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Chapter 35. 태풍의 눈 (1)
일정은 이러하다.
오늘 오전 열 시경에 세아가 이쪽 공항으로 입국.
미리 짐을 다 챙겨놓은 내가 곧바로 픽업해서 목적지인 경기도 가평으로 출발.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재밌게 놀다가, 밤에는 바비큐 겸 내 동생의 생일 파티.
화요일에는 남이섬 쪽으로 가서 보트도 타고, 아무튼 신나게 놀 거다.
그리고 그날 밤. 자정이 지나면 내 생일이니 대충 케이크 정도 먹고, 자고 일어나서 오후쯤에 세아와 점심을 먹고 귀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응? 싫은데?”
“아니, 뭐가 싫은데요…….”
“나 여기 보름이나 있었잖아. 네 침대도 되게 포근하고 집이 너무 아늑해서 좀 나가기 싫은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돼?”
7월 10일 밤부터 줄곧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서연희가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방금 같이 아침 먹고, 나도 슬슬 공항으로 가봐야 하니 저쪽도 자기 집에 가줘야 하는데…… 짐을 챙겨서 나가려는 내 팔을 붙잡고선 놓아주질 않고 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하지만 미적거리면 정말 늦을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일렀다.
“이제 키도 다 크셨는데…… 우리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게 옳다고 봐요.”
며칠 전의 만월. 나를 데리고 높디높은 산에 오른 서연희는 실질적으로 힘을 거의 다 회복했다. 다음 만월까지 안정화하는 단계가 남았으니 마력 사용은 자제해야겠지만, 일단 외견은 내가 평소 알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이제 나보다 누나로 보이잖아. 나도 꽤 노력했고, 컨디션도 좋아졌으니까 그에 걸맞은 언행을 보여달라고요.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그녀가 표정을 슬프게 흐리며 답한다.
“난, 그냥…… 이 집 살면서 너무 좋아서.”
“…….”
“너한테 요리 만들어주는 것도 좋고, 같이 청소하는 것도 좋았고, TV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고, 너랑 소풍처럼 나가서 논 것도 좋았고, 넌 연구하고 나는 옆에서 책 읽는 것도 좋았고, 잘 때 너랑 마력으로 이어져 있는 것도 좋았고, 그냥 다 좋아서…… 그래서 나가려니까 아쉽고 그래서…….”
“………….”
아니, 또 왜 이러는데. 이러면 내가 나 편한 대로 불러놓고 때 되니까 집에서 내쫓는 쓰레기인 것 같잖아.
……딱히 틀린 말도 아닌가.
묘하게 죄짓는 기분이 된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음…… 누나.”
“……왜?”
“지금은 아니라도, 다음에, 또 할 수 있잖아요.”
“……진짜?”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서연희가 묻는다. 나는 힘주어 답했다.
“할 수 있죠. 언제라고 장담은 못 해도, 우리 일 다 끝나고 나면 그럴 수 있어요. 난 그러고 싶고.”
“……그러고 싶다고?”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무척 진심이 담긴 말로 그녀를 달래던 나는 그걸 흘려넘겼고, 계속해서 말했다.
“당연히 그러고 싶죠. 누나도 그렇죠?”
그리고 다음 순간.
<지금은 아니라도, 다음에, 또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죠. 언제라고 장담은 못 해도, 우리 일 다 끝나고 나면 그럴 수 있어요. 난 그러고 싶고.>
<당연히 그러고 싶죠. 누나도 그렇죠?>
마법적으로 녹음된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흘러나온다. 눈에 스며 있던 눈물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는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일렀다.
“좋아, 접수했어.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
“응? 왜 그렇게 빤히 봐?”
“저기요, 서연희 씨.”
“어머. 왜요, 이도진 씨?”
“혹시 있잖아요, 사실 꼬리 아홉 개 있고 막 그래요?”
<세계의 수호자>를 쓸 때 그런 모습을 떠올린 적은 없는데. 하지만 저 얄미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말이 절로 나왔고, 슬쩍 고개를 튼 서연희가 자기 뒤편을 보며 답한다.
“아니, 딱히 없을걸? 확인해 볼래?”
“……됐네요.”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난 뒤.
“이세아! 여기!”
