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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30화 (130/207)

#130화. Chapter 31. 파혼 (3)

<킬 더 이블>이 시작하기 전에,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으로서 내가 남몰래 해왔던 일들. 그걸 감추고자 대외적으로 보인 면모.

물론 다른 것들도 몹시 실망스러운 행보였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태강이 특히 분노하고 세라가 가장 배신감을 느꼈을 지점이 어딘지는 명확하다.

신분과 외견을 바꾼 서연희와 함께 있던 게 가끔 목격됐던 것. 비록 흐지부지됐다곤 해도, 절친한 친구이자 약혼자가 있는 놈이 그러고 다녔다는 사실.

유학을 가기 직전에 만나서 대판 싸운 날. 그때만 제외하면 세라는 내게 그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한태강도 본의 아니게 마주칠 때마다 면박을 주거나 혀를 쯧쯧 차고 자기 눈앞에 있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나를 박대했지만, 그런데도 나를 직접 추궁하진 않았다.

나는 여태 이렇게 생각해왔다. 한태강은 그걸 언급하는 것조차 싫은 거라고.

어차피 파혼할 테니까. 나를 세라의 결혼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굳이 그런 불쾌한 화제를 입에 담지 않은 거라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몰랐다고는…… 그따위 말은 하지 마라. 세라가 너를 배려해줬다는 걸, 당장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확실치 않으니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와도 되지만, 그래도 올해 봄까지는 정리하라고, 너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얼핏 들은 것만으로도 황당하리만큼 나를 배려해준 결정. 나와 세라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한태강이 질책하지 못하게 해놓고 정작 내게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세라 본인에게 듣지 않아도 너무 잘 알겠고.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그게 세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대놓고 말하는 건 너무너무 비참하니까.

상황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한태강에게 거짓말을 한 게 들키더라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나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싫으니까.

아니, 단지 그것뿐일까.

어떻게 이만큼이나 바보처럼 착하고 배려심이 많을 수 있을까 싶지만…… 어쩌면 세라는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닐까.

나한테 직접 말하면,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하고 마음에 부담감을 가질까 봐서. 어쩌며 그런 것까지도 생각한 게 아닐까.

그래서 한태강에게 둘러대고, 나한테는 숨기고,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한 게 아닐까.

몰랐다, 착각했다, 그건 정말로 쓰레기 같은 변명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면 알았겠지.

내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세라가 묻지 않은 이유. 한태강이 노발대발하지 않은 이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차마 세라와 그런 대화를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래서 외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정말로 비겁하게 행동했다. 세라의 말 같지도 않은 호의를 넙죽 받고, 내가 질책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그렇게 매번 피하기만 했어.”

“맞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비겁했다는 것엔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하니까. 지금껏 한태강이, 세라가 참은 게…… 그게 신기한 일이지.

한태강이 묵묵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입에서 파혼 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려고…… 고작 그런 말을 들으려고 세라가 지난 몇 년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참아줘야 돼!”

콰앙!

한태강이 오른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마력을 실었다면 이곳은 물론이고 이 일대 전체를 초토화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사람이건만 겨우 술병 하나만 기우뚱하며 쓰러진다.

영웅으로서가 아니다. 이 시대 최강을 다투는 각성자로서가 아니다.

딸을 너무도 아끼는 아버지로서, 한태강은 지금 그 마음으로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디까지, 대체 어디까지 이해하고, 참아주고, 기다려야 해! 시혁이와 세빈이가 그렇게 돼서 상심이 컸겠지, 마력 문제로 힘들겠지, 혼자 동생을 보살피느라, 세아가 쌀쌀맞게 대해서 고생일 거다, 성취가 낮아져서 낙담했겠지, 방황할 만도 해, 그럴 만도 하지, 사람들이 조롱하는 걸 견디는 게 힘들겠지,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걱정일 거다, 누굴 만나건 진심으로 대하는 게 아닐 거다, 세라가 정을 떼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다, 참고 기다리면 반성하고 예전처럼 돌아올 거다, 거봐라, 올해가 되니 달라지지 않았냐, 그럴 줄 알았다, 혼을 내면서도 언젠가는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제 제 할 일도 찾은 것 같고, 안 좋은 소문도 사라졌고, 기대에 보답하려고 하지 않느냐, 잘 타이르면 잘못을 반성하고 더는 세라 속 썩일 일 없을 거다, 앞으로 살면서 평생 갚아나갈 거다, 그렇게 계속, 계속 기다렸는데…… 내가 어디까지 봐주고,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세라가, 우리 딸이 언제까지 마음고생을 해야 해! 말해봐라!”

