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Chapter 37. 납치 (4)
***
심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열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마중을 나와 있던 심이수가 내 차를 본 건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차 끌고 왔네?”
“아, 드라이브 좀 하다가 왔거든.”
“드라이브? 누구랑?”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오늘 유해빈과 마력 속성 연구를 했다고.
“너도 해빈이 알지?”
“알지. 제일고 천재 3인방. 진유리, 이세아, 유해빈. 한국에서 길드 일 하는데 걔들 이름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전에 특강 가서 보니까 성격 좋아 보이던데.”
“실제로도 애가 활달하고 착해.”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기로는 세아와 진유리가 유해빈보다 나을 거다. 소드 퀸 샬럿 테이트가 제자로 삼은 두 명의 천재라고 한동안 떠들썩했으니까.
하지만 제일고 내부의 평가는 전교 1등인 유해빈 쪽이 더 높고, 마왕 파르투스와 맞서며 놀라운 힘을 보여준 것도 알려져 있다. 실체가 명확지 않은 소문 정도지만.
“근데 걔 진짜로 이미 S급 수준이야? 누구는 정말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고. 선배가 보기엔 어때?”
“감응력이 워낙 좋은 애라서 특정 방면으로 단시간만. 그래도 이대로 잘 성장하면 S급은 거의 확정이라고 봐도 될 거야.”
“오, 그래? 하긴 그 정도 재능이니까 선배가 연구할 때 부르는 거겠지. 혹시…… 나도 걔 번호 알려줄 수 있나?”
“그건 안 되지. 해빈이 개인정보인데.”
“뭐, 선배랑 계속 친하게 지내면 언젠가 만날 날이 있겠지.”
“그러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저택 문을 넘은 나는 아주 조금 안도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해서.
여러모로 판단해볼 때 들킨 건 아니다. 나와 유해빈이 테러조직 팬텀의 멤버이며, 심가를 습격한 이인자와 용 가면이라는 걸 알고 부른 건 아닐 거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의심한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처음 짐작대로 내가 목적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알 수 없으나 심이수와 심정웅은 내가 필요한 거다. 다른 신분이 있다는 건 알지 못하고, 단지 촉망받는 연구자 이도진이 필요한 거겠지.
“자, 한잔 받아.”
바깥과 통해 있음에도 마법으로 시원한 공기를 유지하는 툇마루. 그곳에 걸터앉은 심이수와 나는 서로 잔을 채웠다. 조금씩, 천천히,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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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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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술이 제법 독하긴 하나 그것뿐이다. 마법이든 뭐든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았고, 나보다 빨리 잔을 비운 심이수가 옅게 웃으며 묻는다.
“어때?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나도 괜찮네.”
다시 한 잔을 주고받았다.
얼마간 담소를 나누고, 이어서 석 잔, 그리고 넉 잔째까지.
그냥 평범한 술자리였다. 내 연구 얘기, 심이수의 길드 일 얘기, 제일고 얘기, 마학에 관한 얘기, 그런 것들.
이윽고 시계가 오후 열한 시 삼십 분에 다다라갈 무렵, 술기운에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심이수가 묻는다.
“선택해.”
“뭘?”
“일단 이거 한 병은 다 비울 생각인데…… 여기서 하루 자고 가도 되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하면 기사분한테 부탁드려도 되고. 뭐가 더 나으려나?”
“좀 더 마셔보고 생각하지.”
“이야…… 그렇게 좋은 수가? 그럼 한잔해야지.”
흡족해하며 고개를 주억인 심이수가 내 잔을 채운다. 이걸로 둘 다 다섯 잔째. 술이 절반쯤 남았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질문이 들려왔다.
“맞다. 아직 파혼했다는 말이 없던데, 이대로 진행하는 건가?”
“그렇진 않고.”
“그래? 얼마 안 남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시간 맞추는 게 쉽지가 않네.”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선배는 빨리 끝내서 홀가분해지고 싶고 저쪽에서 계속 끌고 있는 것 같은데, 맞아?”
“…….”
“아, 너무 직설적이었나? 미안, 술이 좀 취하긴 했네.”
자기 뺨을 두어 번 두드린 심이수가 단번에 잔을 비운다. 그리곤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선배는 따로 목표 같은 게 있나? 연구자로 뭘 하고 싶다거나,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살면서 이건 꼭 해야겠다거나.”
“그런 건 딱히 없네. 작년까지 많이 놀았고, 앞으로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정도?”
“음, 내가 더 어리면서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심이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반의반쯤 차오른 달을 바라보며, 힘이 실린 말이 이어진다.
“사람이 목표라는 게 있어야 해. 그래야 뭘 해도 더 열심히 하고,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 점검도 되는 거거든.”
“넌 그런 게 있다는 말이지?”
“있지. 난 확실히 있지.”
읏차, 소리를 내며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킨 심이수가 정면으로 걸었다. 나도 뒤따라갔고, 밖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이내 꽃과 나무가 예쁘게 핀 정원에 들어선 심이수가 손을 뻗었다.
사락-
손길에 닿아 흔들린 꽃잎. 형형색색의 수국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내가 되게 크고 원대한 목표가 있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거든. 그럴 때마다 난 이 꽃들 보면서 생각해. 버텨야지, 해내야지. 숨 내뱉을 때마다 피 토하고 눈알이 뽑힐 것 같은데…… 뭐, 어쩌겠어. 안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원하고 선택한 길인데.”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몇 발자국 뒷걸음질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그제야 느낀 듯이. 심이수가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서 말인데…… 선배한테도 도움을 청할 게 있거든.”
