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Chapter 37. 납치 (3)
짧은 순간 나는 가진 정보와 추측 몇 가지를 머릿속으로 엮어 나갔다.
오늘 밤부터 심이수와 심정웅이 행동에 나선다. 그 둘의 독단적인 결정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심가 구성원의 상당수가 돕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적들의 목표는 나일 가능성이 아주 컸다. 한태강에 이어 이번엔 내게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거다.
뜬금없이 심이수에게서 온 연락과 주관식 질문의 답이 오늘 밤으로 확정된 것까지, 그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틀림없겠지.
그러니 당면한 문제는 하나다.
이걸…… 유해빈이 지금 알게 해야 할까.
몇 초의 고민.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교수님, 왜요? 누군데요?”
고개를 갸웃하며 유해빈이 다가온다. 살짝 까치발을 들며 내 휴대전화 화면을 엿보는 시늉을 했고, 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학회에서 연락 왔네.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 테니까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으흠, 으흠! 저도 따라가고 싶은데-”
“고등학생이 담배 피우는 데를 왜 따라와. 더우니까 에어컨 켜고 차에 있어.”
“네에…….”
짐짓 시무룩한 얼굴로 답한 유해빈이 차 키를 들고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리고 흡연 구역으로 향한 나는 심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 이내 쾌활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바로 전화해주네?>
“오늘 밤에 보자고?”
<응, 집에 선물로 술이 한 병 들어왔는데 나 혼자 마시려니까 좀 많을 것 같아서. 선배 시간 괜찮나?>
“선약이 있어서 당장 가지는 못 하고, 좀 늦어도 상관없으면 갈 수 있는데.”
<시간은 상관없어. 몇 시쯤?>
“빨라도 아홉 시 반, 좀 더 늦으면 열 시 넘어서? 너무 늦나?”
<뭐, 괜찮겠네. 근데 늦게 오면 그만큼 늦게 가야 하는 것도 알지?>
“뭘 얼마나 먹이려고 그러냐.”
<몰라? 술이 좀 독해 보이는데…… 기대 중이야. 맞다, 선배 오면 할아버지 잠깐 자리 오실 수도 있을 건데 그래도 되려나?>
“나야 괜찮지. 그럼 가기 전에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나는 곧장 통신 마법을 활성화했다. 휴대전화 메시지나 전화 같은 수단을 쓸 수는 없고, 곧 연락을 받은 서연희가 묻는다.
<응, 무슨 일이야?>
침착한 물음. 나는 간단히 본론만 요약해 전했다.
“해빈이랑 바다 가서 회 먹고, 심가로 갈 거예요. 심이수가 보자고 해서.”
기실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말도 그 정도뿐이다. 심이수가 내게 위해를 가할 작정이라던가, 그게 정확히 언제일 거라던가, 그런 정보는 알리지 못한다.
심이수와 심정웅, 나까지 셋이 함께 걸어놓은 금제. 그들이 한태강을 습격한 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으니까.
정신에 작용하는 금제이기에 나 자신을 속일 순 없다. 나는 이미 그때 일과 오늘의 연락을 연관 짓고 있으며, 서연희라면 내가 어떠한 말을 했을 때 극히 높은 수준의 통찰력으로 진실에 근접할 것을 안다.
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걱정을 담은 몇 가지 당부밖에 없었다.
“해빈이한테는 아직 말 안 했는데, 누나가 걔 좀 챙겨주세요.”
<……나 오늘은 이 집에서 나가 있어야 하려나?>
내 예상대로다.
단 몇 마디의 말로 서연희는 많은 것을 눈치챘다. 심이수가 별다른 의도 없이 날 부른 게 아니며, 나도 그걸 짐작하고 있다고, 그런 사실을 파악해낸 거다.
까아아앙-
극심한 두통이 내 머리를 울렸다. 정말 어렵사리, 간신히 버텨낼 수 있는 통증. 이것보다 자세히 언급하는 건 불가능해.
나는 마지막으로 일렀다.
“저한테 약속해줘요.”
<뭘?>
“늦어져도 연락은 꼭 할 테니까 나서지 않기로. 아직 무리하면 안 되잖아요.”
<…….>
“진짜,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리고 무슨 일 있다 쳐도…… 알잖아요. 저 앞뒤 안 가리고 작정하면 못 빠져나갈 것도 없는 거.”
