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Chapter 33. 비겁자 (1)
테러조직 팬텀과 보스인 장생종. 워낙 비밀스러운 자들이라 단서를 찾기 어려웠는데…… 심정웅이 기어이 뭔가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한태강은 주위의 시선을 살피며 마법적인 음성을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정해두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답한다. 오후 열 시에 자신이 말하는 곳에서 만나자고. 이전과 달리 심가 내부가 아니었다.
<확실치는 않네. 하지만 내 예상이 옳다면…… 자네와 나는 오늘 놈들의 은신처를 발견하게 될 거야. 행여나 정보가 새면 헛수고가 될 수 있으니 우선은 둘이 가보기로 하세. 싸우게 될지, 원군을 부를지, 그런 문제는 차후에 생각해보고.>
<네, 어르신. 그러면 밤에 뵙겠습니다.>
<부디 신중히 행동하게나. 놈들의 정보망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나도 알지 못하네.>
노인에게 목례로 인사한 한태강은 회장을 빠져나갔다. 이른 퇴장에 참석자들이 아쉬워하며 배웅했고, 수행원들과 차에 타려던 그때.
“오늘……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뒤따라 나온 이도진이 전한 말. 감사보단 죄책감에 더 가까운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던 한태강이 짧게 답했다.
“고생했다.”
“……네.”
파혼 서약이 어쩌니 재촉하는 말을 꺼냈다면 참지 못해 주먹이 날아갔겠지. 하지만 저 괘씸한 놈은 단지 미안해할 뿐이다. 저럴 거라면 왜…… 도대체 왜…….
차마 묻지 못한 의문을 마음으로 삼킨 그는 집에 도착했고, 길드에서 맡은 업무가 갈수록 늘고 있는 딸아이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전화를 해보니 밤에나 올 거라고.
한태강은 이후 바깥에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심신을 가다듬었다. 육신과 마력의 완벽한 통제. 칼날처럼 벼린 정신과 감각.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싸우게 된다면 필시 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맞이한 오후 열 시경.
“왔는가.”
흉험한 공기가 감도는 야산 어귀에 서 있던 심정웅이 그를 맞이했다. 한태강은 무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알기로 심정웅은 장시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물론 어지간한 자들은 어렵잖게 상대하겠지. 하지만 명성과 실력에 걸맞은, 이른바 36 영웅 수준의 싸움이라면…… 길어봐야 십여 분이 한계일 터였다. 그의 염려에 노인이 헛헛한 웃음으로 답한다.
“미리 대비해둔 것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슬슬 가보세.”
두 영웅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야산에 올랐다. 나란히 걸으며 심정웅이 말한다.
“짐작은 했겠지만 근래 본가에 소란을 일으킨 게 팬텀 그자들이었네.”
“역시 그랬군요.”
“총 넷이었네. 놈들의 수장과 이인자, 또 두 명이 더 있었지. 본가에서도 제법 큰 손해를 봤으나 얼추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이렇게 흔적까지 파악해낸 것이라네.”
“놈들이 침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르겠네. 무언가 노리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 알아낼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산 중턱에 도착해 호흡을 정돈한 그들은 다시 나직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도진 군과 자네 딸아이는 곧 서약을 끊어야겠구먼.”
“…….”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화제. 한태강이 침묵하자 노인이 재차 감탄한 듯이 일렀다.
“정세빈이도 대단하지. 그만한 마법을 무려 여섯 사람에게 작용하도록 구성하고 본인이 죽은 후에도 효력이 지속된다는 걸,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정세빈’이니까 가능했던 일입니다.”
기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 당사자가, 서약이 유지되고 있는 한에는 서로를 위한 일에서 본래 가진 것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네 명의 입회자가, 서약이 유지되는 한엔 그 힘을 충당해주는 것.
약혼 기간을 마치고 계약 당사자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 관계를 형성하면 그 효과는 더욱 강해지게 된다. 이제 입회자 넷은 자리를 비키고 두 사람의 힘으로써.
