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Chapter 35. 태풍의 눈 (2)
***
한편 같은 시각.
이도진이 머무르는 펜션에서 불과 일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고급 리조트로 휴양을 온 한태강은 테라스를 거닐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다.
“쉬러 왔는데 쉬지 않고선.”
“아, 이것까지만 보려고요.”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살피던 한세라가 답했다. 측은하면서도 대견하다는 눈길로 딸아이를 보며 한태강이 물었다.
“저녁도 먹어야 하는데 뭐가 괜찮겠니.”
그들이 묵는 곳은 이 리조트 내에서도 가장 고급인 객실. 전체 2층에 층마다 백 평이 훌쩍 넘는 독채로 이루어져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억대를 훨씬 호가하는 회원권이 있어야만 예약이 가능하며 그런 만큼 시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하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객실 내 취사가 어렵다는 것.
오늘 오전부터 와 있으니 이번이 세 끼니째. 솔직히 말해 한태강은 룸서비스나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체질상 맞지 않는 거다.
지금이야 가진 부와 명성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나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자수성가해 여기까지 커왔다.
고급 리조트에서 정적으로 보내는 휴가는 지루하다. 여름에 피서를 왔다면 마땅히 텐트도 치고, 캠핑도 하고, 야외에서 떠들썩하게 노는 쪽이 올바르지 않겠는가.
비록 본인은 그러지 않고 뒤에서 무게나 잡고 있겠지만, 그는 친구들이 재밌게 노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하는 타입이었다.
해서 저녁 메뉴를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하게나마 따분해하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고, 그걸 예리하게 알아챈 한세라가 웃으며 답했다.
“이러실 줄 알았으면 그냥 세아한테 말해서 그쪽으로 가는 거였는데요.”
“어허,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짐짓 인상을 쓴 한태강이 책망하듯 일렀으나 한세라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세아는 저랑 아빠 여기 온 거 알잖아요. 도진이한테는 말을 안 했어도, 저희 온다고 했으면 거절은 안 했을 거예요.”
“그랬겠지…….”
한태강이 무거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둘째 딸처럼 아끼고, 한세라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이세아는 환영했을 거다. 더군다나 그 애는 제 오빠와 그리 친하지 않으니 두 사람이 오길 내심 바라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도진은 어땠을까.
‘거절은 안 했겠지.’
거절만 하지 않았을 거다. 쉬려고 온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겠지. 미안해하고, 쩔쩔매고, 불편해하고, 아무리 내색을 안 하려 해도 그놈은 그렇게 여겼을 거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다. 그놈이 몰라야 하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동생이 온다니 겨우 시간을 낸 것일 텐데, 그렇다면 며칠이라도 편히 쉬게 둬야 하니까.
한태강 자신이 이도진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건 그게 도리니까.
이내 그의 마음속으로 두 가지 감정이 밀려온다.
씁쓸함과 의문스러움.
‘그렇게 됐구나…….’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씁쓸함.
그리고 의문은…….
‘그런데 왜……?’
기실 며칠 전부터 줄곧 드는 의문이다.
불편해할 걸 뻔히 아는데, 어째서 비밀로 감추면서까지 가평으로 따라온 걸까.
왜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것처럼 불안한 걸까.
위험에 처하지 않게, 즉시 대처해줄 수 있게 근처에 머물러야 한다고,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한태강은 불안감을 떨쳐내듯 룸서비스 책자를 들었다.
“일 마무리하면 말하거라. 먹을 만한 게 있나 아버지가 봐두고 있을 테니.”
적당히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까지 끝마치니 오후 여덟 시를 넘긴 시각. 잠시 2층으로 올라갔던 한세라가 활동적인 복장을 갖추고선 그에게 말했다.
“저 잠깐 산책 좀 다녀올게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유쾌한 기분이 아니나 그는 노파심에 딸아이에게 일렀다.
“그놈을 만나러 갈 생각이면…… 그러지 말려무나.”
그러자 한세라가 태연하게 답한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놀러 왔으니까 좀 걸으려고요. 조금만 가면 계곡도 있는 것 같던데 구경도 하고요.”
“……그러면 됐다.”
그리고 객실을 나서기 직전.
한세라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시진 마세요.”
“뭘 말이더냐.”
어릴 적부터 어른스럽고 사려 깊었던 그의 딸이, 신뢰와 확신이 깃든 어조로 답한다.
