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56화 (156/207)

#156화. Chapter 38. 일레이아나 (2)

***

8월 19일, 목요일 저녁.

심이수에게 실질적인 납치를 당하고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제한돼 있어 역설적으로 평온한 나날이었고, 오늘 개량한 구성체 회로를 살핀 심이수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야,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였네?”

“이제 겨우 70% 넘겼어. 앞으로 사흘 더 있어야 완성될 거야.”

심이수와 심정웅이 초안을 만든 마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완성하는 일.

어젯밤만 해도 심이수가 의심스러워하며 내게 물었다. 정말 여기서 더 개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느냐고.

혹시 딴마음을 먹고 뭔가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거라고.

하지만 나는 어제보다 유의미하게 효율이 상승한 데다 발동 시간도 10% 이상 단축한 결과물을 들고 왔다.

“솔직히 지금까지 작업한 건 그렇다 쳐도 어제는 안 믿었거든. 그래서 어떤 벌을 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미안, 사과할게. 그나저나 이 정도면 이제 진짜 완성된 거 아닌가?”

“말했잖아. 70% 초반대라고.”

“발동은 지금도 가능하잖아. 이것보다 효율이 더 높아질 수도 있어?”

“네가 보는 거랑 내가 보는 건 달라.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든가. 네 목적이 뭔진 몰라도 원하는 만큼 효율은 안 나올 테니까.”

“그래? 뭐, 무슨 뜻인진 알겠는데…… 선배, 오늘 말투가 좀 띠껍다?”

가늘게 웃으며 말한 심이수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 마력으로 흘려낸 열기가 전해졌고,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내 턱선을 훑어낸 심이수가 조롱하듯 묻는다.

“기왕이면 고분고분하게 해주면 안 돼? 나랑 선배랑 앞으로도 오래 봐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심이수와 심정웅은 심가의 각성자들을 모두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역사를 자랑해온 마도 명문이 곧 멸망하는 거다.

계획대로 된다면 저들이 이 나라에 머무를 수 있을까.

“널 의심하는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을 것 같아? 네가 무슨 목적을 가졌든, 그걸 달성하든 못 하든, 지금까지처럼 평범한 척하면서 살 수는 없을 거야.”

“글쎄? 나랑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면 선배도 마찬가지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받아친 대답. 내가 침묵하자 심이수가 말을 이었다.

“선배도 앞길이 창창한 연구자인데 한국에 있고 싶잖아? 존경받는 부모님 두 분 얼굴에 먹칠하기도 싫을 거고, 귀여운 동생이랑 계속 알콩달콩 살려면 잘 해줘야지.”

심이수가 내게 요구한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심가를 소멸시킨 장본인이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 집 사람들 안 죽이고 마법 발동할 수 있을 만큼 효율을 끌어올리든가. 근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근본적으로 출력이 모자라. 영웅 수준에 근접한 각성자가 최소 셋 이상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이게 참 아쉽네…….”

나직한 중얼거림. 옅게 표정을 찡그린 심이수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듯 시선을 텅 빈 곳으로 향했다.

내가 소각한 장생종의 시신 세 구. 그게 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하는 거겠지.

홀로그램이 원했던 대로일까.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 나와 심이수의 대립을 더 격화시키려는 의도.

만약 그런 거였다면, 이번엔 인정해야 한다.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시간 늦었는데 자고 가지? 일단 씻고, 나랑 저녁 먹을 겸 술이나 한잔해.”

“굳이 그럴 필요는-”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딱히 의심 사지도 않을 거고.”

숫제 나를 잡아끌다시피 하는 심이수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하는 짓 웃긴 거…… 너도 알고 있지? 협박하는 거면 그것만 해. 괜히 친근한 척, 잘 대해주는 척하지 말고.”

“음, 이것도 진심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나? 선배한테 미안한 것도 진심, 근데 협박해서라도 도움을 구하고 싶은 것도 진심. 왜? 혹시 내가 사근사근하게 구니까 마음이 막 요동치고 그러나? 인질범한테 호감 느끼는 거. 그거 명칭이 뭐였더라…… 아,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거. 그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싶고 그런 건가?”

재잘거리듯 말한 심이수가 내 팔에 슬쩍 팔짱을 낀다. 저쪽에서 아는 이도진의 힘으로는 아무리 저항해도 풀리지 않아야 한다.

