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31화 (131/207)

#131화. Chapter 31. 파혼 (4)

“…….”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니.”

한태강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세라가 이 자리에 오는 건 그와 나 둘 다 전혀 원치 않는 일이었는데.

그야 한태강 쪽은 나를 잘 다독이며 앞으로 세라에게 잘하라고 말할 생각이었을 테고 나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던 거지만, 어쨌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그와 대조적으로 어수선한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세라가 나를 향해 묻는다.

“나랑 약속하지 않았어? 아빠한테는 내가 말씀드린다고. 내가 원할 때로 결정하겠다고. 도진이 너도 동의해줬잖아. 그런데…… 왜 지금? 그것도 나는 빼놓고.”

목소리도 표정도 차분했으나 따져 물으려 하는 의도가 여실히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말.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세라에게 답한 건 의외로 한태강이었다.

“네가 한국 오고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길게 끌어본들 서로 피곤하기만 할 거고, 여기서 더 나아지는 게 있을까. 아버지도, 이놈도 동의했다. 최대한 근시일 내로…… 파혼하는 게 옳다고.”

“아빠는 오늘 그 이야기 하려고 도진이 데려오신 거 아니잖아요?”

“…….”

세라의 날카로운 물음에 한태강이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러다가, 간신히 화를 억눌러 참는 어조로 답했다.

“이놈이, 도진이가…… 세라 너와 약혼 관계를 더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구나.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알고 있었어요.”

더없이 침착하게 답한 세라가 다시금 나를 본다. 그리곤 한태강에게 일렀다.

“저 도진이랑 잠시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끝난 일이야.”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간신히 화를 참은 한태강이 만류하자 이번엔 세라도 온전히 침착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목소리로 답한다.

“아니요, 끝나는 거랑 상관없어요. 그거랑 별개로 도진이랑 할 말 있어서 그래요. 제가 약혼 당사자잖아요.”

세라가 내게 눈짓한다.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한태강이 나를 노려본다. 절대로 나가지 말고 이 자리에 있으라고.

“……죄송합니다.”

한태강에게 말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자신을 향한, 어처구니없어하는 조소를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게 된다.

한심한 자식. 기껏 마무리 짓겠다고 와놓고선 또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세라와 한태강. 이 두 사람과 만날 때면 매번 그러고 만다.

주위가 적막하고 어두운 바깥 공간. 그곳에서 마주한 세라가 내게 묻는다. 차분하게 들리는 어조로, 그래도 이해해보겠다는 듯이.

“그렇게 바빠?”

“…….”

“꼭 오늘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요즘 바빴어?”

나는 나직이 답했다.

“응, 좀 많이 바빠.”

그리고.

“그거, 거짓말-”

“사실은 거짓말이야.”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세라가 되받는 것보다 먼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할 일 많아도, 굳이 오늘 말씀드릴 필요까지는 없었어. 그냥……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서 그래.”

“무슨 의미로?”

나를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며 묻는 세라에게,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답했다.

“더 못 버티겠어. 이거, 약혼, 계속 마음에 못 담아두겠어. 너 만날 때 미안하고, 아저씨 뵐 때 미안하고, 미안해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근데, 내가 이렇게 말할 자격 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많이 힘들어서, 너무 부담돼서, 빨리 끝내고 싶었어. 네가 좋게 포장해줄 여지도 없어. 그냥 그것뿐이야. 내 마음 편하려고.”

“그래? 응, 차라리 솔직해서 좋아. 네가 마음 편한 게 나도 좋으니까.”

세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한심한 토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게 내겐 더없이 확실한 증거처럼 여겨졌다.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내가 세라에게 그런 사람이라고.

표면적으로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음에도 분명 우리가 여태까지 나눈 말 중에서 가장 험악한 대화.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오늘이 몇 번째였더라. 세라가 귀국하고 이걸로 벌써 네 번이나 만났다. 꽤 자주 만났고, 그만큼 싸움도 잦았다.

처음 재회한 날.

추모 광장에서 폭력이 오가며 싸웠다.