“혹시라도 도진이랑 마주친다고 해도, 걔 그렇게까지 불편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예 안 그럴 거라고는 말 못 해도, 그거보다는 반기는 마음이 더 클 거예요.”
“세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다. 그놈이 퍽이나 그러려고.”
한세라가 웃는다.
“글쎄요? 저야 그런 거 못 하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아빠가 밀당을 엄청 잘 해두셔서요.”
밀당.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한태강이 멀뚱히 서 있는 사이, 딸아이가 경쾌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세아의/우리 세아)…… 생일 축-하, 합니다-!”
“……후우.”
진유리와 내가 깨방정을 떨며 축하 노래를 부른 다음, 세아가 새침하게 두 번 바람을 불어 케이크 촛불을 껐다.
한 번은 열 살을 의미하는 숫자 초 1이 꽂혀있는, 내가 산 케이크.
다른 하나는 숫자 초 8이 꽂혀있는, 진유리가 사 온 케이크.
이어서 폭죽 세례가 터졌다.
펑! 퍼엉!
나는 세 개를 잡고 한 번에 터뜨렸고 진유리도 두 개를 동시에 터뜨렸다. 치렁치렁한 종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절묘하게도 세아의 머리 위로 안착한다.
무표정하게 종이를 걷어낸 세아가 한 개 남은 폭죽까지 마저 터뜨렸다.
퍼엉!
각도를 보아하니 진유리의 머리 위로 내려앉을 걸 예측한 공격. 하지만 모른 척 방어해낸 진유리가 세아에게 케이크 칼을 건넨다.
“자, 이거.”
“……고마워.”
자그마한 손으로 그려낸 호쾌한 칼질. 케이크 두 개가 각자 반씩 나뉘었고, 내가 진유리에게 일렀다.
“유리야, 세아 생일 축하해줘서 정말 고맙다. 케이크까지 사와 주고.”
“앗,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생일에 그냥 오기 뭐해서 산 거라서요. 전혀, 진짜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가만히 듣고 있던 세아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대. 그냥 예의상 산 거래.”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막상 저런 말을 들으니 진유리가 당황해했고, 친구의 접시에 케이크 반쪽을 담아 건네주며 세아가 말했다.
“……고마워.”
“응……. 이세아, 생일 축하해.”
새초롬하지만 진심을 담은 감사와 민망해하는 듯하면서도 기뻐하는 대답. 지켜보는 나로선 몹시 흐뭇한 광경이었다. 3월에 강의실 다 때려 부수면서 싸울 때까지만 해도 얘들이 이렇게 친해질 줄 꿈에도 몰랐는데.
흐뭇하고, 기쁘고, 그리고…… 진유리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반드시 찾아오는 죄책감이 내 마음에 일렁인다.
웃는 얼굴로 감정을 숨기며 나는 말했다.
“자, 먹자. 둘 다 먹을 수 있지?”
“아…… 음…… 네에.”
자기 배를 내려다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던 진유리가 답했고, 세아가 내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 반을 담아주며 말했다.
“얘 일 년 365일 다이어트 중이야. 얘는 하나만 먹게 하고, 나랑 반씩 나눠 먹어.”
진유리도 나도 원체 작은 걸 사긴 했지만 그래도 케이크 하나에 가까운 양.
이미 바비큐다 뭐다 배불리 먹은 상태인 나와 진유리는 자못 비장한 눈으로 케이크를 응시했다. 태평한 건 세아뿐으로 케이크 맛이 어떨지 궁금해하는 표정.
그리고 잠시 디저트 시간이 이어지다가…… 나는 포장된 상자 하나를 세아에게 건넸다.
“자, 생일선물. 열어봐도 돼.”
천천히 포장을 뜯은 세아가 선물이 뭔지 확인한다. 내가 봤을 땐 얘한테 잘 어울릴 듯한 파우치. 옆에서 지켜보던 진유리가 ‘와…….’ 하고 감탄하며 묻는다.
“이거…… 그거 맞죠? 아공간 파우치.”
“아공간?”
이런 제품에 딱히 관심이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세아에게 진유리가 설명했다.
“이거 그거야. 엘로즈에서 나온 거.”
“나도 상표는 읽을 줄 알아. 가방이랑 구두 같은 거 파는 데잖아. ……엄청 비싸고.”
“아니, 그냥 파우치가 아니라 산트리랑 콜라보한 거라서…… 그 안에 여기 테이블에 있는 거 전부 다 들어갈 수도 있어.”
“……진짜?”
