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Chapter 34. 거래 (1)
“…….”
한태강은 적잖이 위기에 몰린 상황 속에서도 심이수가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 그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죽은 자의 의지를 보존하는 서약…….’
서약이라 하면 틀림없이 한세라와 이도진의 약혼을 뜻하는 거겠지.
죽은 자의 의지는 말 그대로 죽은 세 사람, 올리비아 윈과 정세빈과 이시혁. 특히 그들 셋 중에서도 마법을 주도해 구성한 정세빈의 의지가 지금까지도 유효함을 언급한 것이리라.
‘하지만…… 어째서?’
표면적인 의미야 파악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무슨 의도로, 왜 그 마법의 구조를 알아야겠다는 건지, 마학 방면에 그리 지식이 많지 않은 한태강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될 싸움이고.
“그래도 한 대표님 마음을 조금만 더 편하게 해드리면…… 세 분 모두 당장 죽이진 않을 거예요.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기억만 지워드릴 수도 있으려나? 그건 힘들 수도 있는데…… 아무튼 바로 죽이진 않아요. 셋 다 잡아 들여서 머리통 안에 들어있는 거랑 마력, 뼈와 장기에 피부 한 꺼풀까지 탈탈 털어내고-”
콰아아아앙-!
한태강의 주먹에서 폭발한 마력이 웅혼한 불꽃처럼 터져 나왔다.
상대를 동요시키려는 얄팍한 수작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망발이기도 했고, 해서 그의 공격에는 적을 견제하려는 냉철한 판단과 노화 같은 분노가 함께 실려 있었다.
위유우웅…….
심이수를 향해 들이닥친 마력을 심정웅의 마법이 가로막는다. 게다가 단순히 막은 선에서 그친 것도 아니다.
‘저건…… 설마 그놈의……!’
이도진이 발표한 복합 구성체 이론. 외부의 충격을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삼는 마법. 노인은 지금 그와 유사한 구성체를 불완전하게나마 운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도진의 연구는 B급까지만 발표되었으나 한태강이 쏘아낸 힘은 위력만 강할 뿐 구성이 복잡하지는 않고, 남은 애로사항은 마학의 거두인 심정웅이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기에 가능한 위업.
“받아가시게나.”
단출하게 이른 노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지팡이를 든다.
그가 준비하고 있던 복합 마법.
방금 얻어낸 한태강의 마력.
거기에 또 한 번의 힘을 더해…… 실로 아득하리만치 강력한 마법이 구성되었다.
스아아아아아아아-!
지팡이에 맺힌 마력이 뿜어내는 기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정통으로 맞으면…… 장담할 수 없다.’
다음 순간, 심정웅이 힘차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둥근 공 모양으로 날아오던 마력이 급격히 범위를 넓히며 한태강의 모든 이동 범위를 가두어낸다.
일단 붙잡아놓고 다시 중심점으로 모이며 압착. 제아무리 그가 강인한 마력과 육신을 지녔다 한들 직격당하면 온몸의 뼈가 산산이 으스러지고 말 터였다.
대응할 수 있는 여유는 찰나. 한태강은 힘껏 발을 굴렀다.
퍼어어엉!
서 있던 지반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바스러졌고, 순식간에 수십 미터 지하로 피신한 그는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아아!
수평으로 내질러진 마력이 산의 흙과 돌을 초토화하며 긴 통로를 만들었다. 간신히 마법의 영향권을 벗어난 한태강은 잠시 숨을 죽인 채로 기다렸다.
심정웅도, 심이수도, 내려와서 싸울 작정은 아닌듯한 상황. 하지만 이대로 올라갔다간 저들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에 당하겠지.
한데 다음 순간.
“두더지 흉내예요?”
장난스러운, 조롱하는 듯한 말. 이어서 어깨에 격통이 들이닥쳤다.
촤아아아악!
살점이 크게 뜯기며 피가 터졌다. 기척조차 없이 이 지하까지 이동한 심이수가 그를 공격한 것이다.
당황보단 대처가 먼저. 차라리 잘 됐다 여긴 한태강은 접근전으로 맞서려 했으나…….
퍼엉! 퍼어엉! 쿠과과과광!
지상에서 쏟아진 마탄이 지하 전체를 쉼 없이 타격한다. 심이수에겐 일절 영향이 가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소모한 마력과 부상 정도가 상당한 한태강에게만 오롯이 충격이 전해졌다.
“크윽!”
고통을 참아내며 한태강이 지상으로 뛰쳐나왔다. 역시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심정웅의 마법이 그를 공격한다.
콰아앙!
절반쯤은 튕겨 냈으나 나머지 절반은 막지 못했다.
“커헉!”
피를 토하며 뒤편으로 날아간 한태강이 겨우 두 발로 착지했다. 심정웅과 함께 여유롭게 걸어오며 심이수가 설명한다.
“놀라셨어요? 팬텀 그 언니 공간이동이, 진짜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좀 배웠죠.”
“한 대표, 포기하게나.”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며 한태강은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남은 마력은 3할 남짓. 부상의 영향도 있으니 싸움을 길게 지속할 순 없다. 기회는…… 단 한 번.
“후우…….”
한태강은 길게 호흡했다. 그의 주위로 푸른빛 마력이 물결친다. 여력을 모은다고 생각할 뿐 적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후우우…….”
그가 두 번째로 호흡했다. 이제는 적들도 주의를 늦추지 않는다.
“다음이구나. 조심하거라.”
“알죠, 알죠. 저딴 구닥다리 기술 누가 맞아준다고요.”
콰앙! 퍼어엉!
심이수가 땅을 박차며 접근한다. 후방에 자리한 심정웅은 마탄을 쏟아낸다.
