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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45화 (145/207)

#145화. Chapter 35. 태풍의 눈 (3)

본래 그녀는 방학 기간을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일단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좋고, 가끔 기분이 내키면 하늘을 날아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니기도 했다.

균열 너머, 피난을 오기 전에 살던 세상과 비슷한 경치를 찾아다니는 건 방학 동안만 실행할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이제까지는 분명히 그래 왔는데…….

‘이거 언제 끝나지?’

지금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달력을 살피고 있다.

오늘이 7월 26일 월요일. 2학기 개학까지 5주나 남았다. 날짜로는 35일. 시간으로는 840시간.

유해빈은 다시 한번 힘없이 되뇌었다.

“여름방학 멈춰…….”

물론 그런다고 개학을 일찍 할 리는 없고, 그녀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왜 이토록 쓸쓸하고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최근에 이도진과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심술을 부리고 미운 말을 했던 것?

심가에 침입했을 때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비실거리기만 하고, 서연희가 크게 다쳤던 일?

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회의한 당시부터?

어쩌면 여름방학 시작부터?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그 여자랑 마주쳤던 그때부터?’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생각나는 건 그 시점이었다. 아직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제일고 교문 앞에서 한세라와 맞닥뜨렸던 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6월 초, 한세라가 귀국한 그즈음부터.

‘난 그때부터 급격히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지…….’

안 그러는 척 챙겨줄 때는 언제고 약혼녀가 복귀하자마자 가련한 아기용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나쁜 놈을 떠올리며 유해빈은 베개에 얼굴을 댔다.

‘못된 사람, 바람둥이, 착한 쓰레기, 똑똑한 빡대가리. 여동생 친구랑 여동생 라이벌 꼬시기나 하고, 견제 대마왕 시누이에, 사악한 보스에, 존재 자체가 위협인 초고스펙 약혼자에,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게 얄미워…….’

사실은 이도진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열심히 살았을 뿐이며 옆에서 지켜본 바로 일이 꼬인 것에 그의 잘못이 있진 않다. 그 이상으로 열심히, 더 잘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 원망을 쏟아내는 것도 유해빈 자신의 문제겠지.

여름방학에 만날 일이 현저히 줄어든 이유는 그녀가 무능력하니까. 별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오히려 그녀를 보호해주고자 연락까지 줄인 거다.

하지만…….

‘나도 안다고…….’

유해빈 스스로 그걸 아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드물게 얘기를 나눌 때마다 심통이나 내는 게, 이유를 알면서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

실제로 속상하고 짜증이 나니까.

‘갑갑해…….’

여하튼 정말 싫었다.

여름방학 동안 꽤 자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장밋빛 상상을 했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시누이는 이제는 완전히 진유리와 절친이 된 것 같다.

“자기가 무슨 가족이야, 뭐야? 거길 왜 따라가?”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불만. 그러나 진유리의 SNS에는 오직 축하한다는 반응밖에 없었다. 제일고 학생들의 댓글도 여럿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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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1개 모두 보기

-True_glass: #생일 #우정 #친구

-arim04: (눈이 하트 모양인 이모티콘)X3

-daa.un_0: 둘 다 이뿌댜 ㅎㅎ 세아 축하행!!!

-6.13_yunji: 세아 교수님이랑 여행 간다고 들었는데 ㅎㅎ 유리도 따라간 거야??

└True_glass: 같이 온 건 아니구!! 축하해주러 들렀어 ㅎㅎㅎ

-cherish___you: 근데 세아는 왜 인별 안 해 ㅠㅠㅠㅠㅠ 축하한다고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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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따진다면 모든 사람이 축하만 건넨 건 아니지만 실의에 빠진 유해빈은 그걸 간파할 수 없었다. 슬픈 눈으로 SNS를 닫은 그녀는 동영상 앱을 켰다.

검색어는 ‘이도진’.