“모든 건 아저씨와 세라의 배려에 기대 벌써 마무리했어야 할 일을 질질 끌고 있던 제 잘못입니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서 정말로 죄송스럽지만, 이제라도 제 의사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세라와 약혼 관계를 지속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나는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그에게 잘못을 빌면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용서해달라고는 못 하겠어요. 그냥, 너무 죄송해요. 상처 주고, 실망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그렇게 해놓고서는, 그래놓고선 지금에서야 말씀드려서…… 정말,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변명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줘. 더 듣고 있다가는 정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잖아. 내가 어떻게, 뭘 견디면서 글을 썼는지, 당신과 올리비아 윈을 얼마나 아꼈는지, 둘이 행복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잖아. 여기 태어난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그러다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그래서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지금까지 뭘 했고, 어떤 노력을 했고, 앞으로 뭘 하려고 하는지, 내가 뭐랑 싸우고 있는지,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잘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걸, 손에 잡히는 일마다 힘들고 어려운 걸 모르잖아. 그래도 해보려고 나름대로 죽을 힘을 다하고, 내 인생을 다 바쳐서 해내려고 하는데, 근데, 억울하다고 생각은 안 해. 내가 글로 썼잖아. 내가 작가였잖아. 하나의 세상을 글로 옮겨 적었는데, 내가 쓴 글을 통해서 당신과 올리비아 윈이, 이시혁과 정세빈이 살아서 숨을 쉬었는데, 그러면, 나도 내 인생을 걸어야 하니까.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전혀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데, 근데,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진짜 미칠 것 같은데, 당신은 그거 모르잖아.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만해줘요, 제발…….

내 본심은 티끌만큼도 새어 나가지 않았을 거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의 뜻을 밝히고 있었고, 기울어 쓰러진 술병을 쥔 한태강이 자기 잔에다 술을 따른다.

한 잔을 마시고, 두 잔을 마시고, 세 잔까지 마시고 나서, 내게 말한다.

“도진아.”

“네, 아저씨.”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게 얼마 만일까. 오래도록 그럴 일이 없었다. 그렇게 친근하게 부를 만큼 내가 잘하지 못했으니까.

한태강이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듯한 목소리로, 끊어질 듯이 내게 말한다.

“내가 너를 세라만큼이나 아낀 걸 알고 있을 거다.”

“네.”

“시혁이와 세빈이의 아들. 나한테는 조카. 하지만 그 이상. 내가 자식처럼 아끼는 너와 딸인 세라, 둘이 행복해지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네가 엇나가도…… 너를 미워하지는 않았어. 자식이 엇나간다고 부모가 자식을 미워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네가 내 자식은 아니니까,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면 세라를 더 아끼니까, 그래서 너한테 화가 많이 났다. 그래도 너를 미워하지는 않았어. 너를 아끼고, 시혁이와 세빈이 영정에 다짐했으니까. 네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날 때까지 돌봐주고, 세라와 결혼을 시켜서 너희가 행복하게 살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내 아내에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네가 잘 해내길 기다리고, 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한태강이 죽은 사람처럼 내게 묻는다.

“파혼 서약은 언제 할 셈이더냐.”

“날짜를 정해주시면 언제가 됐든 바로 가겠습니다.”

“세라와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됐다고 했지.”

“네, 날짜는 세라가 결정해서 아저씨께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다.”

“……네.”

한태강이 술병을 기울인다. 아주 조금 남은 술이 흘러내려 잔을 절반에 조금 못 미치게 채운다. 그걸 느리게, 아주 느릿한 속도로 마신 그가 다시금 말했다.

“세라에게는 내가 돌아가서 얘기를 해보마. 파혼 서약은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요즘 일이 바쁘니 당장 할 수는 없을 거다. 너희 둘이 시간이 되는 날을 정하고, 준비까지 해서 짧게 잡아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걸릴 거야. 얼추 정해지면 네게 연락을 주마. 그러니…….”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말. 그게 한태강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앞으로 세라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라가 연락해도 되도록 답하지 말고, 파혼 서약이 끝난 다음에는…… 헌터와 연구자로서가 아닌 사적인 친분으로는, 더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아주 안 볼 수는 없겠지. 둘 다 인재들이고, 앞으로도 얼굴 마주칠 일이 없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떠나서, 네가 조금이라도 세라에게 미안하다면…… 그렇게 해주려무나.”

한태강의 어조가 차분했다. 이제 정말로, 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거다.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오직 하나의 대답밖에는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세라가 내 약혼자가 아니게 되고, 그와 동시에 내 친구도 아니게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그리고.

내가 입을 떼려고 하던 그때.

“왜…… 둘이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해요?”

문이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

바삐 달려온 것처럼 보이는, 그러면서도 싸늘한 눈빛을 한 세라가 나와 한태강을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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