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Chapter 32. 시연회 (1)
“응? 왜 웃어?”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는지 서연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은 말. 조금은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며 답했다.
“그냥, 보기 좋아서요.”
“그거…… 나 애처럼 보인다고 놀리는 거야? 실제로 중학생 때 모습이긴 한데, 너무 어릴 때로 했나?”
미심쩍어하는 서연희가 조금 불만이라는 듯이 자문하며 나를 졸졸 따라온다. 평소와 다르게 귀여운 느낌이라 더욱 입가에 미소를 띤 나는 장난을 치듯 둘러댔다.
“왜 사람 말을 곡해해서 들어요? 진짜 보기 좋다니까 그러네.”
“얘도 참, 그걸 어떻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너 머리 쓰다듬으면서 ‘어머, 우리 도진이는 어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울까?’ 이러면, 너는 칭찬이라고 기분 좋아할 거야?”
“해볼래요?”
제자리에 멈춰 서며 답하자 서연희가 손을 위로 뻗는다. 그리곤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지만, 아무래도 신장 차이가 상당히 나는지라 팔 각도가 너무 올라갔다. 외견이 어린 것도 있어서…… 썩 태가 나지는 않네.
은근히 곤란해하며 서연희가 묻는다.
“다시 바꿀까?”
“기운 없어서 바꾼 거잖아요. 진짜로, 거짓말 아니라 보기 좋으니까 그대로 있어요.”
“이게 좋다고? 그것도 좀 복잡한 기분인데…….”
“칭찬이니까, 칭찬으로만 받아들여 주면 고맙겠네요.”
몹시 드물게 KO 승을 거둔 나는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방에 들어갔다. 그야 장난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아지기도 했다. 내가 상상한 서연희와 실제의 그녀가 아주 많이 닮아있어서.
물론 작가인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모습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해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애정을 갖고 상상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의 서연희와 똑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씻고 나오니 오후 열한 시에 가까워진 시각. 이미 밤이 늦었는데도 서연희가 부엌에 서 있었다. 뭔가 음식을 만드는 듯하고, 거실 탁자엔 시원한 맥주도 두 캔 올려져 있다.
“저녁 안 먹었어요?”
“아까 일곱 시쯤 먹었나? 너 왔으니까 야식으로 먹으려고. 배불러?”
“아뇨, 먹을 수 있어요.”
이것저것 먹고 왔어도 배가 부르진 않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게 맛을 못 느끼기도 했고, 여러 일이 있어서인지 배가 꺼진 느낌이라서.
“자, 한잔해.”
“뭔가…… 되게 편해 보이네요?”
“응? 뭐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누나 본인 집인 줄 알겠어요.”
소파 아래에 상체를 기대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는 서연희는 무척 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피식 웃으며 그녀가 답한다.
“너는 자각 못 할 수도 있는데, 우리 집 오면 너도 이래.”
“……제가 그랬어요?”
“응. 엄청 편해 보이고, 그런데 또 궁금한 것처럼 집 여기저기로 눈길 가고.”
“제가…… 그랬어요?”
“안 들킨 줄 알았어?”
“…….”
침묵으로 패배를 인정한 나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팬텀 관련 일로 서연희의 집에 가끔 방문한 적이 있다. 대놓고 간 건 아니고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서만.
아예 놀러 가는 건…… 아마 당분간은 힘들지 않으려나. 최소한 <킬 더 이블>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이건 내가 재료 사서 만든 건데 어때? 괜찮아?”
“맛있어요.”
평소 이미지와 어울리냐 하는 건 별론으로 두고, 서연희는 요리 솜씨가 무척 뛰어났다.
한식도 잘 만들지만 여러 나라의 음식, 특히 그녀의 고향인 유럽 쪽의 이국적인 음식들을 잘 만든다. 요리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만들어 먹지도 않지만 오래 살다 보니 저절로 솜씨가 늘었다고.
겉보기엔 간단해 보이면서도 사실은 손이 굉장히 많이 갔을 음식을 먹으며 나는 가만히 서연희를 바라봤다.
“아, 이건 처음 만들어줬나?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줄까?”
그저 밝은 표정으로 내게 음식을 권하기만 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영원 길드의 창립일 행사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태강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세라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파혼은…… 어떻게 하기로 한 건지.
