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39화 (139/207)

#139화. Chapter 33. 비겁자 (4)

“하아, 하아…….”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서 온 신경을 집중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진아…… 아직, 전화 안 끊고 있어?>

억지로, 있는 힘껏 울음을 참는 말. 나는 겨우 답했다.

“응, ……들려. 말해. ……왜?”

기실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세라가 무슨 말을 꺼낼지. 너무나 고통스럽고, 지금 당장 귀를 닫아버리고 싶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이윽고 세라가 내게 말했다.

<엄마가…… 너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바꿔 드릴게.>

이후로 이어진 대화를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세라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태강을 챙겨 달라고, 세아를 잘 보살피라고, 그리고…… 씩씩하게 살아가라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로 올리비아 윈이 내게 전했다.

<후…… 후우…….>

그녀의 숨결이 서서히 잦아든다. 세라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한태강이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잘해나가겠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잠시 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리 중에서…… 두 가지가 멎었다.

삐이, 삐- 하며 위태롭던 기계음.

올리비아 윈의 가느다란 숨소리.

그다음이 어땠는지……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세아가 들을까 숨을 죽이고 울었던 것만 기억한다.

이제 풍경이 바뀐다. 이 악몽 속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을 지나, 꿈이 막바지로 치달아간다.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정한 거긴 할 거고, 그래서 여태 이유는 안 물어봤는데…… 정말로 말 안 할 거야?”

올리비아 윈의 장례식에서 마주친 서연희가 내게 묻는다. 나는 그녀에게 반문했다.

“뭘요?”

“한태강한테 말하면 안 된다는 거.”

당연히 들 수 있는 의문이다. 대균열을 일으킨 자들은 내게 철천지원수이자 반드시 복수해야 할 대상. 하지만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니니까.

대균열의 영향으로 병세가 나빠진 올리비아 윈의 남편과 딸, 한태강과 세라에게도 그자들은 죽음으로서 갚아야 할 원수다.

그 사실을 내가 숨기고 있는 건 두 사람에 대한 기만이고, 정황을 얼추 아는 서연희가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네가 하는 일이니까 타당한 이유가 없을 거라곤 생각 안 해. 그래도 그 애들한테도 그렇고, 너도 그런 거 혼자 꽁꽁 붙들고 있으면 계속 더 힘들 거야. 앞으로 안 볼 것도 아니잖아?”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당연히 걱정하지.”

서연희가 조금 서운하다는 듯이 답한다.

한태강과 세라에 대한 기만. 그건 물론 잘못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속이는 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힘들 거라고.

“여하튼 이제라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태강을 끌어들이면 전력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고.”

평소였다면 적당히 둘러대며 화제를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서연희에게조차 오래도록 숨겨왔던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면 아저씨가 죽어요.”

“뭐?”

“죽는다고요. 무조건.”

“그거, 네가 ‘아는’ 거?”

“네.”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대균열과 관련한 진실을 ‘무신’ 한태강이 알게 될 시에 그에게 미칠 영향

-답변: 필사(必死)

-추가정보: 추후 답변이 변동될 수 있으며 특정 가능한 시기에 질문자 이도진에게 고지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서연희가 묻는다.

“……넌 언제부터 알았는데?”

“오래됐어요.”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게 아니니까. 한태강에게 알리지 않는 건 용서 받기 어려운 기만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새로 주관식 질문 권한을 얻자마자 알아봤다. 내가 진실을 알리면 한태강이 어떻게 될지.

무턱대고 말할 순 없으니까. 이미 한 번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저질러버렸으니까.

그리고, 홀로그램이 제시한 답은 필사(必死). 그걸 알리면…… 한태강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서연희에게 다짐을 받듯이 일렀다.

“그래서 아저씨한테는 말 못 해요. ……세라한테도요.”

“세라도 위험해지니?”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밖에 없었다. 한태강에게만 알리든지. 그와 세라 둘 다 모르게 하든지.

“만약 아저씨한테 알린다 해도,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세라는 모르게 하자고. 근데 아저씨한테도 말을 안 하는데, 세라한테만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나는…… 죽어도 그렇겐 못 해.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내가 가장 잘 아는데, 세라한테까지 나랑 같은 짐을 지우는 게, 나랑 같은 고통을 겪게 하는 게…… 어떻게 그래?

“너…… 아직 세라 좋아하지?”

“……의미 없잖아요.”

내가 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지키고 싶은지,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 세라는 모르는데. 몰라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 아프게 할 일만 넘쳐 날 텐데.