나와 심이수의 몸이 아주 가까이 밀착됐고, 그녀가 조금 표정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선배가 화내는 것도 이해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대신 모든 게 잘 끝나고 나면, 그때는 선배도 내가 진심인 걸 느낄 만큼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게. 혹시 모르잖아? 선배 진짜로 천재니까, 어쩌면 이 집 사람들 목숨까지는 안 상할 수 있게 효율을 올릴지도 모르지. 그렇게만 되면…… 선배한테 평생 갚으면서 살게. 해달라는 게 있으면 다 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바쳐서. 나한테 뭐든 요구해도 좋아. 선배가 원하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일단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억지로 쌀쌀맞은 척하는, 그러면서도 곤란해하는 어조로 답했다. 함께 걷다 보니 욕실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심이수가 놀리듯이 웃으며 묻는다.

“등이라도 밀어줄까?”

“필요 없어. 금방 나올 테니까 기다려.”

“나 그래도 매너 지키고 있는데. 탐지 마법으로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한 번도 안 보고 있잖아? 이상한 뜻으로 듣지 말고, 열심히 연구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분명히 말하는데, 너랑 그런 짓 할 생각 없어.”

“선배, 그런 짓이라는 게 뭐야? 난 한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

“뭐…… 어쨌든 인정. 내가 못나진 않았어도 한세라 씨랑 비교하면 마음에 안 들긴 하겠지. 근데 그 사람이랑 비교해서 안 아쉬운 여자가 어딨겠어?”

“……세라랑은 상관없어.”

싸늘하게 답하고 욕실로 들어가는 내게 심이수가 일렀다.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어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선배도 눈치가 있으면 알잖아? 한세라 씨랑 파혼하고 나서, 선배랑 내가 계속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 그다음에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지.”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넌 사흘 후면 죽을 테니까.

씻고 나와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는 심정웅도 와 있었다.

예전에 내가 알던 것보다 월등히 정정한 안색. 그러나 한편으론 안정감이 없는 분위기였다. 저자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지.

심정웅이 서울 내의 네 번째 인외 지성체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하지만 그 변화가 불안정해서, 그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한 거라면.

이건……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까.

“자네도 들게나. 오늘도 수고 많았네.”

“……네.”

기묘한 광경이었다.

협박당해 이 집에 끌려오고,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연구를 강요받고 있는 나.

그런 나를 심정웅은 상당히 존중해주듯 대하고, 심이수는 첫날 밤에만 강경한 태도를 보였을 뿐 지금은 무척 사근사근하게 나를 챙겨주려 하고 있다.

“아, 이거 맛있네. 선배도 먹어봐.”

위선이라면 위선이겠지. 하지만 위선이되 진심이었다.

내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심이수. 저 여자는 판에 박힌 악인이 아니야. 타인의 고통을 일부러 즐기진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도덕적인 관념이 고장 났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

타인의 고통보다 자기 목적이 훨씬 중요한 거다.

자기가 하려는 일과 배치되지 않는 선에서, 심이수는 사교적이고 쾌활한 사람이다.

다만 역으로 보면, 그 반대의 상황에선 내가 아는 그 어떤 악인과 견줘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잔혹해질 수 있겠지.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걸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 아니면 후천적인 경험으로 만들어진 잔인함일까.

나는 그걸 고민했다.

당연히, 저 여자를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는 건 아니다.

심이수의 행동 원리. 그 기저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녀의 진정한 목적에 근접할 수 있을 테니까.

죽이기 위해서.

더욱 쉽고 빠르게. 더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서.

문득 바깥의 하늘을 올려다본 심이수가 심정웅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뭐 재밌는 얘기 없어요? 달도 예쁘게 떴고 선배도 와 있는데. 술안주로 듣기 좋은 옛날이야기 같은 거요.”

조용히 술을 비운 심정웅이 나와 심이수를 바라본다. 침중하게 가라앉은 시선. 나로서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어째서 심이수에게 협력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온전히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었고, 하지만 저항하려는 의사도 없어 보인다.

물론 나와 마찬가지로 금제에 걸려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원한다면 아예 개입할 수 없는 건 아닐 텐데.

한태강을 습격할 때 보여줬던 언행처럼, 가진 힘 외엔 서투른 면이 있는 심이수와 달리 심정웅은 뛰어난 안목을 갖추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심이수를 자기 의도대로 조종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심정웅은 그러지 않고 심이수의 결정에만 따라가고 있다.

왜일까. 마치…… 이제 지친 것처럼,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그즈음 심정웅이 입을 뗐다.

“옛날이야기라…….”

낮게 읊조린 그가 저 멀리 하늘로 시선을 향한다.

그리곤 심이수에게 술을 한잔 받아 다시 들이켜고, 적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래 이 이야기는 본가의 시조 되시는 분으로부터,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해 내려야 하는 말이다.”