그러면서도 감정과 정신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계약 당사자들이 오로지 순수한 결정만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해당 마법을 구성한 정세빈 자신의 사후에도 전혀 손상이 없었다는 것. 실로 아득할 정도의 위업이었다.
심정웅이 궁금해하듯 묻는다.
“한 대표 자네는 그 원리를 아는가? 계약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축이 죽음으로 이탈했음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시행한 사람은 세빈이니까요. 저와 제 아내, 시혁이는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그래도, 지금도 그 서약은 유지되고 있지 않나.”
“그것은 그렇습니다.”
원리를 알건 모르건 서약 마법은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 머지않아 무효로 돌리겠지만…… 당시 여섯 사람이 행복하게 웃었던 흔적은 여태 남아있다. 세 사람이 죽고서도, 남은 세 사람에게는.
그즈음 해서 한태강과 심정웅은 산꼭대기에 발을 들였다.
“자네 보이나?”
“네, 저깁니까.”
“아마도 그런 듯싶으이. 인기척이 있구먼그래.”
울창한 수풀에 가려진 오두막. 저 안에…… 누군가 있다. S급 각성자를 가뿐히 넘어선 힘을 가진 자가.
심정웅이 중얼거렸다.
“마침 나오는구먼.”
끼익-
오두막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드레스에 챙이 넓은 모자. 키가 훤칠하게 컸다. 그녀를 눈여겨본 한태강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자가 맞는 듯합니다.”
팬텀의 보스. 그녀가 능력을 개방할 때 파악했던 것과 같은 힘을 흘리고 있다. 입고 있는 옷과 외견도 비슷했고.
“달이…… 밝구먼.”
심정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만월이라곤 할 수 없으나 그에 상당히 근접할 만큼 밝은 달. 그러나 한태강이 힘주어 일렀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어르신은 도주를 막아주십시오.”
장생종이 달이 밝은 날일수록 강해진다는 건 심정웅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자리에 영웅 두 사람이 있다. 악마의 군주라도 강림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
콰아아앙-!
땅을 박차고 쇄도한 한태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목표는 팬텀의 보스.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가 방어했지만-
터어엉!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넘게 튕겨 나가며 입으로 피를 토한다. 첫 기습부터 유리한 싸움이었고, 적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초일류 마법사이자 가장 오래 산 영웅, ‘천리안’ 심정웅이 결계로 산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스으으으으-
팬텀의 보스가 전신으로 붉은빛을 뿜는다. 한태강은 경계하되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를 추격해나갔다.
‘저게 장생종으로서 지닌 힘이겠지.’
경매장에서 도주할 때 보여줬던 능력. 그 당시보다 월등히 유리하니 필요 이상으로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여성을 타격하려던 그 순간.
터억-
한태강은 뭔가 걸리는 감각을 감지했다. 몸이, 아주 미세하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
한태강의 반응은 빨랐다. 양쪽 발에 마력을 모아 땅을 밟으려 했다. 산산이 부서질 지반 틈으로 자신은 이곳을 벗어나고, 적은 행동에 제약에 생길 터였다. 하지만…….
영웅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대처를 보여준 그보다 적이 더 빨랐다. 팬텀의 보스와…… 심정웅이 더 빨랐다.
콰악!
어깨가 욱신거리는 통증. 피가 튄다. 팬텀의 보스가 도망치려는 그의 상체를 내리친 것이다. 이어진 등의 격통.
퍼어억!
뒤로 접근한 심정웅이 날카로운 창 형태의 마력을 꽂아냈다.
쿠아아아아아앙!
한태강은 온 힘을 다해 등 뒤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터어억-
둔탁한 소리가 나며 심정웅이 몇 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파악한 광경.
‘타격이…… 없다.’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노인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한태강이 아는 그라면 아무리 방어했다 한들 있을 수 없는 일. 이어서 놀랄 만한 이변이 드러난다.
‘젊어 보이는군.’
심정웅의 안색에 활력이 넘친다. 항상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다. 이윽고 노인이 탄식하듯 일렀다.