“아휴…….”

한숨을 쉬던 서연희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금색 케이스를 내민다.

“한 대 피워볼래?”

“……여기 장례식장이에요.”

장소를 떠나서 피워본 적도 없고. 하지만 산뜻한 말투로 서연희가 재차 묻는다.

“그러면 술은 어때? 곧 새해면 너도 성인이니까, 둘 다 변장해서 밖에서 한 번 만나. 그래도 나한테는 속상한 거랑 힘든 거 조금은 털어놓을 수 있잖아?”

“그건 뭐…… 그때 가서 보고요.”

“아마 그때 담배도 배울걸?”

생긋 웃으며 말한 서연희가 다시 장례식장 쪽으로 걸었다. 며칠이 지나 맞이한 새해, 그녀의 말은 예언처럼 꼭 맞아떨어졌고.

꿈이 장면을 바꾼다.

이후로 나는 세라와 한태강을 줄곧 상처를 주며 살았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스물세 살.

<정말 이렇게, 계속 이따위로 살 테냐?>

<……죄송합니다.>

<도진아,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

<……미안해.>

스물네 살, 스물다섯 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라.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너…… 나 좋아했어?>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어.>

이제껏 꿔왔던 악몽이 끝나고, 기억 두 개가 더해졌다.

영원 길드의 창립일 행사에서 두 사람과 만난 일.

오늘 시연회에서 한태강과 짧게 나눈 이야기.

그 모든 기억을 이 순간 겪고 있는 것처럼 선명히 실감하며, 나는 구차한 변명을 되뇌었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다 내 잘못이야.

그래도…… 나도 열심히 하려고 했어. 맹세코 내가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그거 몰라줘도 되는데…… 그래도, 나도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야. 아저씨를 죽게 하기 싫었어요. 세라 네가 나랑 같은 고통을 겪는 게 싫었어.

내가 잘했다는 거 아니야. 잘못한 건데, 너무너무 미안한데, 근데…… 그냥,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한테 힘들었다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해주면 안 돼요? 많이도 아니고 딱 한 번만…… 나한테 네 잘못 아니라고 말해주면 안 돼?

그러면…… 한 번만 그렇게 말해주면 나 진짜 괜찮을 것 같은데. 다시는 이런 악몽 안 꿀 것 같은데. 너무 많이 욕심부리는 거겠지? ……나도 알아요. 응, 나도 알아.

“……도진아, 도진아?”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꿈이 아니라, 내 정신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 몸에 따뜻한 온기가 닿는다.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도진아, 일어나 봐. 도진아!”

“………….”

나는 눈을 떴다. 주위가 깜깜했고,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서연희가 바라보고 있다. 걱정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상냥한 손길로 내 머리칼과 목을 쓸어내려 주며 그녀가 묻는다.

“꿈꿨나 보네……. 괜찮아?”

“혹시 저…… 잠꼬대 같은 거 했어요?”

“아니, 별말 안 했어. 그냥 아기처럼 옹알이 같은 거?”

“……그게 더 창피한데.”

우물거린 정도가 아니었겠지. 최근 들어 가장 심하게 꾼 악몽이니 소리가 새어나갔을 거다. 하지만 서연희는 모른 척해줬고, 나도 배려를 받아들여 모르는 체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예요?”

“열한 시 좀 넘었어. 물 가져다줄까?”

“……같이 가요.”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잠시라도 안 보이는 게 싫다는 말은 않고 나는 서연희와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을 연거푸 들이켜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거실 쪽을 살피니 바닥에 책이 내팽개쳐져 있다.

시연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일찍 잠을 청했고 서연희는 거실에 있겠다고 했는데…… 방에서 웬 소리가 들리니 한달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하아…….”

마음을 담긴 감정을 내보내듯 한숨을 쉬자 서연희가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두운 집 안에서 시선이 마주하길 몇 초.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내일은 어디 놀러 갈래?”

“어디요?”

“글쎄? 아침 일찍 나가서 여행처럼 다녀와도 되고, 근사한 데서 저녁 먹는 것도 좋고. 모처럼 쉬는 날이잖아.”

배려해주는 걸 알면 잠자코 고개나 끄덕이면 될 텐데, 나는 멍청하게도 그만 이렇게 묻고 말았다.

“……안 놀랐어요?”

내가 그런 악몽을 꾸는 건 서연희도 몰랐을 거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분명 많이 놀랐을 텐데도…… 그녀가 맑게 답한다.