올라오자마자 큰 화제로 인기 동영상에 선정됐으며 알고리즘의 선택까지 받아 무지막지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이도진의 시연회 영상이 화면에서 흘러나온다.

유해빈은 우울한 표정으로 눈과 귀를 집중했다.

“말 잘하네…….”

목소리도 좋고, 말도 잘하고, 멋있고, 호응도 좋다. 하지만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도, 세계 각지에서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저곳에서 열렬히 손뼉을 치는 사람들도 모르겠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인간 순 나쁜 놈이라고요…….”

그러나 곧장 드는 후회.

허업, 하면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유해빈이 변명처럼 말했다.

“아니, 진짜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엄청 착한 사람인데…… 그냥, 상황이 복잡하다 보니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나한테 신경 못 쓰는 거도 너무 바쁘고 할 일 많으니까…… 응,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말을 되뇌어 봐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다.

자기 마음을 침착하게 다잡는 것도, 그걸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도, 열여덟 살의 유해빈은 아직 너무 서툴렀다.

그리고…….

우우웅-

텅 빈 허공으로 마력이 일렁인다. 직사각형의 홀로그램이 나타난다.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건…….

“……보스?”

테러조직 팬텀의 보스.

36 영웅의 일인, ‘안개의 마녀’.

위기마저 기회로 삼아 이도진과 장장 보름이 넘게 동거한다는 쾌거까지 이루어낸 불여우.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 해빈이 심심해 보이네?]

***

“들켰네?”

그 말에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내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겠지. 얼떨떨한 기분을 담아 세라에게 물었다.

“휴가 온 거야?”

“응, 아빠랑 오늘 오전부터. 저기 리조트 있잖아.”

세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나무로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그쪽에 굉장히 고급 리조트가 있는 건 안다.

사락, 사락. 물에 젖은 나뭇잎을 밟으며 내게 걸어온 세라가 말을 이었다.

“세아한테 들어서 너 있는 건 알았어. 말 안 해달라고 한 건…… 요새 좀 그랬잖아?”

“그렇긴 하지.”

세아가 나한테 숨긴 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럴 만했지. 세라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만 의문이 있다면…….

“아저씨는 쉬고 계셔?”

한태강은 알고서 여기로 휴가를 온 걸까. 아니면 세라가 알리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까.

직접 묻지 않았는데도 내 심정을 알겠다는 듯 세라가 답했다.

“사실 고민 중이야.”

“고민?”

“산책하러 나갈 때 아빠가 물어보셨거든. 너 만나러 가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했는데, 이렇게 만났잖아? 솔직히 말씀드릴지, 말 안 하고 넘어갈지, 어떻게 할까 싶어.”

의문이 풀렸다.

한태강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도 왔다.

그게 불편하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안도감이 든다. 최소한 근처에 있는 것조차 꺼리는 건 아닌 듯해서.

쏴아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이삼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계곡이 있고, 세라가 내게 묻는다.

“우연히 만난 거긴 한데, 서로 못 본 척 지나가는 것도 우습고…… 잠깐 걸을래?”

“그래.”

자박자박, 돌과 흙을 밟는 소리.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세아 선물은 뭐 줬어? 난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 선물은 출국하기 전에 주려고 했는데.”

“좀 비싸고 좋은 거?”

기뻐하던 세아가 생각나 자랑처럼 답하자 세라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비싸고 엄청 좋은 거였겠는데?”

“엘로즈에서 나온 거 너도 아나? 아공간 파우치. 그거 줬어.”

“음…… 그래?”

세라가 짐짓 고심하듯 중얼거린다.

“선물 바꿔야 하나?”

“응?”

“나도 신경 좀 쓰긴 했는데, 네가 준 거 들으니까 준비가 모자랐나 해서.”

“걔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마음이 중요하지. 아니면 편지 같은 거 쓰면 더 좋아할걸?”

