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Chapter 38. 일레이아나 (4)
***
8월 22일, 오후 아홉 시 무렵.
늦게 업무를 마치고 귀가한 한세라는 숨을 가다듬고 현관문을 열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정장을 차려입은 한태강이 그녀를 맞이하며 일렀다.
“어서 준비하거라. 열 시까지는 나가야 하니.”
“……알겠어요.”
더 미룰 수 없는 일이, 그래선 안 되는 일이 부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도진과의 파혼 서약.
오늘 오후 열한 시에 그와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인적이 없고 자연 마력이 극히 부족한 공터.
유일하게 살아있는 입회자 한태강이 지켜보는 가운데, 약혼 당사자인 이도진과 한세라 둘에게 작용하고 있는 서약 마법을, 그곳에서 모조리 흩어내려 한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며 되돌릴 수는 없다. 이도진이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한세라 자신도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한태강도, 속내야 어떻든 오늘 파혼하겠다는 그녀의 결정을 말리지 않았고.
자기 방 욕실에 들어간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었다. 화장은 아주 옅게만. 업무 때 주로 입는 옷들보다 활동적인 차림에, 신발도 움직이기 편한 단화를 신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후 열 시 십오 분쯤. 곧장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시간이고, 그녀는 이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한세라는 일부러 어조를 밝게 하며 말했다.
“나 지금 나갈 건데, 열한 시에 도착할 거 같네. 넌 출발했어?”
<이제 출발하려고. ……나도 그때 도착할 거 같아.>
“그래, 나중에 봐.”
짧은 통화를 마친 그녀는 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태강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묻는다.
“그렇게 입고 갈 테냐?”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 차린 거죠. 오히려 아빠가 더워 보이는데요.”
딱히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답한 말에 한태강이 자기 복장을 본다. 격식을 지나치게 갖춘 건지 살피는 눈치. 하지만 인제 와서 옷을 갈아입진 않고 그가 말했다.
“가보자꾸나. 생각보다 늦었어.”
“네.”
부녀는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 안에서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한태강은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고, 한세라는 창문 너머의 정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도진이 뭘 하고 있을지에 대해서.
‘어쩌고 있으려나?’
예정된 파혼.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어쩌면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은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듯하나 한세라는 알고 있다. 이도진은, 지금의 그는……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다.
‘너무 많이 짊어지고 있으니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사망할 당시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십 년이 지나 스물다섯 살. 한세라도, 이도진도, 둘 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데도 그에게는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아서, 갈수록 늘어나서, 아무리 강한 의지로 노력해도 더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힘든 건지도 모른다. 한계에 이른 건지도 모른다.
해서 한세라는 오늘, 파혼 서약을 하고자 가면서, 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악-
목적지에 도착한 부녀가 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다. 이도진은 아직 오지 않은 듯싶었고, 한세라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도진이한테 전화 한번 해볼까요?”
“됐다. 기다리면 오겠지.”
한태강이 못마땅해하며 답한 직후.
쿠우웅-
별안간 굉음이 울린다. 슈아아아! 반투명한 마력이 공터 전역에 치달았고, 불길한 힘을 감지한 한세라는 깨달았다.
‘결계?’
이어서 쾌활한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젊은 여성으로 짐작되는 목소리. 텅 빈 허공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세라가 아는 얼굴들이다.
“시연회 때 봤으니 한 달 만이구먼.”
“한세라 씨는…… 그러고 보니 저랑 초면이죠?”
가장 오래 산 영웅, ‘천리안’ 심정웅.
그의 손녀로 근래 이름을 알리고 있는 심이수.
그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검붉은 마력을 전신에 휘감은 채로.
***
낮 동안 떠 있던 태양은 이미 잠든 지 오래다.
하늘은 적막하게 어두웠고, 일레이아나 라큘리는 머나먼 곳에서 홀로 세상을 비추는 달을 바라봤다.
맑은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감돌았다.
***
8월 22일, 오후 열 시 오십 분.
무더운 날씨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심이수는 내게 칭찬을 건넸다.
“와…… 선배, 진짜 고생했어. 너무너무 고마워.”
