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Chapter 35. 태풍의 눈 (4)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오후 여덟 시 삼십 분경.
이도진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SNS에 사진을 업로드한 진유리는 긴장한 눈길로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게 꽤 선명하게 느껴진다.
‘애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평소보다 월등히 빠르게 올라가는 좋아요 숫자에 댓글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진유리는 썩 달갑지 않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 적어줬으면 했던 댓글이 등록된 걸 발견했다.
-6.13_yunji: 세아 교수님이랑 여행 간다고 들었는데 ㅎㅎ 유리도 따라간 거야??
그녀와 같은 반도 아니고, 딱히 친하지 않은 여학생이 남긴 댓글. 진유리가 알기로 저 애는 이도진이 제일고에 부임한 직후부터 그가 너무 잘생기고 너무 멋있다고 공공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추궁이겠지. 가족끼리 놀러 간 건데, 수학여행도 아닌데, 네가 뭔데 교수님의 사적인 시간까지 따라가냐고.
하지만 얼추 나오리라 예상은 했던 반응이고, 진유리는 당황하지 않고 잽싸게 답했다.
└True_glass: 같이 온 건 아니구!! 축하해주러 들렀어 ㅎㅎㅎ
‘됐어.’
이걸로 논란의 소지는 없앴다. 애초부터 따라오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축하해주러 온 거라고 자연스럽게 해명한 거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
왜 이세아가 평소답지 않게, 굳이 보호자 동의서를 받는다는 수고로움까지 감수하며 본인이 펜션을 고르겠다고 한 건지.
왜 이도진에게 알리지 않고 나란히 자리한 객실 두 개를 예약한 건지.
하지만 정황을 모르는 외부인이 그 지점까지 도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련에서 이기면 네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겠다던 이세아의 도발을, 그 말에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하며 면역체를 최대치로 활성화한 진유리의 결의를 모른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후우…….”
안도에 가까운 한숨. 그녀 옆에서 SNS의 반응을 구경하던 이세아가 조곤조곤 말한다.
“너 이거보다는 다른 사진이 더 잘 나온 거 같은데.”
“그래?”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대답에 이세아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뜬다. 그렇게 몇 번씩 사진을 찍어대더니 막상 올리고 나서는 왜 관심이 없냐는 식으로.
하지만 진유리로서는 솔직히 유의미한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다.
‘얘랑 찍을 때는…….’
사진 찍는 기술이야 예전부터 도가 텄으나 한데도 이세아와 함께 찍으면 밀리는 건 인정하고 있다.
어차피 몇 장을 찍어도 다 비슷하게 나오고, 그러니 귀찮아하는 애를 계속 붙잡은 건 잘 나온 사진을 건지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셀카 찍는 모습 찍는 게 제일 예뻐 보인다고…… 그런 말이 있지?’
그냥, 두 사람 근처에서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던 이도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산책하러 가고 나선 의미가 없어졌으니 곧바로 올린 거고.
“히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귀국하고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어서.
무사히 펜션에 왔고, 이도진도 반기는 듯하고, 이세아도 선물을 좋아하는 듯했다.
대외적인 입장표명도 완벽하고, 이도진에게 좋은 이미지도 쌓았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날이라고 해야겠지.
한데 그즈음.
문득 스며오는 생각이 있다.
‘근데, 이거 좀…….’
이어지려는 자괴감을 진유리는 고개를 흔들며 흩어냈다. 차마 자기 자신에게 ‘음습하다’라는 표현을 쓰긴 싫었으니까.
‘아니, 아니야.’
애써 부정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세아에게 말했다.
“나 금방 씻고 올게. 이십 분 안에.”
“천천히 해도 돼.”
이세아는 차분히 답했다. 아마 그녀 혼자 심심할까 봐 저러는 듯한데, 그간 겪은 바에 의하면 진유리는 씻는 데 기본적으로 삼십 분은 넘게 걸리곤 했다.
그래서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이었건만…… 어쩐 일로 진유리가 쌩하니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세아는 주변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그냥 만들어놓기만 한 SNS 계정으로 진유리와 함께 찍은 사진의 반응을 구경했고, 본인이 한 말 그대로 진유리는 채 이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조금 젖은 머리칼로 욕실을 나섰다.
그리곤 은근한 말투로, 눈치를 살피듯이 이세아에게 제안한다.
“근데 세아야, 있잖아…….”
“왜?”
“나 기왕 여기 왔는데 산책도 좀 하고 싶어서…… 계곡 같은 데 가보고 싶은데, 나랑 같이 가주면…… 안 돼?”
“…….”
이세아는 흘겨보는 눈으로 진유리를 조용히 바라봤다. 저쪽도 찔리는 게 있는지 괜히 몸을 꼬며 모른 척한다.
