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Chapter 32. 시연회 (3)
괜한 허세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 물론 여태까지는 심정웅이 알고 있던 게 맞았다.
심이수. 그녀는 달이 뜨지 않을 날엔 비견할 자가 드물 정도로 강하나 반대로 하늘에 달이 조금이라도 떠 있다면 크게 힘을 잃었고, 그런 약화는 달빛이 강해질수록 두드러졌다.
그러니 만월까지 닷새밖에 남지 않은 오늘, 설령 금제를 깨더라도 자신과 맞설 순 없다는 노인의 짐작은 타당했지만…… 불행히도 그건 얼마 전까지만 통용되던 이야기였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거든요. 그 여자 피 좀 얻었다고…… 제가 ‘진짜’ 장생종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7월 10일. 달이 뜨지 않은 삭월부터 상황이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팬텀의 보스와 맞서 싸운 심이수는, 그녀의 피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근원부터 변모하고 있음을 또렷이 감지할 수 있었다.
장생종의 피와 장기와 살점을 삼키고, 뼈를 갈아 마셔 억지로 얻어낸 힘 따위가 아니다. 달빛에 극히 취약해 의지대로 다스릴 수 없는 힘 따위가 아니다.
팬텀 보스의 가슴께를 찔러 피를 흡수한 그 순간, 인간 심이수는 마침내 온전한 장생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삭월에 힘을 발휘하는 게 극심한 부담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팬텀을 순순히 돌려보냈다.
심정웅이 걸어둔 금제는 이제 어떤 장애물도 아니게 됐다. 그래서 그를 공격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잖아요? 조건이 안 맞으니까. 억지로 제 몸에 들이부은 틈으로 건 금제인데, 저는 확실히 장생종이 됐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할아버지 목 조르고 있어도…… 글쎄요, 딱히 거부감은 안 드는데요?”
“커윽…… 으읍-!”
목이 졸려 호흡조차 하기 힘든 심정웅이 눈을 부릅뜨며 핏발을 세운다. 당혹감과 분노 같은 감정이 그 눈에 비치나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것도 몇 가지 읽어낼 수 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
자신은 얻지 못했는데, 고작 실험체에 불과한 아이가 얻었다는 데서 기인한 시기와 부러움.
심이수는 노인을 똑바로 마주하며 조롱하듯 일렀다.
“많이 부럽나 봐? 말라 비틀어진 송장 주제에.”
그녀는 자유로운 왼손을 휘둘렀다.
쉬이익- 서걱!
발버둥 치던 노인의 사지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마력의 칼날이 그의 팔다리 근육과 힘줄을 모조리 끊어낸 것이다.
“끄윽…… 끄흐으으……!”
심정웅이 고통에 겨워했으나 목을 단단히 붙잡힌 탓에 큰 소리는 낼 수 없었다. 기실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해도 마력적인 방음에 가로막혀 밖으로 흘러나가진 못했겠지만.
“시끄러워요.”
핀잔처럼 말한 심이수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고통이 선명히 배여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이 우스꽝스러운 꼴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안 그래도 골골한 늙은인데, 내버려 뒀다간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네.’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라 그녀는 다시금 손을 휘저었다.
슈우우…….
심정웅의 사지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점차 멎어간다. 그러나 간단한 지혈 마법일 뿐 상처 자체가 나은 건 아니고, 노인의 육체와 마력을 무력화한 심이수는 그를 질질 끌고 몇 미터를 여유롭게 걸어갔다.
이내 다다른 곳은 샅샅이 그러모으면 겨우 한 구쯤 나올까 싶은 장생종의 시체 앞. 그것들을 고통에 겨워 꿈틀거리고 있는 노인에게 던져두고…… 아주 차갑게 명령했다.
“먹어.”
“으…… 으으…….”
먹으라는 말.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했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다. 심이수는 벌벌 떨기만 하고 답하지 않는 조부를 내려다보며 서운해하듯 물었다.
“할아버지 참 이기적이시네. 저 시킬 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감시하더니, 정작 본인이 하는 건 싫나 봐요?”
“이, 이수야……. 이러지 말렴. 나는 너와는 달라, 너처럼 건강하지 않다. 도저히 그걸 버텨낼 수가-”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까 안심하고 빨리 처먹기나 하시라고요. 안 하면, 어차피 죽어.”