저 멀리서 캐리어를 끌며 걸어오는 세아를 확인한 나는 반갑게 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세아가 나를 본다.
함께 귀국한 진유리도 걸음을 빨리했지만 내 동생은 그 정도를 넘어 거의 뛰어오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는 데 안 피곤했어?”
“별로, 괜찮아.”
다만 거기까지가 한계. 올해 봄부터 이전보다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감격의 포옹을 하거나 그러진 않는다. 나야 환영이라도 세아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겠지.
우리 옆에서 자기 부모님과 대단히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진유리는…… 이건 집마다 방식이 다른 거고.
한데 바로 그때.
“…….”
“…….”
나는 문득 세아와 내가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얘도 진유리네 가족을 보는 중이고, 나도 그랬다. 물론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 뭔가 은근히 부러워하는 듯한 눈치.
이거 혹시, 어쩌면…… 내 동생도 저런 걸 기대한 게 아닐까.
나 좋을 대로 그렇게 해석한 나는 뒤늦게나마 양팔을 벌려 세아를 안아주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발 늦었다.
“교수님…… 그으, 잘 지내셨어요?”
가족과 인사를 마친 진유리가 물어온 말.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던 세아의 움직임이 딱 멈췄고, 마음속으로 아쉬움을 삼킨 내가 답했다.
“그래, 잘 지냈지. 한 달 동안 고생했다, 유리야.”
“아니에요, 어, 아, 그러니까…… 진짜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가면서 얘기해.”
몹시 새침하게 대화를 끊은 세아가 앞장섰다. 진유리는 내 동생 눈치를 살피며 쫓아가 옆에서 걷고, 나는 진유리의 부모님 두 분과 뒤따라가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 시연회는 참석을 못 해서 정말 아쉽네요. 찾아뵙고 축하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요, 전화 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습니다. 주차는 어디 해놓으셨는지.”
“아, 우리는 이쪽으로 가야겠네요. 유리야, 이리 오렴. 교수님한테 인사드리고 가야지.”
꼭 이때 귀국할 필요는 없지만 마침 생일인 세아가 귀국한다니까 진유리도 겸사겸사 함께 온 거고, 주차장 입구에서 생일 축하한다, 감사하다, 용돈을 주겠다, 너무 많이 주셨다, 잠시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다 인사를 나눴다.
“교수님, 또 뵙겠습니다아…….”
“그래, 출국할 때 보자. 한국 와 있는 동안은 푹 쉬고.”
“아…… 그으, 네…….”
어째선지 진유리가 우물거리며 답한다. 그리고는 세아 쪽을 쳐다보는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얘는 또 뭔가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이다.
“대표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세아 너도 인사해야지.”
“……안녕히 가세요.”
진유리의 부모님에게는 대단히 예의 바르고 깍듯하게 인사한 세아를 데리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배고프면 뭐 좀 먹고 갈까?”
“가서 먹어도 되잖아.”
“그래도 되고.”
오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첫날은 계곡 근처의 펜션이 본거지. 계곡에서 놀다가 쉴 수 있게 텐트도 있고, 다른 장비도 완벽하다.
이번 여행 기간은 세아를 위해서라도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려 했고, 차 안 분위기를 밝게 하며 운전을 해나가던 중에 세아가 물었다.
“별일 없었지?”
“응, 그냥 집에서 쉬고, 연구하고, 그러면서 지냈지. 전화도 자주 했잖아.”
“……그럼 됐어.”
다음으로는 내가 물었다.
“영국에서는 별일 없었고?”
“그냥, 괜찮았어.”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진행 중입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51.3%
+
현재 3권의 진행률은 오십 퍼센트대 초반. 이제까지 지나간 여름방학 기간과 거의 일치했다.
추측해보자면 이번 휴가 기간에 확실히 반환점을 돌고, 다시 영국에 돌아가면 클라이맥스 사건이 진행되지 않을까 싶은데…… 세아에게 아직 위험한 일이 닥치진 않은 듯했다.
저 마지막 태그. ‘어반 판타지’. 저것만 없었으면 3권은 일상물 느낌이구나, 하고 지금보단 걱정이 덜했을 텐데.
나는 세아에게 요 한 달간 전화로 지겹도록 많이 한 부탁을 다시금 일렀다.