“편지는 당연히 썼지. 세아 걔가 선물 따지고 그러지 않을 건 아는데, 너한테 지기 싫다는 생각?”

“나한테?”

“기억 안 나? 어릴 때는 너랑 나랑 나름대로 세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잖아.”

그랬던 때가 있다.

세아와 내가 사이가 좋았을 때.

세라와 내가 사이가 좋았을 때.

그때는 서로 언니가 더 좋다, 오빠가 더 좋다, 세아에게 그런 말을 듣고자 경쟁하곤 했다.

“근데, 거의 맨날 내가 이겼지 않나?”

“열 번 중에 한두 번은 내가 이길 때도 있었어.”

“그랬나? 너 승률이 그렇게 높았어?”

“원래 2등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잘 기억해서 그래.”

계곡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은 우리는 둘 다 신발을 벗고 발을 차가운 물에 담갔다.

도란도란 편안한 대화. 매미 소리, 물소리, 옅게 부는 바람을 나무가 맞이하는 소리.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났겠다 싶을 때쯤, 세라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길 잘한 것 같네.”

“그래?”

“응, 휴가라는 게 편히 쉬려고 오는 거잖아. 지금 그런 기분이라서.”

“나도…… 그러네.”

서울이 아닌 곳.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복잡한 일을 다 걷어내고 온전히 쉬고 있다는 느낌이다.

심가도, 파혼도, 지금만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편했다.

꼭 세라와 화해한 것 같아서.

연을 끊으라는 한태강의 부탁마저 모른 척하며 어기고 있다.

그리고 세라가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말을.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도 나. 우리 집이랑 너희 집이랑, 일곱 명 다 같이 여름에 놀러 갔던 거.”

“난 갈 때마다 재밌었어.”

“나도.”

슥, 스윽.

세라가 앉은 채로 물속에 있는 발을 움직인다.

물길이 살짝 흩어지고, 그러다 문득 내게 제안했다.

“물장난도 쳐볼래? 우리 어릴 땐 그렇게 놀았잖아.”

“그건 이제 좀…… 그렇지 않나?”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으나 진짜 내 마음은 달랐다.

그렇게까지 들뜰 수는 없으니까. 그건 너무 욕심부리는 거니까.

세라가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시원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 미워하거나 화내시는 거 아니야. 정말로.”

“……반만 믿을게.”

실은 절반도 믿지 않으면서 나는 답했다. 세라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고 내 잘못이 지워지는 건 아니야.

앞으로도 그럴 테고.

찰싹-

세라가 발을 조금 세게 움직인다. 튀어 오른 물방울이 내 얼굴로 향했고, 꼭 그만큼만 장난을 친 세라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만 가봐야겠다. 아빠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넌 좀 더 있다가 갈 거야?”

“나도 일어나야지.”

아쉬움을 억누르며 답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세라도 일어서려 손으로 바위를 짚는다. 한데 그 순간.

풍덩, 하고 세라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물속으로 빠졌다.

“어?”

나는 눈을 찡그리며 물가로 내려갔다. 세라도 함께 내려왔고, 물길에 쓸렸는지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는다.

“아, 괜찮아. 방수되니까 찾기만 하면 돼.”

“이게 그새 어디 갔지?”

세라와 나는 상체를 숙인 채 휴대전화를 찾았다. 완전히 떠내려간 건 아닐 텐데…… 다행히 곧 내 손에 흙이나 돌이 아닌 감촉이 잡혔다.

“찾았다.”

“진짜?”

세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 말. 세라도 나를 봤고, 눈이 마주했다.

서로를 보는 시선. 조용한 침묵. 언뜻 드는 생각.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좀 많이 가깝다.

바로 그때.

“아앗-!”

멀리서 들린 비명 같은 목소리. 세라와 나는 그쪽을 바라봤다.

나무와 바위에 가려진 곳.

세아와 진유리가 빼꼼히 고개만 내민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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