그녀 앞에 축구공 크기만 한 마력 구성체가 떠올라 있다.
물론 당장만 작을 뿐이다. 원한다면 규모를 확장할 수도 있고, 이 드넓은 저택 전체를 덮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마도 명문 심가의 모든 각성자. 이 저택에 펼쳐져 있는 모든 마법. 그 전부에서 마력과 생명력을 남김없이 갈취해 하나의 힘으로 자아낼 수 있는 마법이 완성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고작 세 사람이 열흘 만에 해냈다기엔 믿기지 않는 성과겠지. 하지만…….
“선배, 표정이 왜 그래?”
그만한 위업을 이루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나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네가 요구한 만큼은 완성됐지만 개량할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효율을 더 올리면 꼭 생명까지 빼앗을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건 얼마나 걸리는데?”
“…….”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심이수도 알고 있겠지.
이것보다 효율을 올릴 수 있다는 말. ‘그럴 가능성이 존재는 한다’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녀가 담담하게 일렀다.
“내가 그래도 선배를 좀 알거든. 선배는 천재야. 나도, 할아버지도, 살면서 이렇게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의 천재.”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점은 이거야.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 건 또 뭔지. 선배는 그걸 너무 잘 안다는 거지. 그런 사람이 열흘씩이나 봤는데 단서를 못 찾아냈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성공할 수도 있겠지. 한 십 년 넘게 이것만 붙잡고 있으면. 근데, 난 그렇게 오래 기다리긴 싫어서.”
이해해달라는 듯이 말한 심이수가 마력 구성체를 활성화했다.
우우웅-
천천히 일렁이던 마법이 옅은 초록빛을 띤다. 생명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저택의 마법에서만 마력을 가져오려는 거다.
“성능은 확실하네.”
심이수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어마어마한 힘이 모이고 있으나 이 저택의 누구도 이상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저택 내의 마법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도, 그 힘이 이곳으로 모이는 것도,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 마력이 모인 걸 확인한 그녀가 손을 휘저으며 지시했다.
“할아버지, 연동해봐요.”
근처에 있던 심정웅이 왼손을 들어 올렸고, 구성체에 모인 마력이 그에게 흘러 들어간다.
“으음…….”
“어때요?”
“문제는 없구나.”
나직한 대답에 힘이 깃들어 있다.
심이수 본인은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은 듯했다. 하지만 심정웅은, 내가 보기엔 정반대. 그러니 그의 힘을 넉넉히 보충할 필요가 있었을 거고,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물었다.
“오늘 당장 발동하진 않을 거지?”
“글쎄? 방금 건 작동되는지만 점검해본 거야.”
“후우…….”
안도감이 깊게 서린 한숨에 이어 나는 부탁하듯 말을 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계속 연구할게. 효율 올릴 수 있을 때까지.”
“…….”
심이수가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뭔가 헤아려 보려는 듯한 시선. 그러다가 짧게 물었다.
“그렇게 해줄 거야?”
“해볼게.”
“내가 선배한테 좀 되게, 못되게 굴었잖아? 그런데도 도와준다고?”
“그런 거랑 상관없어. 좀 더 연구하면, 그러면 사람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진짜 착하네……. 짜증 나게.”
혼잣말처럼 뇌까린 그녀가 화제를 바꿨다.
“근데 선배 슬슬 가봐야 하지? 한세라 씨도 얼추 도착했을 것 같은데.”
아까 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 열한 시에 도착할 거라는 말. 통화를 끊자 심이수가 선심 쓰듯 말했다. 공간이동으로 보내줄 테니 마법을 완성하고 가라고.
그리고 약속한 시각이 일 분밖에 남지 않은 지금.
지난 열흘간 줄곧 들어왔던 말투로, 내게 몹시도 미안해하는 그 역겨운 목소리로, 심이수가 일렀다.
“선배, 미안해.”
“뭐?”
심이수가 손을 휘두른다. 거기서 흘러나온 붉은 마력이 나를 덮었다.
스으으…….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스킬 ‘인식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A+)
+
효과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의식을 잠재우는 것. 두 번째는 일급 이상의 강력한 속박 마법.