“끄흑, 으으…… 아, 아아…….”
심정웅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는 소리를 냈다. 단지 명령에 따르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아서 그런 게 아니다. 이 방식으로 소모하면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짐을 알기에. 그게 너무도 원통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부지런히 데이터를 모으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서, 그런 다음 시행하려 했건만…….
이따위 조악한 방법으론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해왔던 걸 절대 얻지 못한다. 노화와 수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장생할 수 없다.
기껏해야 매 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반편이가 되겠지. 손녀가 지난 수년을 그래온 것처럼.
“딱 십 초 더 기다려드릴게요. 피부터 마셔요.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알겠다.”
심정웅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 비통함, 그런 것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그래야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예상보다 월등히 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한 노인을 응시하며 심이수는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꼴에 옛날엔 영웅인 척 행세하고 다녔다고, 생각보다는 침착하네.’
노인이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었다. 검붉은 피가 담긴 플라스크를 쥔다. 그리고…… 그걸 제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핏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참기 힘든 역겨움이 치밀었다. 몸을 덜덜 떠는 그를 향해 심이수가 경고했다.
“토하지 마요. 하나씩, 바닥이 보일 때까지 전부 마셔요.”
“끄흐윽…….”
노인이 지친 기색으로 바닥이 드러난 플라스크를 내려놓았다. 심이수는 그의 등에 손을 얹고 마력을 보냈다.
스으으으…….
방금 마신 장생종의 피. 그것이 동화 계통의 마법으로 융해되어 심정웅의 육신에 퍼지듯 스며든다.
이젠 단순히 액체를 들이켰다 할 수 없다. 노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피와 결합해, 그 성질을 점차 바꿔나간다.
심정웅의 주위로 붉은 안개가 일렁였다. 인간으로서 지닌 피가 장생종의 피에 자리를 빼앗겨 기화하는 현상이었다.
“으음…… 끄으…….”
아까 팔다리 근육이 끊긴 것과 비교도 못 할 고통이 밀려옴에도 노인은 나직한 소리만 내며 참았다. 받아들이겠다 결심한 이상 더 추태를 보일 순 없으니까.
두려운 것은 오로지 하나. 늙은 육신이 버티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그게 걱정일 뿐이다. 한데 바로 그때.
“허억……!”
노인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심이수가 또 한 번 마력을 운용한 것이다.
‘이건…….’
열기에 들끓어 오르던 체온이 가라앉아 간다. 놀란 눈길로 올려다보니 손녀가 피식 웃으며 이른다.
“제가 다 생각이 있다고 했죠?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마셔요. 많이 남았잖아요?”
“…….”
의도적으로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인 그는 남은 피도 하나씩 마셔 나가며 생각했다. 심이수가 부작용을 억제해줄 때마다…….
‘복속되고 있는 게야.’
원리를 정확히 알 순 없다. 팬텀의 보스와 싸우며 얻은 힘으로 그의 육체에 어떠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만 파악할 수 있었다. 피를 마실 때마다 점차 강해지고 영역을 넓히면서.
그걸 알면서도 노인은 저항할 수 없었고, 마지막 플라스크까지 바닥나자 손녀가 칭찬하듯 손뼉을 쳤다.
“와, 잘하셨어요. 피는 다 드셨고…… 이다음은 뭘 하셔야 하는지 아시죠?”
“……그래.”
지금까지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이 천 년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그의 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장생종의 피도, 살점도, 뼈도, 내장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노인은 용솟음치는 힘을 여실히 느꼈다. 손등에 쭈글쭈글하던 주름이 어느새 많이 펴져 있다.
‘기운이 나는구나…….’
그야 이전의 손녀와 같은 상태가 되었으니 달이 환한 오늘은 부담이 막심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금껏 힘겹게 이끌어온 노구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천리안’ 심정웅.
그가 무력적으로 가장 강했던 시기는 36 영웅이 악마와 싸웠던 때보다도 과거다. 사십 대 무렵, 육체와 마법의 양대 축이 서로를 보조해줄 수 있던 시기.
그 후로 마법 쪽은 조금씩이나마 더 강해졌으나 육체는 날이 갈수록 노화했고, 전자의 득보다 후자의 실이 컸던 탓에 그는 세월이 갈수록 더 약해지기만 했다. 분명 그래왔는데…….
