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33화 (133/207)

#133화. Chapter 32. 시연회 (2)

***

7월 19일 월요일.

서연희가 이 집에 오고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났다.

<킬 더 이블>의 진행률은 거의 오르지 않아 사십 퍼센트대 초반에서 정체. 세아와 자주 통화하고, 상태추적 스킬로 살펴본 바로도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던 듯했다. 심가에 정체를 들키지도 않았고, 한태강과 세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 상황.

그러니 바깥에선 특별히 눈에 띄는 사건이 없었다고 해야 할 테고,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내 일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대표로 꼽을 수 있는 변화는…….

“도진아, 나와서 밥 먹어.”

오전 아홉 시. 새벽까지 시연회 준비를 하다 잠든 나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깨어났다. 얼추 정신을 차리고 나가보니 부엌에 서 있는 서연희가 보인다.

요리가 담긴 접시를 하나씩 식탁에 올리는 모습. 따뜻한 콩나물국에, 계란말이에, 나물 반찬 몇 가지에, 파프리카와 양파를 넣고 케첩 소스로 볶은 소시지까지.

그야말로 집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아침을 준비해놓은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잘 잤어? 빨리 세수랑 양치만 하고 와. 밥 같이 먹자.”

“……네.”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생경하게 느껴지는 광경에 나는 작게 답하며 욕실로 향했다.

십 년도 넘게 누가 나한테 아침 차려준 적이 없다시피 했는데. 세아가 영국에 간 다음부턴 굳이 시간 맞춰 밥을 먹지도 않았고.

그래서 눈 뜨고 일어나면 식사가 차려져 있는 게 꽤 낯설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낯선 것일 뿐이다.

본심을 말하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여기가 정말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잘 먹겠습니다.”

“응, 많이 먹어.”

식탁에 나란히 마주 앉은 우리는 수저를 들었다.

육체에 오는 피로야 마력으로 풀 수 있어도 정신적인 피로감은 그리 간단히 해소할 수 없다. 간밤엔 그게 한계치를 넘어서, 집중력을 더는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시점이 돼서야 자리에 누웠는데, 그 피로감이 다 풀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머리가 멍한 느낌이다.

골고루 먹으라며 내 밥에 나물 반찬을 올려주던 서연희가 나를 보며 말한다.

“다크서클 생겼네.”

“그래요?”

“응, 판다 같고 귀여워.”

“칭찬?”

“칭찬.”

“누나, 저보다 어려 보이면서 좀 건방지시네요.”

“음…… 이제 비슷하지 않아? 그래 봐야 다섯 살 차이인데.”

처음에 중학교 입학 때 모습이던 서연희는 몸 상태를 점차 회복했고, 그에 따라 육체도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다.

지금은 스무 살 당시의 외견. 이번에 올 만월쯤엔 소모한 힘 자체는 대부분 회복할 수 있을 거고, 그다음으로 찾아올 만월까지는 복구한 힘을 안정시키는 데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어제 몇 시에 잤어? 나 그래도 두 시까지는 깨어 있었는데.”

“다섯 시쯤? 그래도 네 시간이나 잤는데 이만하면 됐죠. 누나는 그 방에서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았어요?”

시연회 막바지 준비 때문에 어제 서연희는 내 방에서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실 소파에서 재우는 것도 미안하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비어있는 방을 쓰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 지금 집에 없는 내 동생 방에서.

물론 애가 알았다면 치를 떨며 싫어했을 테지만 다행히 앞으로도 모를 거고, 나는 마음속으로만 사과를 빌며 자체적인 죗값을 치렀다.

서연희가 이번엔 소시지를 내 숟가락 위에다 올려주며 답한다.

“딱히? 네 방보다 침대도 훨씬 좋은 거였고, 잠은 잘 잤어.”

“다행이네요.”

세아 방 침대가 좋긴 하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거로 샀으니까. 한데 서연희가 장난스럽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방에서, 도진이 네가 쓰는 침대에서 자는 게 제일 좋긴 한데.”

“…….”

이번엔 답하기 곤란한 말이라 침묵.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은 서연희가 한 번 봐주겠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내일 시연회만 끝나면 일은 생각하지 말고 며칠 쉬어. 이번에 보름달 뜨고 나면 너한테 보조는 안 받아도 되고, 너 따로 신경 써야 할 일도 있잖아.”

이건 파혼 서약을 말하는 거겠지. 서연희가 말한 대로 이번 주가 지나면 당면한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될 터였다.

시연회, 파혼 서약.

그리고 남은 건…….

“너 생일 선물은 뭐 받고 싶어?”

“받고 싶은 건 없고, 밥이나 먹어요. 다녀와서 연락할게요.”

“당일에?”

“네, 당일에요.”

7월 말에 세 사람의 생일이 몰려 있다. 세아, 나, 그리고 세라까지.

세라 생일은 축하의 말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아는 나와 자기 생일에 맞춰 잠시 귀국하기로 했고, 곧바로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다.

첫날이 세아 생일. 돌아오는 날이 내 생일.