나를 배려해주는 마음인 걸 알고, 그게 고마우면서도 그녀가 궁금해할 걸 알기에, 그래서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가서 얘기했어요. 최대한 빨리, 파혼 서약 준비하기로요.”
“……그래?”
“그래도 시간이 좀 걸려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있어야 하는데…… 시연회 전후로는 할 것 같아요.”
내가 발표한 복합 계통 방어 구성체의 상용화 보급. 그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시연회가 곧 열릴 예정이었다.
7월 20일 화요일.
한태강이 날짜를 언제로 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그 주에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그즈음 서연희가 머뭇거리며, 그녀치고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묻는다.
“한태강이 너 때리지 않았어?”
“……그러진 않더라고요.”
“응, 알겠어.”
파혼과 관련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야기가 오가진 않고 이제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그리고 맥주를 거의 비워갈 때쯤 나는 일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확인했어요? 저희 어제 뭐 가져왔는지.”
“응, 아까 열어봤지. 좀…… 놀랐어.”
작게 말한 서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방에서 주머니 하나를 가져왔다. 마법적인 처리를 해둬 외관상 크기보다 훨씬 많은 걸 담을 수 있는 아공간 주머니.
그녀가 그걸 열었고, 마치 지퍼백으로 밀봉한 듯이 반투명한 공간 내에 있는 것들이 거실 허공으로 빠져나왔다.
장생종으로 추측되는 존재들의 시체. 도합 셋이다. 멀쩡한 것이 하나. 조각조각 나눠진 신체조직이 두어 구. 확인차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맞죠?”
“응, 확실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생종이 맞아.”
이내 침묵한 우리는 시신을 쳐다봤다. 심가는, 심정웅은 이걸로 뭘 하려고 한 걸까. 서연희가 신중한 눈길로 말했다.
“아마 다섯 구였을 거야. 아예 손을 안 대고 있던 게 하나. 나머지 넷은 분해했고, 그중 둘은 연구에 쓰고 둘이 남은 거지.”
“연구에 썼다는 둘, 다 안 쓰고 남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지도 모르고.”
셋은 우리가 확보했다. 하지만 나머지 둘을 심가에서 다 사용했는지, 아니면 얼마간 남았는지. 그건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게 하나 있다면…….
“심이수였겠죠?”
“그렇겠지.”
어디에다 무슨 용도로 썼는지. 그것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정웅의 손녀인 심이수.
그녀가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심지어 서연희의 힘마저도 흡수할 수 있었던 건, 필시 장생종의 시체로 실험을 감행한 성과겠지. 나는 홀로그램을 열었다.
+
[미수령 보상]
1) OX 질문 1회
2) 보상 수령 시점, ‘서울 내’ 인외 지성체의 숫자
+
심가에 침입해 얻은 퀘스트 보상. 그걸 사용해서 알아볼 게 있다.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 보상 중 ‘서울 내 인외 지성체의 숫자’를 파악합니다.
: 3개체
+
역시 3개체. 심가에서 인간을 벗어난 존재는 심이수 한 명뿐이라는 거다. 다른 둘은 서연희와 유해빈일 테니까.
+
OX 질문 (1/1)
-질문 내용: 심가 내에 장생종의 시신이 남아있는지 여부
-정답: O
+
거기까지 필요한 정보를 파악한 나는 서연희에게 일렀다.
“지금은 심이수 한 명이에요. 어쩌면 늘어날지도 모르겠고요.”
“네가 ‘아는’ 거야?”
“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심정웅이지만 누구일지 알 수는 없다. 앞으로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것만 명확했고, 서연희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근데 걔는 어제 엄청 쌩쌩하더라? 삭월에 그럴 수가 없는데. 그런 거 보면 완전히 장생종이 됐다고 딱 잘라 단정하지는 못할 것 같고, 무슨 실험을 어떻게 했는지도 알아봐야겠어.”
“알면 좋기는 할 텐데…… 당분간 조심해야 하지 않아요?”
그러자 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응, 아까 몸 상태도 체크해봤거든. 이번 달은 나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다음 만월은 7월 24일.
그때까지도 온전히 회복하긴 어렵고, 그다음 만월은 돼야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단다. 그것도 내가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그래서 세아 오기 전까진 이 집에서 너한테 신세 져야 할 것 같은데…… 나 그래도 돼?”