‘지금은 아니야.’
한 세기에 가깝게 단련해온 마학. 거기에 육체의 활력이 더해졌다.
해서 심정웅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서도, 필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강하리라고.
“너무 좋아하진 마세요. 할아버지도 느끼고 계시죠?”
“알고 있단다.”
심정웅은 담담하게 답했다. 이 상태는 그리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아무리 심이수가 부작용을 중화해줬다 한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길어봐야 한두 달일까. 그 안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몸이 산산이 터져 죽어버리고 말겠지.
“그것도 있고, 제 말도 잘 들으셔야 하고요.”
이 또한 명확했다.
심이수가 행사한 정체 모를 지배력. 그것이 그의 육체와 정신에 작용하고 있다.
그가 걸었던 금제보다 강력한 힘. 노인은 손녀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어떠한 일도 행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사전 작업을 마친 심이수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근데 할아버지, 제가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무엇인고.”
그녀는 새빨간 눈으로 노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왜, 맨 처음 저한테 말씀해주신 거요. 할 수 있으니까 저도 협력해달라고 하셨던 거. 그거…… 혹시 거짓말하신 건 아니죠? 방법만 갖추면 할 수 있는 거죠? 제가 여러 번 여쭤봤는데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신 적은 없잖아요?”
심정웅은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개새끼-!”
퍼억!
욕설과 함께 날아간 주먹. 사납게 피가 튀고 노인의 코뼈가 잘게 부서지며 내려앉았다. 가늠할 수 없는 분노에 씩씩거리며 심이수는 쓰러진 조부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다시 물었다.
“진짜 거짓말하신 거예요? 아니죠? 한 번은 봐 드릴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요.”
사실은 예감하고 있었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속인 것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협력했고, 금제에 걸린 탓에 강하게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 결과가 이토록 참담하게 돌아와, 심정웅이 답한다.
“지금 말한 것이 진실이니라.”
“닥쳐!”
퍼억! 콰앙! 퍼어억!
무자비한 폭력이 심정웅을 향했다. 저항하지 못하는, 어제보다 십 년은 젊어진 듯한 노인이 땅을 기었고, 심이수가 경멸스러워하는 어조로 말한다.
“할아버지, 난 당신을 알아.”
“무……엇을……?”
“당신은, 자랑스러워해.”
문득 노인의 눈에 격동이 스친다. 그걸 예리하게 간파한 심이수가 말을 이었다.
“오래 살길 원하면서, 남들 안 들키게 구린 짓을 많이도 해가면서, 그러면서도 영웅으로 살았던 과거를 그리워해. 아, 나도 그랬던 때가 있다, 세상을 위해 싸운 적이 있었다, 지금 이 모습만이 내 전부는 아니다, 나도, 나도 그런 면이 있다, 그렇게 같잖은 변명을 해대는 거야. 내 말이 맞지?”
“그럴지도…… 모른다.”
끊길 듯이 되뇐 인정. 심이수가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 선은 안 넘으려고 해. 이미 쓰레긴데, 그래도 완전히 막 나가면 영웅이랍시고 다녔던 과거에까지 똥칠을 해버리는 것 같으니까, 그건 싫은 건지 이상한 데서 주저해. 나를 그냥 잡아다가 실험체로 쓰지 않고 속이면서 이용한 것도, 그 알량한 자기변명 때문이지?”
“……네 말이 옳구나.”
자괴감 어린 긍정.
심이수가 틈을 노리듯 일렀다.
“근데 할아버지, 난 그것도 알아요.”
“무얼 말이냐.”
“나를 이용하려고 한 말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잖아?”
“……!”
“방법이 있기는 한데 차마 실행에 옮길 순 없고, 그래도 방법이 있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고, 혼자 그런 계산을 하면서 날 데려다 쓴 거 아니야?”
심정웅은 답할 수 없었다.
심이수가 묻는다.
“다시 물을게요, 할아버지. 이게 마지막 기회야. 방법, 사실은 있는 거지?”
심정웅이 느리게 답했다.
“있을지도…… 그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죠? 그치, 할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요.”
심이수가 환하게 웃었다. 행복과 기대로 가득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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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화요일, 오후 한 시 정각.
시연회를 위해 단상에 올라간 내 시야에, 돌연히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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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3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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