“한 대표, 미안하네. 태강아, 네게 정말로 미안하구나…….”
한태강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경지에 달한 통찰력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도망칠 확률은 희박하다. 산에 둘러쳐진 결계, 그 외에 알지 못하지만 존재할 수단까지. 도주는 되려 패배의 지름길이다.
‘맞서 싸운다면…….’
승산은 높지 않다. 팬텀의 보스만 해도 그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강자이건만 젊은 시절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게 된 듯한 심정웅까지 상대해야 한다. 이겨낼 방법은 많지 않겠지.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
이 나라의 수호신이자 악마의 군주조차 쓰러뜨린 영웅. ‘무신’ 한태강은 그따위 열세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양방향에서 포위해오는 심정웅과 팬텀의 보스를 향해 강인한 어조로 말했다.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오시지요.”
짝, 짝, 짝…….
천천히 울리는 박수 소리.
팬텀의 보스가 손뼉을 치고 있다. 그녀가 즐거워하며 말한다.
“좋아요, 영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이게 진정한 영웅인가 보네요. 그렇죠,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는 말. 한태강이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기 전에 팬텀의 보스가 모자를 벗어낸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 몇 시간 전에 본 적이 있는 낯이다.
‘심이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심정웅의 손녀이자 시연회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한 여성. 어떻게 된 걸까.
처음부터 팬텀의 보스가 그녀였을 가능성. 팬텀의 보스인 척 가장하고 이곳에 끌어들였을 가능성. 어느 쪽이든 황당한 일인데.
심이수가 노인에게 묻는다.
“아, 할아버지. 그건 어떻게 됐어요?”
격전을 각오하면서도 한태강은 심이수의 말에 집중했다. 뭐라도 단서가 있을까 하고. 한데……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그 약혼 서약, 죽은 뒤에도 효과 쌩쌩한 거, 뭐 아는 게 있대요?”
“듣지 못했다.”
“흐읍-!”
심정웅이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한태강은 주먹을 날렸다. 가능한 한 침착하려 했으나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저들이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왜 약혼 서약을 궁금해하는 걸까. 그건 딸아이와 이도진의 일인데.
격분에 찬 공격을 심이수와 심정웅이 막아낸다. 한태강은 자신의 영혼에 맹세하듯 그들에게 선언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 애들에게는 손을 못 댈 거다.”
“와, 이거 봐요. 못마땅해하는 척만 한 거지 실은 그 선배 되게 아낀다니까요?”
“그런 것 같구나.”
심이수가 흥얼거리듯 말한다.
“그래도……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한 대표님은 자세히 모르신다니까, 세 사람 전원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걸요?”
콰아아아아-!
전신에 마력을 불길처럼 두른 한태강이 심이수를 향해 걸었다.
스아아아아…….
심이수의 뒤로 새빨간 눈동자가 피처럼 붉은 마력을 일렁인다.
위유웅.
심정웅이 초고도의 마법을 거듭해 펼치며 이어질 싸움을 준비한다.
격돌까지 일 초. 한태강은 딸아이와, 너무나 괘씸하지만 그런데도 미워할 수는 없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애들을 지켜내야 했다.
남은 생에 해야 할 일. 아내와 아끼던 후배 둘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영웅이 주먹을 내뻗었다.
***
몽롱한 감각이 든다. 시야가 흐릿하고, 손에 힘을 줘도 제대로 잡히는 게 없다.
소리가 윙윙 울린다. 몸이 무겁고, 시선에 와닿는 모든 것들이 뿌옇기만 했다.
그러길 조금 지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꿈이네. 그렇게 단정할 만한 근거가 있다.
“응? 갑자기 왜 멍하니 있어?”
나와 함께 걷고 있던 사람. 중학생처럼 앳된 모습에 제일중 교복을 입은 세라가 궁금해하며 묻는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악몽 중 하나. 지금 그걸 꾸고 있는 거라고.
세라가 편안한 표정으로 내게 제안한다.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