“응. 엄청 좋은 거고, 엄청, 엄청 비쌀 건데…… 이거 아직 재고가 있었어요?”
“구하려고 신경 좀 쓰긴 했지.”
일반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가 없어 연구자로 활동하며 알게 된 인맥을 총동원했다. 관리만 잘 해준다면 오 년 이상 사용이 가능한 아공간 파우치. 어렵게 어렵게 팔지 않은 제품이 있다는 걸 알아냈고, 돈을 받지 않고 주겠다는 걸 제값을 주고 구매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아공간 제품 중에서는 기능도, 디자인도 최상. 나름대로 열심히 구한 건데, 오늘 진유리가 있어서 다행이네. 내가 괜히 생색내듯이 말을 안 해도 저 애가 연신 열변을 토하고 있다.
“진짜, 이제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와…… 와, 진짜 예쁘다…….”
“…….”
세아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깜빡이며 파우치를 보고, 다시 나를 보고, 다시 파우치를 보기를 반복한다.
그러더니 이내 선물을 자기 품 안으로 꼭 끌어당겼고……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린 채로 말한다.
“……고마워. 잘 쓸게. ……오빠.”
그 말이면 넘칠 만큼 충분했다. 다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자기도 생일선물을 준비해온 진유리가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나도 좀 골라서 사긴 했는데…… 근데 별로 좋은 건 아닌데…… 아앗!”
봉투 하나를 손에 쥐고 꼼지락대는 걸 본 세아가 기습적으로 뺏어갔다.
“지금 봐도 돼?”
“봐도 되긴 하는데…….”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선물은 편하게 매고 다닐 수 있는 가방.
진유리가 주저하듯 일렀다.
“안에도 뭐 좀 들었어.”
“와…….”
감탄을 낸 건 나.
가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너 화장품 같은 거 많이 없으니까, 그냥 나 쓰는 거랑 평 좋은 거 몇 개 샀는데…… 별로면 안 써도 돼.”
“……쓸 건데.”
새침하지만 무척 고마워하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세아가 답했다. 이어서 가방을 빠져나온 손에 잡힌 종이. 척 보기에도 편지였고, 진유리가 기겁하며 제지했다.
“앗, 그거는 나중에 읽어. 너 혼자, 교수님 보여드리지 말고.”
“……응, 알겠어. 고마워. 오빠도, 너도, 둘 다 엄청.”
“…….”
서로 부끄러워하는 둘을 나는 말 없이 바라봤다. 진유리가 여기 찾아왔을 때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세아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그래 줬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먹은 걸 정리까지 말끔히 마치고 나니 밤이 깊었다. 벌써 오후 여덟 시 반에 가까운 시각. 진유리와 세아는 둘이 나란히 앉아 몇 분째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깐만, 한 번만 다시 찍어.”
“왜?”
“나 이상하게 나왔잖아.”
“실물이랑…… 똑같은데.”
“뭐래, 아니거든? 표정 웃기게 나왔잖아. 딱 한 번만 더 찍어.”
“……찍을게.”
한껏 예쁜 표정을 짓는 진유리와 이제 슬슬 귀찮아하는 게 보이는 세아.
사진을 찍고,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하고, 사진과 세아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한 번만 더’를 외치는 진유리를 보며 피식 웃은 나는 그 애들에게 일렀다.
“세아야, 나 잠깐 산책 좀 갔다 온다?”
“응.”
“아, 다녀오세요, 교수님!”
배려라면 배려일까. 잠시 자리를 비켜주려는 생각이었다. 진유리는 오는 동안 꽤 더웠을 테니 씻어야 하고, 두 사람 다 이래저래 여유 시간이 필요할 듯해서.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긴 나는 낮에 놀았던 계곡 쪽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려오는 게 좋았고, 생각도 좀 가다듬을 겸 해서.
그리고 십여 분 뒤.
물소리가 제법 선명하게 들리는 개울가 근처에서 마주쳤다.
“……?”
“어?”
만월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달빛이 밝게 내리쬐는 개울가. 금빛 머리칼과 푸른색의 눈동자가 그보다도 아름다웠다.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안 했던 사람, 세라가 장난스레 웃으며 내게 말한다.
“들켰네?”
***
@True_glass · 팔로우
#생일 #우정 #친구
좋아요 376개
10분 전
어둑하고 쓸쓸한 방 안.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유해빈이 원망에 찬 말을 중얼거렸다.
“여름방학……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