까.

무신과 방벽의 딸.

수호자와 대마법사의 아들.

그 둘이 어릴 적부터 친구이자 약혼 관계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과 함께 언급되는 정보도 있다.

과거엔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에 와선 유명무실한 약혼에 지나지 않는다고. 곧 파혼할 게 확실하다고.

제일고 교직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이도진의 행실을 알고, 한태강이 그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소문을 믿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졌으리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도진은 방황의 시기를 지나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내기 시작했고, 더욱이 유학을 마친 한세라가 귀국하고 꽤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 파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으니까.

약혼 서약이 만료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 반가량. 그때까지 파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약혼 다음, 혼인 관계가 성립하는데도.

그래서 이도진이 이곳에 온 직후부터 그들은 한태강의 심기가 어떠한지를 예의주시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일까.

아니면 정말로 상황이 바뀐 걸까.

그리고 이 순간,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얼추 나왔다.

“듬직하기는 무슨, 당장에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일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말을 들은 이들 모두가 일제히 생각했다.

‘한 대표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파혼은 안 하겠구먼.’

‘이렇게 되면 한태강이 은퇴하고도 영원의 위상이 크게 떨어지진 않을 테고, 길드 외부 분야는 오히려 훨씬…….’

파혼하지 않는다는 대전제하에 각자 앞으로의 대처를 궁리했고, 한태강은 슬쩍 시선을 돌려 연회장 반대편을 바라봤다.

한세라와 이도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로 격의 없이 대하며,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광경이다.

비록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아주 많은 잘못을 하고, 그와 딸에게 무던히도 상처를 줬지만.

그래도…… 저 두 사람은 보기 좋게 잘 어울린다.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

본래도 말수가 적은 한태강은 그즈음부터 더더욱 입을 다문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고,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무어라 혼을 내야 할지.

반성의 말을 하면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할지.

지난 일을 끄집어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확실히 다짐을 받아야 할지.

혹은…… 격려 따위를 해줘야 할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몇 날 며칠을 고민해온 문제인데도.

그렇게 바삐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가 기울었고, 오후 여덟 시에 다다른 시각. 회장을 나서는 이들을 배웅한 한태강은 딸아이와 그 옆의 뻔뻔스러운 놈에게 다가가 일렀다.

“세라는 피곤할 텐데 이만 집에 가거라. 너는…… 갈 데가 있으니 따라오고.”

“……네.”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요.”

군말 없이 답한 이도진과 달리 한세라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태강 자신은 물론이고 이도진까지도 그녀를 만류했다.

“이놈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세라 너는 집에 가 있어라.”

“나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

“…….”

두 사람 다 그렇게 말하자 어쩔 수 없었던 한세라가 먼저 자리를 떴고, 한태강은 이도진과 함께 제법 먼 곳으로 이동했다.

미리 자리를 봐두었던,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가게 전체를 대절해 자리를 마련해둔 한정식집. 이미 식사는 하고 왔으니 저녁을 먹을 요량은 아니다.

상 위에 적당히 차려진 음식을 사이에 두고, 한태강이 술병을 내밀었다.

“한 잔 받거라.”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이도진이 술잔을 가지런히 받들었다.

“나도 한 잔 따라주고.”

“네.”

간단히 목만 축인 한태강은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이도진을 응시했다.

몹시 탐탁지 않다. 당장이라도 술병으로 저놈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참아야 할 것 같다.

오라는 말에 정말로 왔으니까.

무슨 뜻으로 오라고 한 건지 알면서도 왔으니까.

그걸 다시금 되새기며 한태강은 이도진에게 물었다.

“그래, 제일고 일은 언제까지 맡을 생각이더냐.”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세아가 졸업할 때까지는 학교에 있으려고 합니다.”

“제안을 주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 부분은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학교 일이 그렇게 바쁘진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몇 가지 연구를 더 정리한 다음, 거취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볼 계획입니다. 그때쯤에는 세아도 졸업할 테니까요.”

