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Chapter 37. 납치 (1)
“…….”
선언하는 듯한 말에 토끼 가면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몇 초의 침묵. 샬럿 테이트는 조용히 힘을 모으며 기다렸고,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어쩐지 의욕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아, 그래? 근데 어쩌나. 미안하지만 난 생각이 좀 다르거든.”
위유우웅-
그녀의 앞으로 붉은색 마력이 일렁인다. 이내 그 마력이 검의 형태를 이루었고, 샬럿 테이트가 다시금 확언했다.
“나랑 제대로 싸워줘야겠어. 도망칠 수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 거고.”
이미 토끼 가면은 그녀의 간격 안에 들어와 있고, 지금은 이세아도 진유리도 없다.
이런 상황에선 결코 도주할 수 없겠지. 등을 보이자마자 마력의 검이 치명상을 입힐 테니까.
면역체를 활성화한 소드 퀸의 공격. 아무리 막으려 한들 방어 자체를 무의미하게 찢어발길 수 있다. 상대가 그녀와 같은 영웅 수준의 강자만 아니라면.
샬럿 테이트가 도발하듯 일렀다.
“요령껏 날 떨쳐내고 도망쳐봐. 쉽진 않을걸? 내 귀여운 제자들을 괴롭힌 벌을 받아야지.”
“하아…….”
나직한 한숨 소리.
이내 토끼 가면이 양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스으으…….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마력이 흘러나온다. 닿는 모든 것을 능히 잘라버릴 수 있는 가녀린 칼날.
그것을 경계하며, 샬럿 테이트가 한 발을 내디뎠다.
콰앙!
폭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토끼 가면의 눈앞까지 다다랐다. 재빨리 대응한 적이 양손을 떨쳐낸다.
파아아아-!
열 줄기의 마력이 샬럿 테이트의 진로를 막아섰고…….
“그걸로?”
미처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연기처럼 힘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면역체를 매개로 한 방어 마법이 토끼 가면의 마력을 무력화한 것이다. 이어진 공격.
쿠아아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소드 퀸의 검이 날았다.
‘잘하면 금방 끝나겠는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토끼 가면은 이 검격을 맞받아치지 못할 터였다. 그 정도의 기술도 없고, 마력도 없으니까. 하지만…….
스아아앗!
아예 흩어진 줄 알았던 열 줄기의 마력이 갑자기 일렁인다. 구 형태로 모인 파동. 그 힘이 샬럿 테이트를 밀쳐냈다.
피싯-!
예상보다 반걸음 떨어진 거리. 공격도 정확히 그만큼 빗겨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이 은빛 머리칼만 몇 가닥 잘라낸다.
그때 토끼 가면은 십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린 상태. 도주를 시도하는 그녀를 노려본 샬럿 테이트가 외쳤다.
“도망 못 친다고 말했지-!”
슈우우- 슈우우우.
허공에 빛무리가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일급 마법 이상의 위력을 담아낸 검. 도합 백 자루. 그 검들이, 토끼 가면을 향해 매섭게 떨어져 내린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공중으로 솟구치던 토끼 가면이 검격에 가로막혀 일순간 멈췄다.
타앙!
땅을 박차고 그녀를 쫓은 샬럿 테이트가 아주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베어내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지상에 붙잡아 두려는 목적. 튕겨 나간 토끼 가면이 재빨리 자세를 잡았고…… 그다음부턴 샬럿 테이트의 일방적인 공세였다.
퍼엉! 쿠아앙! 콰앙!
연이어 쏟아지는 검과 마력의 세례. 토끼 가면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 내심 감탄한 샬럿 테이트가 여전히 공격을 이어나가며 물었다.
“여긴 너 혼자 온 거야? 뭘 하려고?”
“…….”
토끼 가면은 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을 테고.
가면과 머리칼, 그녀의 가녀린 몸까지 얕게나마 생채기가 나고 있다.
퍼억!
방금 공격은 제법 세게 들어갔다. 샬럿 테이트의 주먹이 토끼 가면의 명치를 정통으로 때렸고, 크게 숨을 뱉은 그녀가 뒷걸음질한다. 여유롭게 쫓아 네 개의 검으로 적을 포위한 샬럿 테이트가 이어서 말했다.