“당연히 되죠. 여기 두 명 산다는 것만 안 들키면 돼요.”
“응, 고마워.”
해사하게 웃은 서연희가 남은 맥주를 말끔히 비웠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묻는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학교 일학년 때 모습으로 저러고 있는 게…… 느낌이 좀 이상하긴 하네. 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추궁하지 않고, 문득 서연희가 한숨을 내쉰다.
“아…… 근데 도진아.”
“네?”
“나 이제 슬슬 피곤하고, 막 졸리고 그래.”
“……그래서요?”
“어제 나쁜 애가 내 피도 좀 가져갔고, 빈혈 끼도 있는 것 같고…… 막 되게 좀 어지럽고 그래.”
“그래서요……?”
“어제는 네가 나 잘 때 내 손 잡고 있어 줘서 괜찮았거든……. 근데, 너 어제 잠 못 잤는데, 오늘까지 그런 부탁하는 건 좀 미안하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이런 건 어때? 너도 자고 나도 자는데, 그래도 너한테 보조는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같이 손만 잡고 자자고요?”
“……안 돼? 나 어제 너무 무리해서, 지금도 사실 막 아프고, 어지럽고, 힘들고 그런데. ……민폐야?”
서연희가 가녀리게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적어도 외견만큼은 몹시 처연하고, 안쓰럽고, 열과 성을 다해 보호해주고 싶은 모습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요.”
“왜……? 왜 안 돼? 손만 잡고 자는 건데? 어머, 너 혹시, 막 이상한 생각 하는 거야? 난 그런 생각 전혀 안 했는데-”
“뭔 소리예요. 따로 떨어져서 자도 해줄 수 있으니까, 양치부터 하러 가요. 설거지는 내일 일어나서 하고.”
“응……?”
미심쩍어하는 서연희를 데리고 나는 욕실로 향했다. 나란히 거울을 보며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둘 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내 방 침대에 누인 서연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기…… 도진아?”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훤히 드러나는 얼굴로 서연희가 내 이름을 부른다. 그리곤 짐짓 긴장한 표정으로 힘을 모으려고 한다.
아니, 당신 생각하는 거 아니니까 안 그래도 돼. 지금 본모습 돌아가 봤자 몇 초 유지도 못 할 거면서 왜 각오하는 건데.
나는 잠자코 서연희에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어?”
서연희가 놀라서 소리를 낸다.
세아를 안마해주고, 심가 침입 때 결계를 뚫어내기 위해 유해빈에게도 운용한 간섭 계통의 마력 구성체. 그걸 통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럽게, 밤새 그녀에게 마력을 전달할 통로를 만들었다. 이어진 첫 번째 파동.
“음…….”
서연희가 힘이 빠진 것처럼 몸을 늘어뜨린다. 목소리는 그래도 차분하게 내려 하나 반응을 보니 자극이 작지는 않은 모양이다. 내일 아침까지 연결이 끊기지 않을 걸 확인한 나는 이불을 덮어주며 서연희에게 물었다.
“지금 느낌이 어때요?”
“음…… 몽글몽글한 느낌? 네가 내 몸 안쪽 천천히 만져주는 것 같아. 안심되고, 기분 좋고, 아…… 흐으, 응, ……엄청 좋아.”
“전 거실에서 잘 거니까, 혹시라도 연결 끊기면 저 바로 깨워요.”
“……진짜 따로 자려고?”
“그럼 가짜로 따로 자요? 저 피곤해서 바로 잘 거니까, 누나도 어서 자요.”
그리고 내가 방문을 닫고 나가려 할 때, 서연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도진아, 고마워.”
“안 고마워해도 돼요.”
“……미안해.”
“……안 미안해해도 돼요.”
뭐가 미안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그녀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그건 온전히 내 책임이니까.
지금이 런던 현지 시각으로 오후 서너 시쯤 됐으려나. 거실 소파에 누운 나는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통화 중이어서->
전화는 받지 않고 메시지만 도착했다.
-세아: 나 통화 중
-세아: 이거 끝나고 바로 전화할게
-이도진: 천천히 해 (23:45)
하룻밤 사이에 10%가 넘게 상승한 진행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별일 없는 듯해 다행이었다.
***
<미안, 좀 늦게 봤어.>
“아니야, 괜찮아. 언니 집이야?”