그다음은 세라가 제일고로 온 날. 그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세아가 있었으니 실상 싸우기도 어려웠다.

세 번째는 지난주 토요일. 대놓고 싸우진 않았지만 세라는 섭섭했을 거다.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 있던 부담감을 나 자신보다 더 잘 눈치챘을 거고, 하지만 이해해주고 일찍 귀가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로 만나 또 다툼이 벌어졌다.

네 번 중에 두 번. 확률로는 절반. 나머지 절반조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세라가 유학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날.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맞다, 요즘은…… 누구 안 만나?>

<나랑도 요새 자주 안 만나잖아. 집에만 있는 거 같진 않던데, 누구랑 만나? 내가 모르는 친구들?>

<말하기 싫어서 그래? 말해줄 수 있잖아? 나 들을 자격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진아, 나는 너 친구로 생각해. 정말 소중하고, 항상 응원하고, 가장 오래 알았고, 가장 친하고,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근데 우리가 그냥 친구는 아니니까, 약혼한 사이니까, 그래서, 나 사실은 네가 많이 미워. 경멸스럽고 역겨워. 네가 나 없는 곳에서 하는 행동들, 그걸 생각하면 혐오감이 들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오해하고 있는 거야? 혹시 그런 거면 솔직히 말해줘. 화 안 내고 들어볼게.>

<그래도 말 못 해주겠어?>

<미안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잖아. 계속 그 말만 하지 말고, 사실을 말하고, 이유를 말해줘. 너무 어려운 요구야?>

<자꾸, 자꾸 그렇게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왜 미안한지, 뭐가 미안한지, 사실은 내가 오해한 거여서 안 미안해도 되는 일인지, 앞으로는 안 미안해도 될 수 있는지, 나는 그걸 알고 싶어.>

<이도진, 도진아…….>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미안해.>

<미안해하는 이유는…… 내가 변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아. 화나는 게 당연하고, 경멸하는 게 당연해. ……미안하다.>

<세라야, 네가 뭘 어떻게 더 물어봐도 나 이 말 외에는 너한테 아무것도 말 못 해줘. 그냥…… 미안해.>

<그렇게 비겁하게 굴지 마. 이도진, 나 봐! 변명, 아니, 해명하는 게…… 나한테 그 말 하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려워?! 응? 대답 좀 해봐…… 제발……!>

<그만, 세라야, 제발 그만…….>

<어떻게 그만해? 이렇게 그만할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 안 했어. 이도진, 똑바로, 제대로 말해.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누구랑 만나는지, 그러면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런 걸 말해. 나 오늘은 그거 들어야겠어. 말해, 말하라고!>

<네가 알고 있는 거 이상은, 그 이상 너한테 아무 말도 해줄 거 없어. 헛수고야, 그러니까 세라야, 제발 그만, 그만하자. 그만, 그만 물어봐! 너한테, 할 말…… 없다고…….>

<끝까지, 이 순간까지도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역겹고, 경멸스럽고, 혐오스럽고, 변명 한마디도 못 하고. 너 그런 사람은 아니었잖아. 잘못했으면, 그러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반성하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또 실천하는, 내가 아는 이도진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아는 너는……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네가, 대체 뭘 아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내가 아닌데, 넌 모르잖아. 네가 생각한 만큼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 근데, 나 자신만 빼고, 그걸 누가 알아? 너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나밖에 모르는 거야.>

<알려주면, 지금보다 잘 알 수는 있어. 아니야?>

<아니, 의미 없는 것 같아.>

<담배, 피우고 싶으면 피워. 그리고 나도, 한 대만 피워보고 싶은데.>

<……여기.>

<……잘 모르겠네. 왜 피우는지.>

그날 우리는 서로 비명처럼 언성을 높이며 대판 싸웠다. 그 일까지 최근 다섯 번으로 보면 그중에 세 번이나 된다. 세라와 다툰 게.

그러니까, 어쩌면…… 이미 한계인지도 모른다.