“너희 보스랑 흰 가면 쓴 남자는 혹시 안 왔나? 그 둘은 꽤 악명이 높더라고. 아쉽네, 둘 다 왔으면 보기 좋게 가면을 베어버렸을 텐데.”
바로 그때.
샬럿 테이트는 기이한 변화를 감지했다.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방어하던 토끼 가면의 호흡이 뚜렷하게 흐트러진 것이다.
‘겨우 이딴 거로?’
아무래도 정신적인 면에서 생각보다 많이 미숙한 모양. 그게 신기하긴 했으나 그녀로서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하던 상대가 심적으로 동요했다. 당연히, 전세도 급격히 기울었고.
‘삼십 초 안에 끝나겠어.’
그리 확신한 샬럿 테이트는 점차 속도를 올렸다. 위기에 몰린 토끼 가면은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이다.
‘3, 2, 1.’
타앙!
정확한 타이밍을 노린 공격이 적을 저 멀리 튕겨 냈다. 반격할 수 있을 만큼 채비하려면 0.1초 이상 걸릴 터. 샬럿 테이트에겐 대단히 여유롭고 긴 시간이다.
퍼억!
뒤로 튕겨 나간 토끼 가면이 멈췄다. 그녀 자신의 의도가 아니다. 샬럿 테이트가 구현한 마력의 벽이 밀려 나가는 것조차 막아선 것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
영웅의 손으로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마력 자가면역반응 구성체. 그녀가 꺼낼 수 있는 최대치의 6할.
그 이상 힘을 발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토끼 가면이 즉사할 테니까.
‘살려서 데려가 줄게.’
테러조직 팬텀.
보스와 이인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토끼 가면 본인은 런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지난번에 마주쳤을 땐 무엇과 싸우고 있었는지.
오늘 이 자리…… 썩은 흙처럼 널브러져 있는 잔해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전부 알아내야 했다.
슈아아아악-!
빛의 검이 날았다.
토끼 가면은 피하지 못한다. 샬럿 테이트가 파악하고 있듯 그럴 만한 마력도, 그럴 만한 기술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을 냈다.
“……!”
불길한 직감에 샬럿 테이트는 급히 손을 움직였다. 본래 한 번 휘둘러 끝나야 했던 검격이 물리법칙조차 무시하듯 연달아 궤도를 바꾸며 날았다. 도합 일곱 번.
오른쪽 허리, 오른쪽 가슴, 목덜미.
왼쪽 어깨, 왼쪽 골반, 심장.
마지막으로 머리.
그러면서 샬럿 테이트는, 한 번 검의 궤도를 바꿀 때마다 마력을 더했다.
극히 짧은 순간에 더할 수 있는 마력은 1할 남짓. 하지만 소드 퀸이 가진 전력의 7할이라면 영웅이라 해도 막아내기 어렵겠지.
그 막대한 힘을.
모든 궤적을.
토끼 가면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타앙!
샬럿 테이트의 검이 튕겨 나갔고, 그녀는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다 읽혔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토끼 가면과 싸운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일 뿐이며, 기실 첫 번째는 전투라 할 만큼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저 잠깐의 공방.
그리고 오늘의 싸움도…… 지나치게 짧았다. 그녀의 검을 모조리 간파하기에는.
하지만 다 읽어낸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지금 일곱 번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올 수 없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력이……!’
그녀가 한순간에 발현할 수 있던 7할의 마력. 그 공격을 무리 없이 받아친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력을 다했다면 결과가 유의미하게 달랐을까?
샬럿 테이트는 그리 생각지 않았다. 준비할 여유가 부족했던 건 토끼 가면도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높게 잡아도…… 그녀의 7할과 적의 9할이 대등하다. 어쩌면 8할 이하.
그걸 깨닫지 못하고 상대를 낮게 평가한 대가로, 이번엔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와야 했고.
퍼억!
토끼 가면이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명치를 밀쳐냈다. 순간적으로나마 샬럿 테이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다급히 마력을 끌어모으면서도 그녀는 치명상을 각오했고…….
피유웅!
빈틈을 노린 토끼 가면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갔다. 공격을 이어나간 게 아니라, 여유가 생기자마자 곧장 도주해버린 거다. 싸우기 싫다던 처음의 의사 표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
튕겨 나가다 땅에 착지한 샬럿 테이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공간이동을 발동한 건지 토끼 가면의 기척은 벌써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놀아났던 건가…….’