일부러 웃음 띤 어조로 전한 말. 하지만 서연희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앞뒤 안 가리고……? 너 그렇게 안 할 거잖아.>
“뭐…… 진짜 죽을 거 같을 때 아니면 참아야죠.”
<안 가는 건 어때?>
“불렀는데 가긴 가야지 싶어요.”
심가의 구성원이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사실은 확정이다. 시간도 특정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지 않는다면?
지금이야 습격할 대상이 나겠지만, 내가 안 가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습격할 수도 있겠지. 내가 그걸 확실하게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한다.
혹은 습격이 미뤄질 수도 있다. 홀로그램이 그것까지 알려준다는 보장은 없고, 그리되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
그러니 갈 수밖에 없어.
위해 대상을 나로 한정하려면.
최소한 놈들이 누구에게 위해를 가하려는지 알아내고, 그걸 막으려면.
더불어 심이수의 진정한 목적까지 파악해내려면.
위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나는 심가로 가야 해.
서연희가 하고 싶은 말을 눌러 참듯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정확히 한 시까지만 기다릴 거야. 그 전에도 너 많이 위험한 것 같으면 가만히 안 있을 거고. 해빈이는 내가 챙겨봐 줄 건데…… 그때는 걔한테도 전부 다 알려줄 거니까, 너 나중에 원망 들어도 난 몰라.>
“네, 알겠어요.”
서연희와 통신 마법을 마친 나는 내 차로 향했다.
차 문을 열자마자 보인 광경. 조수석에 앉은 유해빈이 이상하게 몸을 비비적대고 있길래 물었다.
“좌석 불편하냐?”
“어…… 네? 아니요,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니, 불편하냐고.”
“아, 그으, 아니……요? 안 불편한……데.”
“그거 옆에 보면 시트 조정할 수 있으니까 편하게 맞춰. 차 안 밀리고 가면…… 5시 반 살짝 넘겠네.”
“흐흐, 시간 충분하네요. 가요, 도진쿤. 출격-!”
경쾌하게 외친 유해빈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얘한테는 여태 미안한 행동을 많이도 했지.
가능하면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지켜줄 수 있는 만큼은 지켜주고 싶다.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된 애니까.
***
차 에어컨에서 쏟아져 나오는 찬 공기를 기분 좋게 맞으며 유해빈은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배경은 웅장하고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연회장. 그곳에서 무도회가 열리고 있다.
너른 회장에 자리한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지만 그중 두 사람만 파티 참석자고, 나머지 넷은 직원에 가까운 역할이다.
‘후후…… 이거지, 이게 여름방학이지.’
이내 유해빈의 마음속 무도회에 음악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려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서연희의 손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흐른다.
아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발레복을 입은 이세아가 핑그르르 몸을 연속해서 회전하다 종종걸음으로 걷더니, 허공으로 뛰어 발을 앞뒤로 뻗는다.
그녀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사람은 진유리. 별로 대단한 비중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 한세라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여기까지가 직원 넷. 무도회의 주인공 둘은 회장 중앙에 서 있다.
바로 유해빈 자신과 이도진.
그녀는 푸른빛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었고, 이도진은 멋진 턱시도 정장을 입고 있다.
<자, 해빈아.>
그윽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이도진이 손을 내민다.
<네…… 도진 씨.>
조금 수줍어하듯 유해빈도 마주 손을 뻗었고, 서로 손을 잡고서 두 사람이 춤을 췄다.
빙글, 빙글.
몸과 몸이 밀착된 채 밟아 나가는 걸음. 유해빈의 스텝이 가끔 꼬여도 이도진이 부드러운 손길로 이끌어준다.
지금은 중성적인 폴리모프 상태가 아니라 본래의 외견. 자꾸만 살갗이 맞닿는 감촉에 유해빈은 부끄러우면서도 심장이 뛰었고, 이도진이 자상하게 웃으며 말한다.
<좀 더 가까이 와.>
<아이, 참. 몰라요.>
새침하게 답하자 이도진이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확 끌어당긴다.
뭉클, 하는 감촉.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민감해진다.
유해빈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며 투정을 부렸다.