세 번의 호흡까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집중이 흐트러지면 앞선 두 번의 호흡도 무위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리고.
불과 오 미터 앞까지 다가온 심이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태강은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타아앙!
지금 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건 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모든 방어를 파쇄하는, 어떠한 개념에 가까워진 힘.
그 공격 앞에 선 심이수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웃는다. 그리곤 정말 아슬아슬하게…… 단 한 치의 차이로 몸을 튼다.
퍼어어어억!
심이수의 오른쪽 반신이 소멸했다.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골반,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사라졌다.
돌진하던 힘을 잃은 그녀가 형편없이 땅으로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모습에 한태강은 깨달았다.
‘죽지 않았다……!’
타격이야 심대하겠지만 생명까지 거두진 못했다. 비록 심장을 꿰뚫진 못했다 하나 인간을 훌쩍 넘어선 생명력을 가진 몬스터라도 즉사했어야 하는 상처인데.
그리고…… 탈진 상태에 가까운 그를 향해 심정웅이 접근한다.
콰앙! 콰아아앙!
남은 힘을 모조리 소모하게 만들려는 마탄 세례. 이어서 노인이 창의 형태를 갖춘 마력을 네 차례 연속해 날린다.
콰악, 콱, 콰악, 콰아악!
그것들 모두 한태강의 사지를 관통해 못에 꿰뚫린 것처럼 자유를 빼앗았다. 목과 머리만 움직일 수 있는 그가 흐릿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죄스럽다는 표정이면서도 그의 머리로 손을 뻗어내는 심정웅. 반신이 사라진 심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발로 콩콩 뛰며 다가온다.
“와…… 진짜 죽을 뻔했네. 구닥다리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세 번은 맞아줄 사람 없어도, 두 번은 좀 사기 기술 아닌가?”
“너는…… 인간인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한태강이 물은 말. 심이수가 생긋 웃으며 답한다.
“이걸 보고도 몰라요? 설마 ‘이런 게’ 인간이겠어?”
사라진 오른쪽 반신. 거기서 피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다만 붉디붉은 마력이 일렁이며 육신을 대신하고 있다. 한태강이 보고 있는 광경이 틀리지 않는다면…… 점점, 몸이 다시 생겨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이제 심정웅이 말한다.
“태강아, 미안하구나…….”
늙은 손이 한태강의 정수리를 감싼다. 그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걸 느끼며 적들에게 애원했다.
“나는…… 나는, 죽여도 좋다. 하지만 그 애들은, 그 애들에게는…… 제발, 손대지…….”
채 말을 잇지 못한 무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심이수가 쾌활한 목소리로, 그러나 자조적으로 말한다.
“아이 참, 사람 마음 아프게 하시네. 진짜로, 나도 어쩔 수 없다니까요……?”
짧은 탄식을 마치고 심이수가 노인에게 물었다.
“확실히 처리하신 거죠?”
“그래, 의식은 완전히 잠재웠느니라.”
존재가 종속당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노인이 답했다. 그가 시전한 정신 마법. 그건 대상자의 의식을 아예 백지상태로 만들어낸다. 심정웅이 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태강은 영영 깨어나지 못하겠지.
잠시 궁리하던 심이수가 명령했다.
“그럼 여기서 2차 작업까지 마치고 가요. 사람 없을 때 해놓는 게 편하니까.”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한태강의 정신을 복속시키는 작업.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평범하게 행동할 수 있으나 실은 심이수와 심정웅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작업이다.
서약 마법의 정보를 뇌와 육신, 마력에서 끄집어내는 건 나머지 둘도 한태강과 같은 상태로 만들고 나서 진행해야 하고.
“근데 할아버지, 지금 몇 시예요?”
“아직 자정은 안 되었다. 열한 시…… 삼십 분이 조금-”
바로 그때.
서걱-!
별안간 날아든 마력의 칼날이 회중시계를 든 노인의 오른팔을 썩둑 잘라냈다. 이내 칠흑처럼 검은 안개가 그들을 습격했다.
“……!”
“커흑!”
놀라며 뒤로 물러선 심이수와 잘린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는 심정웅.
채비할 틈을 주지 않고 검은 안개가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스아아아! 콰앙! 퍼어엉!
그저 매섭다는 느낌이 아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담아낸 듯한 맹공. 팔이 잘려 위기에 몰린 심정웅이 크게 소리치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크아아악!”
스아아아아아-!
그제야 적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너는……!”
무늬 없는 흰 가면을 쓴 남자. 얼마 전 저택에 침입한 테러조직 팬텀의 이인자였다. 그가 색채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너희, 뭘 하고 있었지?”
“허억, 으윽…….”
심정웅이 힘겹게 자세를 바로 했고, 심이수 또한 머릿속으로는 의문을 품으며 조부를 보조했다.
‘뭐지?’
산에 둘러친 결계에서는 경계 신호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발각되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미 대치 상황이 만들어졌고, 고민할 여유는 없다.
몸이 자라나곤 있지만 지금도 반신에 가까운 심이수와 잘린 오른쪽 어깨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심정웅.
쓰러져 있는 한태강 앞으로 자리해있는 팬텀의 이인자.
스으으으…….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빛이 더욱 짙어졌다. 연원을 알 수 없으나 대단히 강력해 보이는 그 힘에 심이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 정도였나?’
후우, 하고 한숨 소리가 들린다. 한태강과 심이수, 심정웅을 차례로 바라본 사내가 추궁했다.
“여기서 뭘 했는지를 말해. 지금 당장.”
“음…… 싫다면 어쩌시려고?”
약을 올리는 반문에 그가 선언한다.
“너희 그 잘난 집안을 전부 불태워서라도, 잿더미로 만들어서라도 무조건 알아낸다. 뒈지고 나서 구경이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