토끼 가면은 일부러 약한 척했다. 상대의 전법을 모두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고선 도망을 쳐버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36 영웅의 기준으로도 강하다는 사실. 현재 전력만 따져도 그러했다.
당장 가진 힘.
방금 싸움에서 일부분 드러난, 경악스러운 재능.
한데 저런 강자가 고작 평범한 단원일 뿐이라니.
‘그러면 팬텀은…….’
그들의 보스.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이인자.
그 둘은 얼마나 강하단 것인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후우…….”
답답한 한숨을 쉰 샬럿 테이트는 주위를 둘러봤다. 토끼 가면이 쓰러뜨리고 있던 미지의 존재들은 흙으로 바스러져 형체조차 알기 어려웠다.
‘일단 조사나 해봐야지.’
이곳으로 요원들을 부르고자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
‘세아 일어났나 보네.’
보내놓은 메시지에 읽었다는 표시가 돼 있다. 아끼는 제자와 통화라도 하며 우울함을 달래고자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세아 일어났니? 거기는 아침이지?”
번역 마법을 쓰지 않고 서툰 영어로 답하는 이세아의 목소리에 그녀는 즐겁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 애들보다도…… 더 위일까?’
서른여섯 명의 영웅 이래로, 샬럿 테이트가 직접 목격한 각성자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
당대 최고를 넘어, 천 년 세월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진유리.
그런 진유리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고, 오히려 우세함을 보일 때도 있는 이세아.
토끼 가면의 재능은, 소드 퀸의 정수를 꿰뚫어낸 그 악마적인 재능은, 두 제자와 비교한다면 어떨까.
답을 알진 못하나 멈춰 서 있을 수도 없기에 샬럿 테이트는 씩씩한 어조로 이세아에게 일렀다.
“돌아오면 다시 열심히 훈련하자.”
***
8월 8일 일요일, 오후 여섯 시 무렵.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서연희가 나를 불렀다.
“도진아, 이도진.”
“네?”
방문을 열어놓고 연구에 집중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 은근하게 들리는 어조. 뭔가 제안할 게 있는 듯한데…….
서연희가 기대를 머금은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일 언제쯤 끝날 것 같아?”
“계속하려면 계속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만하고 쉬어도 상관없어요. 왜요?”
“그럼 우리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밖에서 안 먹은 지 꽤 됐잖아.”
7월 29일, 세아가 휴가를 마치고 출국한 날.
그날 저녁 나와 만난 서연희는 귀가하지 않고 이 집에 복귀했다. 여기가 본인 집보다 편하다나 뭐라나.
하필 그날 내 생일선물이랍시고 나를 아주 상냥하게 대해준 터라 거절하기도 좀 그랬고, 하루 이틀 있다 보니 어느새 열흘 넘게 이 집에 체류하고 있다.
“그때 다시 온 날 밖에서 먹고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외식 안 했죠?”
“응. 그리고 오늘 달이 안 뜨는 날이라서…… 나 기운도 좀 없고 그러네.”
일부러 가녀린 표정 지으면서 말 안 해도 들어줄 건데.
어떻게 보면 오늘이 마지막 고비다. 그녀의 힘이 가장 불안정한 삭월을 지나면, 이후로는 좋아질 일만 남아있으니까. 다음 만월엔 완벽히 회복할 테고.
“좋아요. 나가서 먹어요.”
“정말?”
“네, 둘 다 외모 바꾸고 나가서…….”
“응, 그건 바꿔야지. ……응? 왜 그래, 도진아?”
하던 말을 멈춘 나를 보며 서연희가 의아해한다.
“아, 별일 아니에요. 준비하고 일곱 시쯤 나가면 되겠죠?”
“난 좋은데…… 나가도 괜찮겠어?”
“괜찮아요.”
걱정이 담긴 물음에 차분한 척 답한 나는 욕실로 향했다. 시야에 일렁이고 있는 메시지를 굳게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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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3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8월 29일 자정까지 ‘천리안’ 심정웅의 손녀 심이수가 가진 진정한 목적을 파악할 것
-클리어 보상은 심이수와의 관계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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