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Chapter 36. 진심 (3)
바람 쐬고 올 생각 없냐는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짐짓 모른 척하며 반문했다.
“갑자기? 왜?”
“그러니까…….”
이세아는 말을 흐리며 단어를 고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기 오빠를 염탐하고 와 달라고 대놓고 말하긴 꺼려지는 바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세아보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진유리.
“너 지금 몰래 살짝 나가서 교수님이랑 세라 언니 두 분 무슨 얘기 하시는지, 내용 듣고 와서 우리한테 알려줘. 들키면 그냥 바람 쐬러 나왔다고 둘러대고, 우리가 시킨 적은 없는 거야. 할 수 있어?”
“음…… 맨입으로?”
“아잇, 시간 없다고. 개학하면 9월 한 달은 내가 필기한 거 너한테도 보여줄게. 이거면 됐지? 빨리.”
“흠, 벌써 세 시 넘었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얘들아, 나 나갔다 올 테니까 너희 둘이 놀고 있어 봐.”
능청을 떤 유해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진유리와 이세아만 급했던 게 아니다. 늦게 갈수록 들을 수 있는 대화가 줄어들 테고, 그녀도 가능한 한 빨리 접근하고 싶었다.
‘대놓고 내려가면 들키겠지?’
당당히 정문으로 나설 수는 없는 상황. 숨기 좋은 사각지대를 찾아야 했다.
‘아, 저기로 갈까?’
그녀의 눈에 띈 장소는 객실과 바깥 사이를 연결하는 테라스. 이세아와 진유리가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유리문을 열어젖힌 유해빈은 타앙- 하고 경쾌하게 발을 굴렀다.
그대로 객실을 빠져나온 그녀는 꽤 고도가 높은 공중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기 있네.’
그녀가 나선 테라스와 반대편 방향. 이도진과 한세라가 나란히 걸어가 나무로 가려진 흡연 구역에서 멈추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 느릿하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은밀한 동작으로 그 근처에 이른 유해빈은 십 미터 상공에서 귀를 쫑긋 세웠고, 이내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무들로 시야가 가려져 있는 건 유해빈도 마찬가지여서 이도진과 한세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만 듣기에는…….
‘좀, 미묘하네.’
이도진과 한세라 두 사람 다 편안해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퍼하는 것도 같았다.
“너도 피우려고?”
“아니야, 너 혼자 나가면 심심할까 봐 따라 나온 거라서. 왜? 같이 피워줄까? 저번에 그때, 두 번째 피우면서 요령은 파악한 것 같은데.”
“됐어. 빨리 피우고 들어가자.”
치익, 라이터를 켜는 소리.
후우- 하고 한숨처럼 숨을 내뱉는 소리.
이어서 이도진이 말을 꺼냈다.
“세 시 반 다 돼가네. 내가 할 소리는 아닌데…… 이렇게 늦게 들어가도 괜찮나?”
“……아마도? 아빠가,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오라고 하셨거든.”
“내 생각에 너 이렇게 늦을 줄은 모르셨지 싶네.”
“그래도 오늘은 어쩔 수 없잖아? 불효인 거 알아도…… 오늘은.”
엿듣고 있던 유해빈은 ‘오늘’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도진쿤 생일이라서?’
얼추 보고 들은 정황을 종합해 보면 약혼을 이어나갈 것 같진 않고 파혼할 듯하지만…… 그래도 확정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도진의 생일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어서.
유해빈은 그렇게 짐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를 들어보니…… 크나큰 착각이었고.
이도진이 한세라에게 묻는다.
“재밌었지?”
“응, 재밌었어. 너는?”
“나도 재밌었어. 어제…… 이제 어제는 아니네. 월요일에 계곡에서 논 것도, 어제 다 같이 다니면서 남이섬에서 논 것도, 오늘 너랑 애들이 생일 축하해준 것도. 다 재밌었어. 정말 많이.”
“그것뿐이야?”
“……아니.”
이도진이 답하자 한세라가 담담하게, 마치 확인하듯이 말했다.
“재밌었는데, 아무리 재밌어도 이렇게 우리 멋대로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마지막이니까, 딱 이번 여행까지만, 그런 생각 한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본 거야?”
“……정확해. 너는?”
“나도 너랑 어느 정도는 비슷해. 아무리 재밌었든, 너랑 내가 그걸 싫어하든 좋아하든, 이게 마지막이면, 조금만 욕심부리고 싶어서. 이번 여행까지만 그러고 싶었어. 그렇다고 계곡에서도 남이섬에서도 너 일부러 찾아다닌 건 아니고, 우연히 만난 거지만…… 이건 너무 구구절절한가?”
“딱히, 그렇지도 않아.”
그리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유해빈은 이제 한세라가 ‘오늘은’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추억 만드는…… 그런 건가?’
이도진도, 한세라도, 둘 다 이번 여행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들이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인 걸 알아서.
그래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린 거라고.
‘……잘 모르겠네.’
유해빈은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잘 모르겠다.
그렇게나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면서 왜 파혼해야 하는 건지.
대체 한세라를 얼마나 좋아했길래 그토록 냉철하고 철저한 이도진이,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는지.
척 보기에도 굉장히 똑똑해 보이는 한세라는, 이도진을 잘 알 텐데, 왜 파혼하겠다는 그의 뜻에 따라주는 척하면서도 한 번씩 다시 다가오고, 그런데도 왜 정작 강하게 어필하지는 않는 건지.
그런 걸…… 도저히 잘 모르겠다.
그냥…… 서연희가 대단하다는 것만 확실하게 알겠다.
‘내가 보스처럼 세고, 도진쿤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였으면…… 약혼녀고 뭐고 안 봐줬을 텐데.’