“일 있으면, 오빠한테 꼭, 무조건 말해. 알겠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그 틈을 타서 상념이 밀려온다.
한태강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난 주말에 파혼 서약을 할 줄 알았으나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기억을 바꾼 게 영향을 미친 걸까. 그걸 알 수는 없고, 최소한 심가 쪽에서 어떤 행동에 나서진 않고 있다.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마도 명문 심가의 구성원이 세간에 알릴 수 없는 목적으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시기
-답변: 미정(未定)
-추가정보: 추후 답변이 변동될 수 있으며 특정 가능한 시기에 질문자 이도진에게 고지
+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해 얻은 주관식 질문. 내가 가장 우려한 부분은 심이수와 심정웅이 또다시 누군가를 습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한태강을 함정에 빠뜨린 건지 이유를 알아낼까도 고민을 했지만, 이후에 무슨 짓을 할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장생종의 시체를 소각해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을 자원을 소모한 게 나니까.
그 책임을 지려 한다는 건…… 그건 너무 좋게 포장한 거고.
“응, 알겠어. 가서 연락할게. ……응.”
“유리?”
조수석에서 세아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물었다. 얼핏 듣기로는 진유리 쪽에서 뭔가를 계속 확인하며 부탁하는 듯했고, 세아는 썩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알겠다고 답하는 식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세아가 짧게 말한다.
“응.”
“음…… 오빠가 보기에는 유리가 너 많이 친하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살갑게 대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갈수록 진유리랑 친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보면 얘가 왜 이러나 싶을 만큼 쌀쌀맞게 대할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진유리 쪽에서 눈치를 보는 듯했고.
하지만 세아가 나직하게,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같은 거 물어본단 말이야. 알겠다고 했는데, 오늘 비행기 타고 올 때도 계속 물어보고.”
“뭘 그렇게 물어보는데?”
“…….”
이 질문에는 세아가 답을 하지 않았다. 뭐, 둘이 한 집에서 한 달을 같이 살았으니까 내가 모를 일도 있겠지.
“조금만 더 사이좋게 지내, 응?”
“원래는 사이좋아. ……친해. 나도 걔 지금은…… 좋고.”
“근데?”
“그냥, 가끔…….”
거기서 다시 침묵.
그래도 친하고 좋다는 말을 들었으니 성과가 있었다 여기며 나는 차를 몰아나갔다. 가평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계획대로 신나게 놀았고.
펜션에 짐부터 풀고, 점심을 먹은 다음, 계곡에서 바람도 쐬고 물놀이도 하다 보니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오후 일곱 시에 다다른 시각.
세아와 함께 바비큐 준비를 마친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다. 어? 왜?”
“……나 잠깐 전화 좀.”
휴대전화를 든 세아가 저만치 떨어진 곳으로 향한다. 표정이 조금 미묘한 게 뭔가 불만인 듯한 기색.
“……?”
의아해하며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성수기라 그런지 펜션이 전체적으로 꽤 시끌시끌했다. 방은 만석에 가깝고, 우리 옆 호실은…… 여기만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진짜로 빈방인지, 어디서 놀다가 늦게 오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데 그때.
“응?”
전화를 받던 세아가 갑자기 펜션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이세아! 어디 가?”
내 쪽을 본 세아가 눈짓한다. 알아서 갈 테니까 따라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나는 잠자코 기다렸고……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늘 세아가 진유리와 대화할 때 왜 저기압이었는지까지도.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또 먹을 걸 담은 봉투를 든 진유리가 머뭇거리며 내게 인사한다. 그 옆에 서 있는 세아가 새초롬하게 설명했다.
“……내 생일 축하해주러 오고 싶다고 해서. 저녁 먹을 때쯤 오라고 했어.”
“아, 부모님 허락은 맡았어요. 하루 자고 와도 된다고 하셔서…….”
“그래? 근데, 자고 갈 거면 방이 좀…….”
나랑 세아야 같은 데서 자도 되지만 얘는 아니니까. 한데 진유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저기가 제가 예약한 방이거든요…….”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낮부터 오는 사람이 없던 우리 옆방이었고, 이제 나는 깨달았다.
이거…… 한국 오기 전부터 자기들끼리 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