이세아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 한세라가 답한다.
<응, 행사 끝나고 집에 왔지. 이래저래 바빠서 메시지 보낸 걸 못 봤네.>
이세아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영원 길드의 창립일이자 한세라의 어머니인 올리비아 윈의 생일.
많이 바빴을 테고, 축하하기도 뭐하고 마냥 위로하기도 뭐해서 안부 인사처럼 보낸 메시지를 늦게 확인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우웅-
귀에 대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빠에게서 온 메시지. 재빨리 답장한 그녀는 다시금 한세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런던에서 하는 훈련 얘기.
한세라가 요즘 바쁘게 사는 얘기.
이세아는 차마 가장 궁금한 걸 묻지 못했다.
이도진이 창립일 행사에 참석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오늘은 싸우지 않았는지.
<그러면 들어가. 오늘 남은 훈련도 열심히 하고.>
“응, 언니도 쉬어.”
서로를 생각하는 진심이 담겨 있으나 또한 표면적인 화제에 그친 통화를 마친 이세아는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이도진에게도, 한세라에게도.
오늘은 아무 훈련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쉬기만 했다. 간밤에 피치 못하게 다칠 일이 있었고,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그때 달칵, 문이 열렸다. 방 안에 들어온 건 진유리와 샬럿 테이트. 왼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진유리가 그녀에게 말한다.
“약 먹어.”
“넌 먹었어?”
“먹었지.”
“나 너보다 덜 다쳐서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뭐래. 난 팔만 부러진 거고, 넌 힘들어서 일어나지도 못하잖아. 먹기 싫어도 먹어.”
성큼성큼 다가온 진유리가 괴상한 빛깔의 액체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이미 두 번 먹은 경험으로 저 약이 끔찍하게 맛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이세아는 무표정하게 침대 안쪽으로 물러섰고, 진유리가 한 걸음 더 다가와 강제로 컵을 입에 들이민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던 샬럿 테이트가 말했다.
“어서 먹어. 안 먹으면 내일도 계속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니까.”
“……알겠어요.”
쓰고, 시고, 떫고, 오만가지 괴상한 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이세아는 결국 약을 다 마셨고, 그런 다음에야 진유리가 묻는다.
“아직 못 일어나겠어?”
“그냥 좀.”
이세아는 그렇게만 답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놓고 보면 팔이 부러진 진유리가 더 아파 보이지만 내실을 따져본다면 이세아 쪽이 몇 배는 더 심각했다.
어젯밤에 마주친 범죄자.
진유리는 가볍게 왼팔만 부러뜨려 제압했으나 그녀에게는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거칠게 공격해왔으니까. 뒤늦게 온 샬럿 테이트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세아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진유리가 고민하듯 물었다.
“교수님한테는…… 진짜 말 안 할 거야?”
“말 안 해.”
이세아는 강한 의지를 담아 답했다.
오빠에게 걱정을 끼칠 생각은 없었다. 그를 지켜주려고,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거니까. 기실 현재 런던의 상황 탓에 외부에 떠들썩하게 알릴 수도 없고.
샬럿 테이트가 쾌활하게 말했다.
“둘 다 걱정하지 마. 전투적인 감각은, 뭐, 그래, 아주 훌륭했지만…… 그래도 내가 더 강해. 또 만나면 무조건 이길 거야. 이쪽 일은 이쪽이 알아서 해야지.”
세계 최강의 마검사 샬럿 테이트의 확언이다. 이세아와 진유리는 마냥 두려워하기보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야 한창 배우는 중인 두 사람이 당장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겠지.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이번보다는 나을 거라고.
“근데…… 진짜로 그 사람 맞을까?”
진유리가 긴가민가하며 되뇐 물음. 이세아는 확신처럼 답했다.
“또 누가 그런 걸 창피하게 쓰고 다녀.”
“하긴 그것도 그래.”
확답을 내린 두 사람은 어제 겪은 일을 생각했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지금 런던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젯밤, 7월 10일의 자정에 가까웠던 때. 이세아와 진유리는 인적 없는 골목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체구가 가녀린 한 여성이,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들을 물리쳐나가는 모습.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신비로운 빛을 내는 은발.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토끼 가면.
테러조직 팬텀이, 런던의 어두운 밤을 활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