“글쎄? 그냥, 오늘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는데?”

“그랬어요?”

“응.”

이번에야말로 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마워요.”

“음, 그래? 그렇게 고마우면…… 내일 나랑 놀러 갈 거지? 밥 먹는 것보단 여행이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내일 일어나서 보고요.”

“넌 하고 싶은 거 있는데 입으로 말하기 창피하면 꼭 그러더라? 어때? 가고 싶어?”

나는 말하려 했다. 서연희가 들으면 환하게 웃으며 반길 답을. 하지만 그러기 전에…… 시야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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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3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7월 20일 오후 11시 30분까지 지정된 장소에 단독으로 위치할 것

-클리어 보상: ‘무신’ 한태강의 필사(必死) 조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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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아앙! 콰아아아앙!

워낙 흉흉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야산에 연이어 굉음이 몰아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고 있을까.

빛도, 소리도, 충격도, 결코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한다. 완벽하게 가두어진 공간에서, 한태강은 무겁게 침음하며 되뇌었다.

‘틈을 만들어야 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난 듯했고, 아무리 세계 최강을 다투는 강자라 해도 점차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대하는 적들이 그와 같은 반열에 오른, 36 영웅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이라면.

쿠아아아앙!

한태강이 쏘아낸 권격이 온몸에서 생기를 뿜어내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천리안’ 심정웅. 그가 일순간 수십 번의 손짓을 교차하며 방어 마법을 펼친다.

스아아아아…….

가장 강한 금속조차 가루로 만들어 버릴 공격이 붉은 빛무리에 막혔다. 기이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마법. 역시 심정웅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다.

‘실력이 되더라도 몸이 따라주느냐 따라주지 못하느냐, 그 차이겠지.’

마법사라 해도 최소한의 육체 단련은 필요하다. 똑같이 높은 연산 능력을 지닌 컴퓨터라 해도 사용하기에 따라 용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처럼.

지나치게 노쇠한 심정웅은 그러한 측면에서 극히 불리했으나…… 지금은 그 단점이 말끔히 사라졌다.

‘우리를 기준으로 해도 열 손가락 안에 들겠어.’

과거 전성기 시절의 영웅들을 모아도 10위 안에 당당히 들어갈 무력. 한태강 자신이야 그 정도를 넘어서 한 손가락조차 남음이 있는 실력자니 일대일로 겨루어서 쓰러뜨리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읏차-!”

콰아아아앙!

여유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폭음이 일었다. 심정웅이 막아내고 있던 마력, 그걸 누군가 무척 손쉽게 튕겨 낸 것이다.

퍼엉!

흩어진 마력이 공기마저 산산이 불태운다. 한태강은 남은 전력을 가늠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공격을 대수롭잖게 튕겨 낸 상대, 심이수가 헤헤 웃으며 그에게 말한다.

“대단하네요. 슬슬 힘이 빠져야 정상인데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나 봐요?”

“건방 떨지 마라.”

“아니이, 건방 떠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잖아요? 솔직히 저 혼자 한 대표님이랑 싸워도 질 것 같지는 않거든요. 거기다 할아버지까지 계시니까 지금쯤이면 벌써 이겼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버티시는 거지?”

한태강은 답하지 않았고, 그를 대신해 노인이 경고하듯 일렀다.

“방심해서는 안 되느니라. 태강이 저 아이는 마왕과 단신으로 맞서도 쓰러뜨릴 가능성을 지녔으니.”

“아, 그거요? 그 뭐지, 호흡 세 번으로 기 모아서 때리는 거? 에이, 제가 바보 병신도 아니고 그걸 왜 기다려줘요. 안 맞으면 그뿐이지.”

세 번의 호흡으로 물리적인 힘을 넘어설 수 있다고 알려진 그의 최고 기술. 하지만 저들은 잘못 알고 있다.

‘두 번. 두 번이면 된다.’

세 번이 아닌 두 번. 악마와의 싸움이 끝난 이후로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얻어낸 성과.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거기 걸어볼 수밖에 없다.

“으음…… 이렇게 싸우면 결국 이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너무 오래 끌면 들킬지도 모르고, 이쯤에서 끝내야겠네요. 할아버지, 가능하시겠죠?”

승리를 확신하며 꺼낸 제안에 응한 심정웅이 마력을 겹쳐 모은다. 다섯 겹의 마력을 겹친 복합 마법. 이어서 심이수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한다.

“죽은 자의 의지까지 보존하는 서약. 그게 어떤 원리인지 난 꼭 알아야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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