바로 그때.
홀로그램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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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식 질문의 추가 정보 ‘8월 12일 오후 11시 28분 09초’ 시점입니다.
-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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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아-!
나는 순간적으로 방어 마법을 발동했다.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미리 알고서, 심이수가 파악하고 있는 내 전력보다 훨씬 강하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만큼 약하게.
스으으으…….
내가 펼쳐낸 배리어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쿠웅- 몸이 극도로 무거워지는 감각에 나는 털썩 주저앉았고, 피식 웃으며 다가온 심이수가 칭찬처럼 이른다.
“아예 비실비실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좀 놀랐어. 선배 은근히 조심성 많은 타입이었네?”
“너…… 이게 무슨…….”
“아, 갑자기 이래서 놀랐지? 미안, 미안. 그냥 말하면 선배가 안 들어줄 것 같아서, 서로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만들어야 했거든. 툭 까놓고 말해서 기강 잡는 거라고 보면 돼.”
그즈음부터는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심이수의 의도는 날 죽이는 게 아니다. 내 정신을 지배하거나 이지를 앗아가려는 것도 아니다.
아마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것 이상은 시도할 수 없는 거겠지. 온전히 사고할 수 있는 판단력과 두뇌가 필요한 걸 테니까.
이렇게 되면…… 일이 굉장히 쉬워지지.
감췄던 힘을 더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에 내심 쾌재를 부른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왜…… 이런…….”
“선배 궁금해하는 건 이해되는데, 잠깐만 기다려줄래? 곧 오실 거라서.”
마침 발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저벅.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백발의 노인.
지팡이를 짚지 않고, 허리를 쭉 펴고 당당히 걸어온 심정웅이 손녀에게 묻는다.
“정한 것보다 이르구나.”
“그렇게 됐어요. 할아버지 오실 때까지 기다릴까 했는데…… 선배랑 얘기하고 있으니까 좀 미안해져서 빨리빨리 해놓고 싶더라고요.”
“어르신, 대체…….”
심정웅까지 한패라는 걸 깨닫고 경악에 찬 표정.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노인이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고, 심이수의 의사만 물었다.
“설명은 이수 네가 해줄 테냐?”
“제가 할게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선배만큼 똑똑한 사람이면 알아듣겠지.”
심이수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졌고, 열망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걱정 안 해도 돼. 선배한테 험한 짓은 안 할 거니까.”
“개소리, 하지 마.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겠지…….”
“에이, 들켰나? 눈치 빠르네. 맞아. 어지간하면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은데…… 선배한테는 그렇게 못 해. 그 좋은 눈에 그 좋은 머리. 제대로 안 쓰면 의미가 없거든.”
“나한테 뭘 원하는 건지…… 그거나, 지껄여봐.”
퍼억!
심이수의 손이 내 뺨을 강타했다. 화끈한 감각에 이어 피 맛이 느껴진다.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가 경고한다.
“선배…… 나 정신적으로만 안 건드린다고 한 거야. 육체적으로는 전혀 상관없으니까 자기 처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선배는 여기 납치당한 거고, 나랑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고통을 줄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혹시 알아보고 싶으면 계속 뻣뻣하게 굴든지.”
“…….”
나는 고개를 떨궜다.
분한 마음을 애써 감추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희미하게나마 두려워하듯이. 심이수가 왼손을 내 얼굴 쪽으로 뻗는다.
휘익.
의지와 무관하게 시선이 올라갔다. 내 턱을 감싸 쥐고 눈을 맞춘 심이수가 빙긋 웃는다.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는 것도 보기 괜찮은데? 난 이쪽이 더 낫지 싶네.”
재잘거리듯 말한 그녀가 비어있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타악-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다음 순간엔 나와 심이수 사이로, 실로 엄청난 수준의 마력 구성체가 일렁인다.
“있어 봐. 술 좀 깨워줄게.”
심이수가 내 뺨을 쓸어내린다. 술기운이 말끔히 날아갔고, 이제 그녀가 묻는다.
“이거 대충 어떤 건지 알겠어?”
“…….”
나는 침중한 눈길로 구성체를 살폈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지닌 마법이다. 작게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으나 규모마저도 아득히 거대하다.
불가능하다는 듯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내가 물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와, 몇 초 봤다고 벌써 파악한 거야? 선배 눈썰미도 진짜 황당하네.”
심이수가 내게 보여준 구성체.
저걸 발동하려면 마법의 모든 속성과 모든 계통이 전부 다 필요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마력이 많이, 정말 너무나도 많이 필요하다.
한 사람으로는 절대 충당하지 못한다. 열 사람으로도 안 된다. 수준 높은 각성자가…… 최소한 백 명 이상 필요해. 마법을 발현할 수 있도록, 제물로 삼을 각성자가.
심이수가 즐거워하며 일렀다.
“제물 쪽은 충분해. 원래부터 준비가 돼 있거든.”
나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엔 연기가 아닌 진심에 가까웠고, 그녀가 쾌활한 어조로 설명한다.
“이 집 사람들. 죄다 표정 어둡고 성격도 칙칙하긴 한데, 그런 용도로는 꽤 쓸 만하잖아?”
심정웅이 묵묵히 하늘을 바라본다.
심이수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 된다.
이 심가를, 이곳의 모든 구성원을, 마법의 제물로 삼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