그날 저녁에 오면, 집주인의 복귀에 따라 이 집을 나가줘야 하는 서연희와 만나 식사를 할까 싶었고, 한데 조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난 좀 미뤄도 괜찮은데.”

“당일에 봐요.”

“당일에 안 보면 섭섭하지만 그래도 너 배려해주고, 그런 거 아닌데?”

“그럼요?”

이번에도 서연희가 놀리듯이 입가에 웃음을 띠며 답한다.

“세아 출국하고 나서 보면 밤늦게까지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왜 세아 욕해요.”

“얘 부끄러우니까 괜히 다른 말 하는 것 봐. 내가 언제 세아 뭐라고 했담? 너랑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했지.”

“……저 생일 선물 정했어요.”

“뭔데?”

“그날 하루는 누나 겉모습에 맞게, 저를 존중하면서 대해줘요.”

생글생글 웃으며 놀려먹지 말라는 뜻. 그러자 서연희가 놀란 것처럼 입을 가리며 답한다.

“그러면…….”

“아니, 제가 말을 좀 잘못한 것 같은데-”

“막 오빠라고 부르고, 존댓말 쓰고, 네가 시키는 거 전부 다 하고, 그런 거?”

“…….”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말을 가로막았으나 공격이 더 빨랐다. 패배를 인정한 나는 잠자코 밥이나 먹었고, 식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방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나는 시연회 준비, 서연희는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서연희가 내게 말했다.

“해빈이한테 연락 왔네?”

“그래요?”

대비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최근엔 유해빈과 통상적인 수단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서연희가 연결해준 통신 마법으로 두어 번 대화한 게 전부.

이내 허공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뚱한 표정의 유해빈이 내게 인사했다.

[생존 신고하려고 연락했어요. 교수님도 잘 지내시죠?]

“어, 그래. 사흘 됐나?”

[……지난주 목요일이니까 나흘이죠. 며칠 지났다고 그걸 헷갈려요?]

“아, 요즘 좀 바빠서 정신이 없네. 별일은 없지?”

[네, 방학이라서 갈 데도 없고, 혼자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교수님은…… 보스 잘 보필하고 계세요?]

“응, 나야 괜찮지. 컨디션도 좋아.”

나 대신 서연희가 답하자 유해빈이 물끄러미 내 방 안을 둘러본다.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침대에 앉아있는 서연희를 본다. 그리곤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이건 뭐…… 완전히 신혼살림을 차리신 것 같은데.]

“어머, 아직 그 정돈 아니야.”

“7월에는 이대로 대기하고, 바쁜 일 끝나면 너랑 한 번 봐야겠네. 내가 나중에 너 번호로 연락할 테니까.”

[……왜요?]

“두 번째 연구, 그거로 이유 대면 괜찮을 거야.”

마력 속성에 관한 연구. 유해빈이 데이터를 제공해줬다고 알려졌으니 대놓고 만날 구실이 될 수 있겠지. 그러자 유해빈이 작게 답한다.

[……알겠어요. 그러면 저 들어가 볼게요. 보스랑 알콩달콩 시간 보내세요.]

그리곤 통신이 끊겼다. 조금, 아니, 좀 많이 걱정스러워 나는 서연희에게 물었다.

“애가 요새 매번 볼 때마다 기분이 저기압인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그렇게 답한 서연희는 얕게 한숨만 내쉬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러 어느새 오후 세 시에 다다른 시각.

책상에 어질러져 있던 연구 자료를 정리하며 일어서자 서연희가 묻는다.

“지금 가려고?”

“네, 빨리 다녀올게요.”

오늘은 갈 데가 있었다. 지난 삭월에 침입한 이후 처음 방문하는 장소. 심가였다.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서로에 대한 걱정을 담아 서연희와 인사를 나눈 나는 현관을 나섰다.

최근에 일이 있어 당분간 오라고 못 하겠다던 심이수의 연락. 외부인을 다시 들인다는 건 심가 내부적으로 사태를 수습했다는 거겠지.

무슨 대책을 어떻게 세웠을지, 그걸 알아봐야 했다.

***

“오랜만이네, 선배. 오면서 날씨 되게 더웠지?”

“좀 그렇긴 하더라.”

저택으로 들어온 이도진을 맞이한 심이수는 그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테러조직 팬텀의 침입 이후 외부인을 일절 받지 않고 열흘. 그동안 저택 내부 설비의 대대적인 점검이 있었고, 사건 정황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입단속도 철저히 했다.

팬텀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은 요원했으나 그 외에는 정리가 됐고, 그러자마자 이도진을 부른 것이었다.

팬텀이 장생종의 시신을 훔쳐갔지만…… 오히려 이전보다도 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심이수 자신에게는.

“어르신은?”

“할아버지? 선배 왔다고 하면 나와 보시기는 할 텐데, 추천은 못 하겠네. 요즘 이래저래 걱정도 많으시고, 건강도 좋지는 않으셔서. 내일 시연회는 참석하신다고 하니까 그때 인사드려.”

“너도 와?”

“나도 가지. 얼마나 멋지게 발표하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줄게.”

살갑게 이도진과 대화하며 심이수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겠지?’