왜 빨리 씻고 나오겠다고 한 건지 이제야 앙큼한 속셈을 알 수 있었고, 이세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빠 계곡 쪽에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날카로운 물음에 진유리가 손을 꼼지락대며 어설프게 둘러댄다.
“아니이…… 그런 거는 아니구…… 그냥, 가평 왔는데 계곡 구경도 해야 하니까……. 근데에…… 교수님한테 연락은 안 해봤어?”
“……뭘?”
“그으, 지금 어디 계신다구…….”
“…….”
“…….”
십여 초의 침묵.
이윽고 이세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행동만으로도 진유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문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따라오며 묻는다.
“같이 가줄 거야?”
“미리 전화는 안 해볼 거야.”
“응! 괜찮아, 고마워! 세아야, 진짜 사랑해! 생일 축하해!”
너무나도 기뻐하는 표정과 목소리. 그게 안쓰럽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심통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세아는 진유리를 데리고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도진도 이리로 갔겠지. 다른 곳은 덥기만 하고, 낮에 놀 때도 계곡이 괜찮다며 꽤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팔과 팔이 닿을 만큼 이세아와 가까이서 걷던 진유리가, 왠지 아련하게 들리는 어조로 말한다.
“교수님…… 더 멋있어지신 것 같아.”
이젠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쉰 이세아가 물었다.
“어디가?”
“그냥 분위기가 좀, 방학하기 전보다 더 우수에 차 계신 것 같고…… 은근히 고뇌 같은 게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나도 이유는 잘 모르고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긴 한데…… 난 그렇게 보였어.”
진유리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 대로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듣는 이세아로선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오빠가…… 그랬다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전과 똑같이 그녀를 챙겨주려 하고, 그러면서도 거리감에 조금 서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는데.
진유리의 말이 사실인 걸까. 사실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리고…… 왜 자신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걸까.
마음에 일렁이는 자책감을 새기며 이세아는 계속해서 걸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두 사람 앞에 개울가가 나타났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 바람도 불고, 매미 소리도 울리고 있어 오히려 낮보다도 더 시끄럽게 느껴졌다.
해서 두 사람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 눈으로 먼저 발견했다.
저 멀리,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는 계곡의 바위.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의 여성과 이도진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어? 어……?”
“……세라 언니?”
그저 당황하기만 하는 진유리.
나직이 의아해하는 말을 흘리는 이세아.
반응은 달랐으나 이후에 이어진 행동은 같았다.
두 사람은 황급히 소리를 죽이고,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목표 지점은 저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커다란 바위와 나무로 가려진 곳에 이른 두 염탐꾼은 속닥이며 대화를 나눴다.
“뭐야? 저 사람, 그…… 한세라 씨 맞지? 저분이 왜 여기 계셔……?”
이렇게 된 바에야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이세아는 사실대로 답하기로 했다.
“세라 언니도, 이 근처로 휴가 왔다고 했어. 근데 오빠한테는 말 안 했는데…….”
“그럼 나한테는……?”
“아…….”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진유리의 목소리에는 거의 배신감에 가까운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사실 이세아가 그녀에게 한세라가 어디로 휴가를 가는지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그냥,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니까. 이세아가 작게 답한다.
“……미안. 그냥, 말하기 좀 그래서…….”
“…….”
진유리는 물끄러미 그녀를 봤다. 드물게 전세가 역전된 상황. 싸늘한 분위기에 이세아가 변명을 주워섬겼다.
“너 괜히 신경 쓸 거 같고…… 세라 언니가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고…… 그냥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싶어서…… 미안해…….”
“……그래?”
짐짓 냉랭하게 답한 그 시점에 이미 진유리의 서운함은 다 풀려 있었다. 말을 안 해준 이유도 수긍이 되고, 엄밀히 따지면 말해줄 필요도 없는데, 그래도 저렇게 미안해하니까.
그녀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있기에 이토록 미안해하며 사과하는 거겠지. 그거면 충분했고, 더군다나…….
‘혹시, 나 이제…… 1차 서류는 통과한 건가……?’
수학여행 당시까지만 해도 시누이 선에서 컷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여행에 따라올 수 있게 도움을 줬고, 적의 동태를 알리지 않은 것도 사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력 차야 어쨌든 한세라와 진유리 자신을 같은 기준으로 봐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오히려 섭섭한 마음보다는 기쁨이 컸고, 마음을 굳게 먹은 진유리는 이세아에게 일렀다.
“아니야, 괜찮아. 응, 내가 더 미안해. 너한테 뭐라고 할 거 아닌데.”
“……고마워.”
“근데, 교수님이랑 저분이랑…… 그럼 미리 약속하고 만난 건…… 아닌가?”
