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Chapter 36. 진심 (1)
그녀가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이도진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유해빈 자신만 알고 있을 뿐이다.
‘교수님이랑 있을 때는 그저 예쁜 척, 상냥한 척, 배려심 있는 척, 그러면서도 은근히 유혹하고, 대화 주고받을 때는 완전 매력 있는 척하고, 그런 모습만 보이면서…….’
실제로는 가련한 아기용한테까지 숨 쉬듯이 견제구를 날리는 것이다.
유해빈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도진과 함께 집에 쳐들어온 서연희가 주황색 마력으로 남긴 ‘경고야’ 세 글자를.
‘이거 그러면…… 오늘은 보스 대신에 내가 활약해야 하는 건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 없다고, 서연희 본인은 집에서 쉬면서 부하인 그녀에게 일임한 걸지도 모른다. 알아서 커트할 건 커트하라고.
하지만…….
‘나 아직 저런 거까진 감당할 자신 없는데…….’
유해빈은 티가 나지 않게 약간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일이 미터쯤 떨어진 공간. 실로 숨이 막힐 것처럼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다.
“한 대표님도 휴가를 오셨군요. 남이섬은 이번이 처음인데 경치가 아주 좋다 싶습니다.”
“나도 처음 와봤네.”
진유리의 아버지가 대단히 사교적인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 하나 정작 그 상대인 한태강은 썩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다만 진철민 부부와 진유리, 유해빈 자신, 그리고 이세아에게 화가 난 건 아닌 듯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도진쿤, 도망쳐……!’
지금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유해빈이 마음속으로 애타게 외쳤으나 들리진 않았을 테고, 한태강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자기 혼자서 받고 있던 이도진이 그에게 공손히 말을 건넨다.
“이쪽으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시연회 때는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일 없다.”
일동 침묵.
이세아와 진유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진철민 부부는 무척 미안해하고 난처해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한세라가 태연하게 나섰다.
“그러고 보니까 아빠, 세아한테 생일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한데 어쩐 일인지 한태강이 입을 떼지 않고 있다. 답한 건 이세아였고.
“어제 문자로 보내주셨어. ……엄청 길게.”
“세아도 답장을 예쁘게 해줘서 아저씨가 고맙게 읽었다.”
“흐으읍…….”
유해빈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세아야 한태강이 그만큼 마음을 써줬단 걸 알리려고 한 말이겠지. 한태강도 답장을 읽고 기뻤던 거고. 하지만 듣고 있으니 뭔가 웃음이 나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같은 한태강이 아끼는 조카딸 생일이라고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도, 단답 전문가인 이세아는 뭐라고 답장을 했을지도.
그리고 유해빈은 곁에서 전해져 오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
진유리가 그녀를 마치 쓰레기 보듯 응시하고 있다.
‘아니, 뭐, 그냥 단순히 우습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방금 대화로 조금은 분위기가 풀렸고, 그나마 이도진에게서 시선을 거둔 한태강이 일렀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또 뵙지요. 너희도 재밌게 놀거라.”
차례대로 진유리의 아버지, 어머니, 고등학생 세 명에게 건넨 인사.
이도진에게만 별말이 없는 채 몸을 돌린 그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차분히 인사한 한세라도 아버지를 따라갔고, 어쩐지 적막한 분위기를 바꾸듯 이도진이 말했다.
“보트 먼저 탈지 수목원을 먼저 갈지 정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의견 받겠습니다.”
정확히 연령대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사십 대 중반의 진철민 부부는 묻고 따질 것 없이 수목원.
하지만 진유리도, 이세아도, 유해빈도, 정적인 수목원보다는 보트부터 타러 가고 싶었다.
2대3인 상황에 최종 결정권은 이도진에게 넘어갔고, 무언으로 요구하는 이세아의 눈빛을 살핀 그가 말한다.
“……보트로 하겠습니다.”
유해빈은 내심 생각했다.
‘동생이 보트 타고 싶다고 하면 없던 강도 만들어줄 인간…….’
그래도 선택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유해빈은 그렇게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
“…….”
“………….”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한태강의 눈빛이 따갑다.
지금이 오후 네 시 반.
벌써 다섯 번째였다.
남이섬 여행 코스를 하나씩 밟아 나가다 그와 마주친 게.
우선 보트를 타러 가서 만났다.
두 번째로는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공교롭게 한태강과 세라도 우리와 같은 식당으로 왔다.
세 번째로는 수목원을 거닐다가 세라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한태강을 발견했다.
네 번째로는 진유리와 세아가 먹이를 주던 다람쥐가 갑자기 뛰어가길래 나랑 유해빈까지 쫓아갔는데, 저편에서 토끼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세라와 마주쳤다.
그리고 지금이 다섯 번째.
다행히 그리 덥지 않아 숙소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대여해 섬을 한 바퀴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마침 한태강과 세라도 자전거를 대여하러 왔는지 마주친 거다.
사교적인 성격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진유리네 부모님은 생각보다도 넉살이 좋았다.
“어머, 또 뵙네요.”
“이야, 한 대표님.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님이랑 같이 다녔어도 좋았겠다 싶어요.”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나로서는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로 한태강이 언짢아하지 않고 답했다.
“진 대표 말대로 자주 보는군그래. ……같이 다녔어도 됐겠어.”
“하하, 그렇죠? 아, 그러고 보니 대표님은 숙소를 어디로 잡으셨습니까?”
그렇게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세라가 내게로 걸어와서 말한다.
“남이섬 여기, 되게 괜찮네.”
“응, 그러게.”