물론 내 잘못이지만, 모든 게 내 잘못이지만, 누구의 탓인지를 떠나 어쨌든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여서, 그래서 이렇게 만날 때마다 싸우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서로가 소중하지만…… 그래도 이미 끝난 사이여서, 그래서 이제는 되돌리기 어려운 게 아닐까.

“그만하면 됐다. 가자꾸나.”

결론이 나지 않은 대화를 끝맺기도 전에 방에서 나온 한태강이 세라를 데리고 갔다. 나 혼자 집으로 향하던 중에 그에게서 짤막한 메시지가 왔다.

‘내가 했던 말 잊지 마라.’

파혼 서약 준비를 서두를 테니 나도 세라와 연을 끊으라는 부탁.

나는 어떠한 말도 더하지 않고 답장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이젠 한여름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밤에도 날씨가 더웠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며 홀로그램을 살폈다.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진행 중입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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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가에 침입하기 전과 비교해서 진행률이 10% 이상 상승했다. 상태추적 스킬의 대상을 심정웅으로 지정했을 때 일어난 일이고, 세아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통화하면서 목소리를 들은 바로는 딱히 위험한 일은 없었던 듯한데.

하지만 진행률이 하룻밤 새에 이만큼 상승한 건 그에 상응하는 이유 때문일 거고, 이제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할 수 있는 3권에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후우…….”

무더운 한숨을 내쉬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할 일이 많다. 모든 걸 문제없이 잘 해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나마 나은 결과를 내려면 그렇게 해야 해. 이미 파탄 내버린 일이 마음을 계속 찌르는 중이라 해도.

띡, 띠리릭-

현관문을 열며 나는 일부러 경쾌한 어조를 꾸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혼자 있는 집이 아니니까. 어젯밤부터 와 있던 사람이 부엌 쪽에서 사뿐히 걸어오며 나를 반긴다.

“왔어?”

“…….”

“그게…… 뭐예요?”

일순간 너무 놀라 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물은 말. 나를 향해 다가온 사람, 서연희가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며 반문한다.

“왜? 이상해?”

“아니,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라…… 좀, 낯설어서요.”

“응, 넌 이 모습은 처음 보는 거지? 나 학교 다닐 때는 이랬거든. 지금 기운도 없으니까 그거에 맞춰서?”

생긋 웃은 서연희가 한 걸음 더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안개의 마녀’ 서연희. 그 신분으로는 신장이 175cm쯤 되는 사람이건만 지금은 훨씬 작다. 기껏해야 160대 초반쯤 되려나.

얼굴도 무척 앳되어 여지없이 학생처럼 보인다. 생김새야 차가운 느낌이 있지만 워낙 어리다 보니 그냥 귀엽게 느껴진다. 옷도 어디서 구했는지 학생스러운 걸 입고 있고.

나는 무언가를 짐작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나이가…… 중학교 입학할 때쯤, 맞아요?”

“어머, 어떻게 알았어? 중학교 1학년치고는 키가 좀 크잖아.”

의아해하던 서연희가 갑자기 장난기를 담아서 묻는다.

“혹시…·· 나 옛날 사진 같은 거 찾아보고 그랬어? 그런 게 남아있던가? 졸업앨범이야 있겠지만 입학 때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거 찾았을 정도면…… 응, 관심이 좀 많았던 거라고 봐야겠지?”

“그냥 찍었어요.”

“응?”

서연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척 봐도 믿지 않는 눈치. 하지만 맹세코 그녀의 옛날 사진을 찾아본 적은 없고, 실은 찍은 것도 아니다. 이미 알던 거라고 해야겠지.

<세계의 수호자>의 1부, 아카데미 파트의 절반에 가까워진 시점.

주인공인 이시혁과 정세빈이 제일중을 졸업하고 제일고에 입학했을 때.

두 사람보다 세 살 어린 서연희는 그때 처음 작중에 등장했다. 제일중에 입학하는 신입생으로.

그리고…… 정말 많이 닮았다.

내가 본 적이 없고, 하지만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그녀의 모습.

지금 서연희는 놀랍게도, 신기할 정도로, 내가 꿈속에서까지 상상했던 그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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