“나도 잘 모르겠어. 세라 언니가 오빠한테 말 안 해달라고 했는데…….”
진유리가 전한 이해심에 안도한 이세아가 이제는 의문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이도진은 몰랐을 텐데. 우연히 만난 것뿐인 걸까.
아니면 어느 시점부터는 이도진도 알고 있었고, 둘이 따로 연락해서 만나기로 한 걸까.
본인도 이도진과 진유리를 속였으니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둘이 그녀 몰래 약속한 거라면…… 그건 좀 많이 싫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필요하지도 않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일단 들어보자.”
“응.”
진유리의 제안에 이세아가 답했고, 두 사람은 귀를 쫑긋 세워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파악한 정보.
‘우연히 만난 거네…….’
미리 약속한 게 아니다. 정말로 우연히 산책하다 만난 거였다. 이세아의 기분이 아주 약간 좋아졌고, 하지만 이번엔 또 진유리가 침울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저 두 분…… 원래도 저렇게 친하셔?”
“……?”
영문을 모르겠는 물음에 이세아는 염탐하고 있는 곳을 살폈다. 함께 물에 발을 담근 이도진과 한세라가 편안히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그대로 답했다.
“둘 다, 살짝 어색해하는 거 같은데…….”
“……저게?”
“응, 원래는 저거보다 더 친해. 요즘 싸워서, 약간 조심조심하는 거 같아. 화해하려고 분위기 살피는 느낌?”
“저게……?”
압도적인 충격에 진유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연인 수준이 아니라 젊은 부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저 모습이, 저렇게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저게 그나마 싸워서 어색해하는 거라고?
‘그건 반칙이잖아…….’
진유리가 한세라를 실제로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그녀가 제일고에 특강을 왔을 때. 하지만 그때는 온전한 의미에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직접 대화한 것도 아니고, 영원 길드에 대해 알리려고 나온 사람과 그걸 듣는 학생으로서의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니 엄밀한 의미로 ‘한세라’라는 사람과 맞닥뜨린 건 오늘이 처음.
그리고…….
진유리는 특강 당시에도 충격적이었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조금도 진면모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이 내리쬐는 밤이라서 그런 걸까. 맑은 계곡이라는 배경이 주는 힘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겠지.
‘엄청 편안해 보여…….’
이따금 웃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도진과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도 예뻤다. 한마디로, 둘이 엄청나게 잘 어울린다.
단순히 목소리가 좋고, 말투와 몸짓이 세련되고, 외모가 뛰어나고, 그런 이유가 아니다. 시너지 효과라고 하는 게 옳을까.
서로를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또 잘 어울리니까, 그래서 저렇게 예쁘고 멋있어 보이는 거다. 한세라와 이도진 둘 다.
‘같은 기준……?’
진유리는 아까 들떠 있던 기분이 허망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세아가 그녀와 한세라를 같은 기준으로 봐준다고 치자. 하지만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 저렇게 예쁘고,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지금 저 둘이 보여주는 광경의 절반이라도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고, 지금의 두 사람과 같은 나이가 되더라도, 그래도 자신이 그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 잘 안 된다.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실의에 잠겨있는 그녀에게 이세아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두 분 일어날 때까지…… 계속 보고 있을 거지?”
하지만, 그래도 진유리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얼마나 예뻐질지, 얼마나 성장하고 어른스러워질지, 얼마나 지식과 지혜와 실력을 쌓아 올릴지. 그건 지금은 모르는 거니까.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모른다.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다음 문제는, 최선을 다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녀가 다시금 의지를 다질 때쯤, 이도진이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가시려나 봐.”
염탐을 멈춘 두 사람은 재빨리 바위 뒤로 숨었다.
저쪽이 자리를 뜰 때까지 들키지 않고, 조금 있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다.
한데…….
“보여?”
“아니.”
진유리의 물음에 이세아가 답한다. 금방 다른 곳으로 갈 것 같던 이도진과 한세라의 기척이 없었다. 길이 한쪽으로만 있으니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보여야 할 텐데.
이렇다 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때마침 매미가 시끄럽게 운 탓도 있고, 이제까지처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결국 진유리와 이세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아직 저기 있고, 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리고 목격하고야 말았다.
발만 담근 게 아니라 아예 물에 들어가 있는 이도진과 한세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상체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거리가, 얼굴과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뒷모습만 보았을 땐, 다음 순간에는 더 가까워지겠다고, 더 나아가 아예 닿겠다고, 그럴 의도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장면.
진유리가 외마디 소리를 낸 건 사실상 불가항력이었다.
“아앗-! 으읍-”
“……!”
경악한 이세아가 황급히 진유리의 입을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소리는 퍼져 나갔고, 이도진과 한세라가…… 이쪽을 보고 있다.