팬텀의 침입으로 그녀가 특히 의문을 품은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어떻게 놈들이 심가 내부의 결계를 그토록 쉽게 돌파할 수 있었는가.

두 번째, 비고에서 장생종의 시체를 훔쳐 달아난 건 애초에 그게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한 일이었는가.

두 번째 의문은 별론으로 두고, 첫 번째 의문에서 방조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가 내부의 동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마력적인 결계에 대단히 능통한 사람.

그런 자가 팬텀에 정보를 건네줬다면 최소한 첫 번째 의문만은 어느 정도 풀리게 되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야.’

지금 보니 이도진은 역시나 아닌 듯했다.

그가 뛰어나긴 하나 저택의 결계를 그 정도로 잘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테러조직 따위에 협조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고.

가능성은 크게 둘이겠지.

팬텀의 보스인 장생종과 두 번째 서열의 남자가 지극히 뛰어난 존재여서 외부의 정보 없이 결계를 돌파했든지.

이도진이 가진 정보 수준이 아니라, 그런 재능의 크기조차도 뛰어넘을 정도로 정보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예전부터 심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내부자의 소행이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이도진을 팬텀의 협력자로 보긴 어렵고, 의심을 거둔 심이수는 그와 사교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가늠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영원 길드 행사, 선배 갔다던데.”

“그랬지?”

“이거 좀 궁금해서 그런데, 실례인 거 알지만 그냥 대놓고 물어볼게. 그, 한세라 씨랑…… 뭐 어떻게 되는 거야?”

여론은 반반이었다.

창립일 행사에 참석할 정도면 파혼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이 절반.

길드 행사에 참석은 했으나 그 후 한태강과 이도진이 독대한 자리에서 큰 소란이 있었다는 소문과 함께 파혼은 확정된 것과 다름없다는 추측이 절반.

심이수로서는 당연히 후자 쪽이 좋고, 안색이 어두워진 이도진이 말한다.

“들리는 말이랑 별 차이 없을 거야.”

“그래?”

애매하게 들리는 대답. 하지만 얼추 가닥이 나왔다.

‘파혼 안 하는데 저런 표정 짓지는 않을 거니까.’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도진이 필요하기에 내심 환희한 심이수는 그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예쁘게 핀 꽃들. 각자 색깔이 다른 수국. 어머니를 추억하며 마련해둔 공간을 거닐며 그녀는 다짐했다.

‘할 수 있어.’

누가 됐든.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

그날 오후 열 시경.

이도진도 저택을 나선 지 오래고, 늦은 밤이 되어 심이수는 호출을 받았다. 심정웅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조용히, 시선에 밟히지 말고 오거라.>

“네, 금방 갈게요.”

그녀는 가뿐한 걸음으로 심정웅의 거처를 향해 나아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는 달이 제법 밝게 떠 있다.

그걸 기껍게 여기며 그녀는 심정웅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를 생각했다.

‘또 그거겠지.’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금제.

가혹한 실험.

그 모든 것을 견뎌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창자가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운 약과 독약.

한 달에 몇 번쯤, 심이수는 그런 사안을 심정웅에게 점검받고 보고해야 한다.

지난번이 팬텀의 침입 이전이었으니 상당히 늦어진 것이고, 심이수는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의심할 필요가 없는데도 의심을 하는 거지.’

혹여나 다른 마음을 먹고 있을까 경계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삭월이 지나고, 달이 절반을 훌쩍 넘길 정도로 차올라 그녀의 힘이 형편없이 약해졌을 지금에야 부른 거겠지.

늙은 얼굴에 그득한 욕심을 조롱하며 심이수는 목적지에 당도했고, 장생종의 시체를 빼앗긴 뒤로 두문불출하다시피 하던 노인이 그녀에게 일렀다.

“들어오거라.”

“네, 할아버지.”

두 사람은 목조 건물의 가장 깊숙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래도 남겨져 있다. 팬텀이 훔치지 못한 장생종의 시신.

이미 써버린 한 구와 빼앗긴 세 구를 제외해도, 그래도 한 구는 남아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보던 심정웅이 손녀에게 물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많이 찼더구나. 오늘은, 몸은 좀 어떠한고.”

심정웅에겐 진리 같은 법칙이다.

심이수는 달이 차오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약해지고, 몸을 가누기를 버거워한다고.

오늘 같은 날이라면, 만에 하나라도 금제를 벗어나서 그를 공격할 수 없다고.

심이수가 답했다.

“네, 뭐, 괜찮아요. 정신도 맑고, 몸도 개운해요.”

“무어…….”

의문스러워하던 심정웅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콰악-!

단숨에 그에게 접근한 심이수가 주름진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커…… 어억-!”

비명조차 내지 못해 새어 나온 것에 불과한 음성. 경악에 찬 시선이 심이수를 향한다.

어떻게 지금 이런 힘을.

어떻게…… 그녀를 실험체로 쓰며 걸어둔 금제가 통하지 않는 건지.

그런 노인을 즐겁게 바라보며, 눈동자를 붉게 빛낸 심이수가 노래처럼 일렀다.

“오늘은 달이 많이 떠 있어서…… 기운이 아주 쌩쌩한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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