<다들 보잖아요…….>
<봐도 상관없어.>
<네……?>
이도진이 걸음을 멈춘다. 음악과 노랫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진 이도진이 왠지 모르게 손을 앞뒤로 움직인다. 뭔가……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콰악-
이도진이 별안간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는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치기?
‘마우스 투 마우스 박치기……? 근데 드라마 보면 뺨이랑 목 쪽에 손 대던데…….’
왜 이도진은 머리통을 감싸는 걸까.
의문이 들긴 하나 어쨌든 긴장되는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고, 마침내 그가 말한다.
<안 일어나냐?>
“으아앗!”
유해빈은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차 안이다. 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고,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그녀를 흔들어 깨우다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예 머리를 붙잡고 깨운 듯한 이도진이 손을 떼며 말한다.
“다 왔어. 일어나라.”
“어…… 저 잠들었어요?”
기억하기로는 차에 타서 이십 분 정도는 기억이 있는데.
‘오…… 해빈이 이런 노래도 듣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자신의 힙스터스러운 노래 취향을 자랑하고자 아는 노래들을 틀었고, 대여섯 곡 정도 들었으니 그때까지는 깨어 있었다.
“한 시간은 잤지. 정신 차리고, 그, 침도 좀 닦고.”
“……사춘기 아기용한테 정말 너무하시네요, 이도진 씨.”
사실은 꿈에서처럼 ‘도진 씨’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되게 좋은 장면에서 깬 것도 아쉽고, 또 반대로 드라이브를 많이 즐기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일단 창피했기에 유해빈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머쓱해하던 이도진이 그녀의 의향을 묻는다.
“바다 걷다가 밥 먹을래, 아니면 밥 먹고 구경할까.”
“어…… 바닷가 산책하다가, 밥 먹고, 다시 산책하고 복귀? 시간 많잖아요.”
“서울에 한 열 시까지는 가야지. 너무 늦으면 좀 그렇고.”
“……그래요?”
조금 서운해하면서도 유해빈은 수긍했다. 하기야 너무 오래 같이 있을 수는 없겠지. 마음 같아선 어떻게 분위기를 몰아가 이도진이 술을 한잔 마시게 하고, 그러면 운전을 못 하니까 여기서 하루 자고 가고, 그런 원대한 계획까지 이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보스가 나 잡으러 올지도 몰라.’
서연희의 ‘경고야’ 세 글자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가 있다.
“음, 으음. 뭐 좋아요. 그래도 세 시간은 놀고 가겠네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그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놀면 되는 일. 이도진과 함께 차를 나선 유해빈은 그 마음가짐을 그대로 실천했다.
바닷가 구경을 하고, 이도진과 마주 앉아서 회도 먹고, 그래도 한번 던져나 보자는 심정으로 술 마실 생각 있냐고 물었다가 설교를 듣고, 다시 어두워지는 시간까지 바닷가를 걷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가 열 시가 조금 안 된 무렵.
“아, 재밌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교수님!”
차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좌석 시트에 몸을 꾸욱 대었다가 내린 유해빈이 집 앞까지 태워다준 이도진에게 인사했다. 기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
그러자 어쩐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아주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이도진이 답한다.
“그래, 들어가. 남은 방학 푹 쉬고.”
“아…… 방학 때는 이게 끝이……죠?”
대외적으로는 학생과 교수 사이. 오늘도 연구를 명분으로 만난 거고, 이도진이 워낙 바쁜 터라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렇겠네.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잖아. 금방이지.”
“저희 집 시계는 고장 난 것 같은데요. 시간 너무 안 가는데.”
농담처럼 답했으나 진심이 담긴 말에 이도진이 웃는다.
“오늘 고생했고, 나도 재밌었어. 개학하고 보자.”
“네, 교수님. 가세요.”
이윽고 차가 도로 저편으로 내달려 모습을 감췄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선 유해빈은 침울하게 되뇌었다.
‘이제 가서 또 보스랑 있겠네…….’
분하다는 생각.
부럽다는 생각.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
더 똑똑하고 성숙하고 강해져서, 서연희가 그러하듯 이도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바로 그때.
[해빈이 집에 왔니?]
“어…… 보스, 왜 그러세요?”
화상으로 연락할 수 있는 통신 마법.
서연희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정확하게 듣고 기억해야 해. 절대로, 하나라도 어기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