저벅, 저벅.
이도진이 앞장서고,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이세아는 침을 꼴깍 삼켰고, 진유리는 생각이 정지된 상태로 되뇌었다.
‘어쩌지…….’
불현듯 예전 생각이 난다. 이세아의 집 근처에서 이도진과 그가 잠깐, 아주 잠깐 만난 여자친구가 싸우는 걸 목격했던 일.
그때는 초범이었지만 지금은 두 번째고, 상황도 더 안 좋다. 맹랑한 염탐꾼 둘을 바라보는 이도진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이 쬐끄만한 것들을 혼내고 싶은데, 또 그러기도 뭐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꼭 이런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
도주할 생각도 못 하고 서 있는 두 사람에게 그가 다가왔다. 키 차이 때문에 내려다보는 시선.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던 그때, 뜻밖에도 적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세아, 생일 축하해. 직접 얼굴 보고 말해서 다행이다.”
한세라가 살갑게 웃으며 전한 말. 이세아가 겨우 답한다.
“아, 응……. 고마워, 언니.”
“학생은 이름이…… 진유리 맞죠? 세아 친구. 나 누군지 알겠어요? 제일고 특강 때 서로 봤을 텐데.”
“네? 아, 네! 그으……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생일 축하해주러 왔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세아랑 친하게 지내주면 좋겠어요.”
“네…….”
진유리는 압도당하는 심정으로 답했다. 한세라와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대면한 건 처음. 밝은 달빛을 받은 그녀의 용모가, 실로 불가사의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도진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한세라에게 건넸다.
“자, 고장은 안 난 것 같은데.”
“고마워. 응, 잘 켜지네.”
“앗…….”
“아…….”
진유리와 이세아는 이제 정황을 깨달았다. 물에 들어간 것도, 얼굴이 가까웠던 것도, 발칙한 상상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냥, 휴대전화가 떨어져서 찾으려고.
안도와 허탈함에 열여덟 살 둘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스물다섯 살 이도진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마침 나도 가려고 했으니까…… 슬슬 숙소로 갈까?”
“응…….”
“네에…….”
거기서 상황이 마무리되었어도 분위기가 좀 어색하긴 하지만 수습은 됐겠지. 하지만 남은 스물다섯 살 한 명, 한세라가 문득 이세아와 진유리에게 묻는다.
“바로 갈 필요는 없지? 유리 학생도요.”
의아해하면서도 두 사람이 그렇다고 답했고, 그러자 한세라가 이번에는 이도진에게 말했다.
“너 아까 그랬잖아? 이제 우리 성인이고, 좀 그렇지 않냐고.”
“응?”
이도진의 반문에 한세라가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여기 고등학생도 두 명 있고, 그럼 평균연령이 좀 많이 내려가잖아? 바로 갈 필요도 없다고 하고.”
“야, 너-”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이도진이 손사래를 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분명히 장난을 치는 건데, 그런데도 굉장히 세련되게 보이는 동작으로, 한세라가 이도진을 붙잡아, 같이 물속으로 낙하했다.
풍덩-!
크게 물결이 일고, 다음 순간에 머리부터 온몸이 다 젖은 한세라와 이도진이 물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한세라가 이세아를 보며 쾌활하게 말한다.
“호응 안 해주면 언니 좀 창피한-”
그녀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뒤에서 들어온 이도진이 한세라에게 보복을 가한 것이다. 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복잡해 보인다. 즐거워하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맞는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 그때 진유리가, 자기도 모르게 양손을 뻗었다.
풍덩!
기습적으로 등이 떠밀려 물속으로 떨어지는 이세아를 보며 진유리는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잘 모르겠다. 염탐하다가 들키고, 무시무시한 적이 짝사랑하는 교수님을 물에 빠뜨리고, 자신은 거기에 동참해 유일한 아군이자 친구를 물에 빠뜨렸다.
이게 맞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모르겠어.’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도진이 고민하는 게 있으면 지금만은 걱정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예쁘고 똑똑하고 세련된 한세라는, 짧게나마 대화를 나눠보니 무척 서글서글한 면도 있고, 장난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계곡에 놀러 왔는데, 소중한 친구와, 이세아와 물장난도 치고 싶었다.
그냥, 그것뿐이었다.
“으아앗!”
고민을 다 날리듯 소리 높여 외치며 진유리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이세아가 손을 떨친다.
촤아아악-!
마력으로 쳐낸 물결이 세 갈래로 나아갔다. 진유리와 이도진과 한세라의 얼굴로.
전쟁의 선포 같은 공격에 세 사람이 맑게 웃었다.
***
7월 26일 월요일, 오후 열 시.
세면도구를 챙긴 유해빈이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용이…… 출격 준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