한태강이 나와 세라 쪽을 본다. 어떤 감정을 띠고 있는지 알기 힘든 표정. 다만…… 어쩐지 불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나와 자주 마주치는 것도.
세라가 내게 말을 거는 것도.
그즈음 진유리의 어머니가 딸에게 일렀다.
“유리야, 너희는 자전거 타고 놀고 있으렴. 엄마랑 아빠는 한 대표님이랑 말씀 좀 나누고 있을게.”
그러더니 근처의 카페 쪽으로 세 사람이 걸어간다.
“…….”
졸지에 혼자 남은 세라와 나, 진유리와 유해빈과 세아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뜻밖의 상황이 가져다준 적막감. 대화의 물꼬를 틔운 건 유해빈이었다.
“교수님, 저는 마력 자전거 타려고요. 이세아 너는 교수님이랑 탈 거지?”
“……맞아.”
어쩐지 흡족해하는 눈으로 유해빈을 보던 세아가 내 옆으로 한 걸음 다가온다. 이제 남은 건 세라와 진유리.
세라가 살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유리 학생은 나랑 탈까? 괜찮아?”
“케헥-! 아, 네, 네…….”
놀란 것처럼 헛기침하던 진유리가 침울하게 승낙했고, 세라가 웃으며 일렀다.
“어제도 같이 놀고, 오늘도 이렇게 자주 봤는데, 언니가 이제 말 놔도 되려나? 학생 안 붙이고 그냥 유리라고 부르고 싶은데.”
“으앗! 아, 네…… 언니.”
그렇게 세 팀으로 나눈 우리는 자전거를 대여해 섬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유해빈이 앞장서 달렸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고, 세라와 진유리는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주로 세라가 묻고, 진유리가 조심스럽게 답하는 느낌.
그리고 나와 세아는…….
“있다가 숙소 들어가면…… 나 오랜만에 ‘그거’ 해줘.”
“해줄 수는 있는데, 고객님 런던 가 계시는 동안 안마 비용이 올랐는데요.”
“오빠 원하는 거 있으면, 어지간하면 다 해줄게.”
일단 오빠 소리를 들었으니 한 번 비용으로는 충분했다. 이러면 뭐, 삼십 분도 가능이지.
섬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세라가 제안했다.
“여기서 잠깐만 경치 구경 좀 하고 갈래?”
그 말에 따라 자전거 세 대가 멈췄고, 우리는 멀찍이 보이는 강과 산을 눈에 담았다. 내 옆에서…… 세라가 말을 건넨다.
“내 말이 맞았지?”
“응?”
“어제 말했잖아. 아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 미워하거나 화나신 거 아니라고. 어때? 지금도 반만 믿을 거야?”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어제는 반도 안 믿었어.”
“뭐, 그럴 것 같더라. 그러면 지금은 어떤데? 어제보다는 더 믿겠지?”
“……딱 절반.”
“절반? 너무 적게 잡은 거 아니야?”
세라가 웃으며 물었고, 나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답했다.
“나머지 절반은…… 최소한의 양심.”
“음…… 그런 것도 있었어?”
진심이지만 농담.
농담이지만 진심.
그런 물음에 나는 말 없이 풍경을 바라봤고, 세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으으, 가만있으니까 덥네. 교수님, 출발해요!”
유해빈이 외쳤고, 우리는 다시 자전거를 몰아나갔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 맞이한 오후 아홉 시 무렵.
“흐으…… 더 세게, 응, 거기, 살짝만 위에, 응, 거기랑 좀 더 안쪽. 으음…….”
침대에 엎드려 누워 기분 좋은 숨소리를 흘리던 세아가 몸을 축 늘어뜨린다. 목덜미와 티셔츠가 방금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안마를 시작하고 한 시간 가까이 됐나. 상당히 오랫동안 정교하게 마력을 조절하려다 보니 나도 꽤 힘이 들어 땀이 났고, 세아가 얼추 만족했겠다 싶어 물었다.
“이제 그만해도 되나?”
“음…… 오늘은.”
이렇게 받아놓고 집에 가면 내일도 시킬 거라는 말인데. 그야 해주는 건 해주는 건데…… 조금 황당한 심정으로 세아에게 물었다.
“이세아 씨, 영국 가 있을 때는 이거 받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대요?”
“……안 그래도 힘들었어.”
“……그래?”
정직한 대답에 당황한 건 내 몫.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세아가 말을 이었다.
“나 혼자서도 해보고 유리한테도 한 번 비슷하게 해달라고 해봤는데…… 이 시원한 느낌이 아니야.”
“아…… 그러세요?”
“응. 중독된 것 같으니까, 중독시킨 본인이 책임지고 앞으로도 해줘야 해. 아니,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개까지 숙이며 공손히 부탁하는 모습. 기쁘다기보단 곤란한 느낌이라 나는 답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안마비 선불로 낸 거야.”
“아, 네…….”
내 대답은 들은 척 만 척 침대를 빠져나온 세아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긴다. 그리곤 욕실 쪽으로 가더니 문 앞에서 내게 말했다.
“나 씻고 나서 유리 만나고 올게. 좀 늦을 수도 있어.”
“너무 늦게 오지는 말고.”
잔소리처럼 말하면서도 나는 세아가 늦게 돌아올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당연히 알지만…… 모른 척 놀라주는 게 예의겠지.
***
오후 열 시.
숙소에 머무르던 한세라는 작은 방에 들어가 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주무시려고요?”
“……그래.”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서 답한 말. 대답을 들었는데도 그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한데 그때, 한태강이 눈을 감은 채로 일렀다.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