“오, 지금은 할아버지밖에 모르신다는 거네요?”

“그렇구나…….”

말하자면 심가의 비사(祕事). 나와 심이수는 이어질 이야기에 집중했고, 노인이 왠지 모르게 후련해하듯 일렀다.

“아주 오래전, 아직 이 나라에 심씨 가문이 세워지기도 전. 본가의 시조께서는 한 분의 초인을 따르며 인간이 아닌 괴물들과 싸워나가셨지.”

“어, 그거…….”

심이수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혼잣말했고, 나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알아챘다.

심가에서 감추고 있던 장생종의 시체. 그걸 언제, 어떻게 얻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수 너도, 자네도, 한 번은 가본 적이 있겠지.”

“어디요?”

세월이 담긴 노쇠한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며, 그 진실을 일렀다.

“은마산(銀魔山).”

“……!”

나는 겨우 숨을 삼켰다. 심이수는 무척 흥미로워하는 표정.

이내 심정웅이 말했다.

“그 산의 전설이 일컫는 초인. 본가의 시조께서, 그리고 당시 이 땅에서 으뜸가던 각성자들이, 그분을 모시고 악마 이전의 악마와 맞섰다고 들었느니라.”

***

8월 19일 밤.

현재 유해빈의 집 거실에는 두 개의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었다.

모습을 보이는 건 두 사람.

[다들 모였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팬텀의 보스 서연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저 신입 분도 이번에 함께 가는 건가요?]

여우 가면을 쓴 멤버가 유해빈을 지칭하며 묻는다.

유해빈은 몹시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왜요, 제가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

여우 가면은 답하지 않았고, 유해빈은 이를 꽉 깨물며 치미는 화를 참아냈다.

‘한심해.’

엄밀히 말하면 여우 가면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다. 신입을 데리고 가는 건 위험 부담이 크지 않겠느냐는 말에 발끈할 만큼, 그녀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래서 화가 나는 거였다.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을까…….’

일주일 전부터 악몽을 꾸고 있다. 이도진과 마력 속성 연구를 마치고, 바닷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꿈.

유해빈은 전혀 몰랐다.

이도진이 심가에 가야 한다는 걸. 위험할 걸 알면서도 그곳으로 가려 했다는 걸. 서연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야 알고는 있다. 이도진이 말해주지 않은 이유.

‘자기 도와달라고 했으면서.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힘이 되어달라고 했으면서.’

하지만 유해빈은 아직 미흡했고, 말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겠지.

그녀가 위험에 처할까 봐. 그걸 걱정해서. 그래서 안전하게 보호해달라는 부탁만 서연희에게 남겼다.

‘뭔데. 이상하잖아. 난 위험하면 안 되고, 자기는 위험해도 되고. 그게 뭐냐고…….’

자세한 정황을 알진 못하나 이도진은 지금 심가에 사로잡혀 있다. 자기 집과 심가를 오가며 그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까. 서연희의 말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크게 위협을 받는 건 아닌 듯하다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몸이 아프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모욕을 받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아직 다치지 않았다 해도, 지금부터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심장이 너무 아프게 죄여왔고, 유해빈은 당장 심가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힘겹게 참아왔다.

이도진이 말했으니까.

열흘 후. 8월 22일. 그때 움직이라고.

서연희가 말했으니까.

이도진을 믿으라고. 그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고.

그리고 오늘.

마침내 서연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슬슬 작전을 준비해야겠다고.

인원은 셋.

서연희, 유해빈, 여우 가면.

‘우리 도진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했으면…… 절대 용서 안 해.’

유해빈이 그런 각오를 되뇌고 있을 즈음,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서연희가 말했다.

[둘 다 들어서 알겠지만, 심가 쪽이랑 다시 싸워야 할 것 같아.]

[장소는 어떻게 할 거죠?]

[당장 확실하게 정하진 못하겠네. 가능하면 저택 바깥으로 유인하는 게 낫긴 한데, 그게 안 되면 우리가 쳐들어갈 거야.]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어조다.

어쩐지 압도적인 자신감이 깃들어 있는 듯한 말.

서연희가 강한 건 알고 있으나 싸워본 바로 심가가 만만한 상대는 아닌데. 그러나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아닐 테고, 유해빈이 내심 궁금해하던 그때.

[미끼 정도는 던져봐야겠지?]

“미끼요?”

[…….]

뜻밖의 말에 유해빈이 반문했고, 여우 가면은 서연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무신’ 한태강이면 적당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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