이도진과 한세라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두 사람을 알아왔기 때문일까.
이도진과 만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유해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이도진도, 한세라도, 서연희도. 너무 복잡한 관계였다.
그즈음 이도진이 다시 입을 뗐다.
“그래도, 너 생일선물은 꼭 주고 싶네. 나만 받는 건 좀 그렇고.”
“선물? 아니야, 됐어.”
옅게 웃은 한세라가 사양한다. 단순히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일까. 이제는…… 정말로 만나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그거 나 줄래?”
“이거? 담배?”
“응, 너 지금 가지고 있는 케이스랑 라이터까지 전부.”
“줄 수는 있는데…… 이걸 생일선물로 달라고?”
“아, 피우진 않을 거야. 피우고 싶으면 내가 사면 되고, 그건 그냥 가지고 있을 거야.”
“피운다고?”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무튼, 나 줄 수 있어?”
“……여기.”
손에서 손으로 뭔가를 건네는 소리. 그리곤 한세라가 말한다.
“거의 새거네. 하나만 더 피울래? 나도 받은 기념으로 하나만 피워보게.”
치익, 칙.
두 번 불을 붙이는 소리.
그다음으로는 두 사람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고, 한세라가 잔잔한 어조로 묻는다.
“어때? 이제 전보단 나아졌지?”
“응, 그러네.”
나직한 답에 이어 방금보다 조금 더 잔잔한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 생일선물로, 이거 하나만 너한테 부탁해도 되려나?”
“뭔데?”
한세라가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러다가, 편안한 목소리로,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음에 너랑 나랑 만났을 때, 그땐 아마 파혼하고 나서겠지만,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친구로서, 네가 열심히 잘 살면 좋겠지만 내가 보기에 네가 조금 엇나가는 것 같아서 참견하고 싶을 때. 어쩌면 그럴 때가 있을 수도 있잖아?”
“응, 그럴 때가 있으면?”
“그때는 내가 하는 말, 흘려듣지 말고 제대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너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내가 아니겠지만…… 나 장담할 수 있거든.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이도진을 제일 잘 아는 건 나라고.”
“…….”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까, 그때는 내 말 잘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생일선물이라기엔 좀 뭐한데,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그럴게.”
두 사람이 담배를 다 피웠는지 호흡 소리는 이전처럼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유해빈은 아주 조심스럽게 객실로 돌아왔고, 그러자마자 이세아와 진유리가 물었다.
“……어땠어?”
“빨리 말해. 두 분 왜 이렇게 안 오셔?”
“아, 몰라.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잡담 좀 하다가 길어지는 거 같던데 곧 들어올걸?”
유해빈은 퉁명스레 되받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별다른 소득도 없이 9월 한 달 동안 그녀에게 노트를 보여줘야 하는 게 분한지 진유리가 노려보고 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또 한 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서 재밌게 놀면서, 한번 보고 와. 그러고 나면, 언젠가는 보일 거야.’
서연희에게 들었던 말.
하지만 모르겠다.
일부러 꼭 감은 눈으로는 깜깜한 어둠만 보인다.
‘뭘 보고 오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생각나는 것 하나.
한세라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이도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그건 틀림없이 그녀의 진심이겠지.
이도진에게 했던 말 모두 그녀 자신은 진심을 담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근본적으로 틀렸다.
‘……그쪽은 전혀 몰라.’
제일고에 특강을 와서 그녀가 했던 말.
각성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 개개인의 신념에 우선한다고.
‘웃기지 마.’
그런 말을 당연하게 하는 사람이 이도진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절대로.
***
7월 28일 오전 열 시.
어질러진 짐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침대에 누워있던 세아가 몸을 뒤척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했는데…… 그래도 좀 시끄러웠나?
“흐으…….”
헝클어진 머리칼에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세아가 졸린 한숨을 낸다.
“좀 더 자. 열두 시까지만 나가면 되니까.”
“……나 ‘그거’.”
“……?”
들릴 듯 말 듯 말한 세아가 엎드려 눕는다. 그러더니 보채듯이 내게 요구했다.
“어제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해. 주물러줘, 주물러주세요…….”
존댓말 들었으니까 봐준다.
피식 웃으며 침대로 간 나는 엎드려 있는 세아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잠이 확 깨지는 않게, 부드럽게 마력을 흘려주며 물었다.
“점심은 뭐 먹고 싶어?”
“하으…… 음…… 갈비탕……? 하아…… 아-”
“아, 너무 셌나?”
“살살해…… 주세요…….”
여전히 몽롱하게 답한 세아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쥐었다. 간밤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혼잣말처럼 말한다.
“샬럿 선생님한테 연락 왔어…….”
“새벽에?”
“응…….”
“거기는 지금 새벽일 건데, 나중에 연락해드려.”
“응……. 오빠는, 집중…….”
이게 건방져 가지고.
오빠 소리 들었으니까 봐준다.
별의별 구실을 다 만들어서 봐주는 걸 나 자신도 인지하며, 나는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
런던 현지 시각으로 7월 28일 오전 두 시경.
전투의 여파인지 폐허에 가까운 강어귀로 들어선 샬럿 테이트는 돌아서 있어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에게 일렀다.
“거기,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
“…….”
몇 초의 적막.
마침내 상대가 등을 돌렸다.
가녀린 체구의 여성이었고, 외견이 아주 특징적이었다.
은빛 머리칼.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
그리고 토끼 가면.
세계 최강의 마검사, ‘소드 퀸’ 샬럿 테이트는 반갑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또 만났네? 이번에는…… 그때처럼 못 빠져나갈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