“그래…….”

한태강은 마음으로만 대견하다 여기며 남은 술을 비웠다. 예전부터 그랬듯 제 동생 하나는 정말 끔찍이도 챙기는 놈이다.

그런 마음을 딸아이에게도, 조금이라도 표현해줬으면 이 자리의 분위기는 지금과 정반대였을 텐데.

술맛이 쓰다고 여기며 한태강은 이도진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세아 없이 집에 혼자 있으면 밥은 제때 챙겨 먹느냐.”

“하루에 두 끼 정도는 챙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구에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몸 생각도 하는 게 좋아.”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에 심 어르신을 뵈러 몇 번 갔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어르신이 저를 좋게 봐주신 모양이에요. 연구에 도움이 될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 그 집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던 건 알고 있고?”

“아니요…… 전혀 몰랐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었는지-”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마력 흐름을 닫아버리면 그 주위는 관측이 안 되니까. 워낙 함구하고 있기도 하고, 웬 놈들이 침입했다는 정보만 알려졌더구나.”

지난번에 이도진을 불렀을 때처럼 사무적인 화제가 아니었다.

일상적인 대화. 사업적인 얘기가 아니라, 이도진이라는 사람 자체의 미래.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한태강은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이도진이 마음을 다잡은 거라고. 그가 내민 손길을 잡고,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그래서…….

“아까 세라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궁금하구나. 너희 약혼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도 했더냐.”

한태강은 진중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이 미운 놈이 머리를 숙이며 제 잘못을 빌 거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면, 그래도 어깨라도 한 번 두드려 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도진이 답했다.

“그 부분에 대해, 아저씨께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말해봐라.”

가능한 한 침착하게 입을 떼려고 하지만, 한데도 만면에 고통스러워하는 빛을 선명하게 내비치면서, 이도진이 말했다.

“세라와는…… 귀국하고 만났을 때 어느 정도 얘기가 되었습니다. 세라와 아저씨가 시간이 되실 때, 늦기 전에…… 파혼 서약을 마치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한태강이 지난 수년간 원했던 말. 하지만 본심으로는 원하지 않았던 말.

이도진이 그 말을 입에 담았다.

***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굳이 오늘, 영원 길드의 창립일에, 올리비아 윈의 생일에, 한태강이 나를 용서해주려고 부른 자리에서 파혼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게…… 이게 정말로 최선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솔직히 말하면, 전혀 최선이 아닌 것 같다.

이것보다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것보다는 더 예의를 갖추어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물론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더 힘들기 싫었다.

그나마 오늘 참석해서 말하는 게 가장 정중한 의사 표현일 거라는 건 거짓말이다.

그냥, 내가 더는 못 견딘 거다.

오늘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시간을 더 끌면 내가 더 힘드니까.

오늘 오지 않고서, 한태강을 한 번 더 실망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도 죄책감이 드니까.

그래서, 그냥 이기적으로 선택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일 분 일 초마다 숨이 죄여오도록 힘들고 어려운 일들뿐인데.

그런 와중에도 한태강과 세라를 생각하면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미안한데.

두 사람이 알아줘야 할 이유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도, 나도 많이 힘들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이것저것 다 하려다가는 전부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미 어제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그중 하나를 일찍 끝내려고 한 거다.

내가 오늘 집을 나서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다른 건 모두 다 변명이고, 오직 그것 하나 때문이다.

“…….”

한태강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만이 감도는 채로 일 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가 겨우 말한다.

“너한테 이런 말을 들으려고…… 그동안 세라가 참고, 또 참으면서, 그렇게 기다려왔던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어떤 식으로 행실이 좋지 못한지, 그게 내 귀에도 다 들리는데, 그래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세라가 어떤 심정으로 너한테 그런 걸 말하지 말라고 내게 신신당부했는지…… 그건, 결국에는 이런 말을 들으려고 그랬던 게, 절대로 아닐 거다.”

“세라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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