인식지배를 건 대상은 나 자신.
점차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애쓰며 나는 심이수에게 물었다.
“너…… 무슨, 짓을…….”
“미안해. 진짜 미안. 최대한 잘 해보려고 하긴 할 건데, 일단은 미리 사과해둘게.”
심이수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며 지껄인다.
“수고했으니까 좀 자고 있어. 할 수 있는 만큼은 열심히 해볼게. 심하게 다치진 않게. ……장담은 못 하겠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아저씨한테, 세라한테-”
“하…… 못 듣고 있겠으니까 빨리 자.”
심이수가 다시 손을 뻗는다. 이번에는 내 머리에 닿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속도가 빨라졌고, 나는 어느새 심이수가 지내는 건물 가장 안쪽 방에 누워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은 절반만 깨어 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생각했다.
공간이동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타이밍을 조절했다. 열한 시 직전에야 마법이 완성되도록.
하필 오늘 파혼하게 된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로선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야 했다.
내가 계획한 일.
약속 장소로 향하는 세라와 한태강.
심이수와 심정웅의 속셈.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한 한 잘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있다.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심이수와 심정웅이 약속 장소로 가는 걸 막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조심했다 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해도.
차라리 틈을 봐 심이수를 기습하고 탈출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뒷수습이고 뭐고, 퀘스트고 나발이고, 세라와 한태강의 안전을 담보로 모험을 하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그게 옳은 방법 아니었을까?
그러니 인정해야 했다.
나는 내 약혼녀와, 내가 부모처럼 아끼는 사람을, 내 의지로 위험에 빠뜨렸다고.
이 문장 어느 곳에도 변명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나는 그렇게 행동했고, 그걸 긍정하고, 그리고 잠자코 기다렸다.
아마도 일 분 이내. 내 위선과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계도 그 정도였다.
1초, 5초, 10초.
20초, 30초, 40초.
초조하게 시간이 흐른다. 의식은 여전히 잠든 것이나 마찬가지. 심이수는 눈치채지 못할 테고, 내가 세던 숫자는 50을 넘겼다.
55, 56, 57…….
나는 인식지배 스킬을 해제하려 했다.
정확히 절반으로 나눈 정신. 심이수가 내 의식에 준 영향은 스킬을 해제함에 따라 마력에 밀려 사라질 거다. 그다음 속박 마법을 깨뜨리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것보다 오래 기다릴 순 없어. 서로 의도를 잘못 파악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그때.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건물 밖에서 들려왔다.
콰앙! 콰아앙!
쿠아아아앙!
스아아아아- 퍼엉! 퍼어엉!
소리는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 저택에서 쏘아져,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거다.
쿠아앙! 콰아아아앙-!
갈수록 소리가 거세진다. 수십 수백을 훌쩍 넘는 마법의 향연. 그즈음 어떤 감각이 부드럽게 내 몸을 쓸어냈다.
이어서 들려온 말.
-찾았다.
콰아아아아-!
내가 있던 건물의 지붕이…… 마치 본래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탁 트인 시야로 캄캄한 세상이 보인다. 다른 빛은 없다. 오직 하나. 환하게 떠 있어야 할 보름달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위유우웅.
핏빛 달이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한다. 이쪽을 향해서 다가온다.
콰아아앙! 퍼엉! 콰앙!
무수한 마탄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다. 마도 명문 심가의 정수라 해야 할 공격들. 하지만…….
스으으…….
그 모든 마력이 곧 연기처럼 흩어져 힘을 잃는다.
방해는 무력하다. 달에 접근하기도 전에 스러지고 만다.
달이 계속해서 하강했고, 저택 전역에서 스파크 같은 마력이 반원을 둘러쳤다. 침입자를 막는 가장 강대한 결계.
그것이 달의 접근을 가로막는다. 아니…… 가로막으려 했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결계의 마력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단 일 초도, 찰나조차 핏빛 달의 접근을 막지 못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달이 마침내 내 앞에 이르렀다. 나는 인식지배 스킬을 해제했고, 육신의 자유까지 되찾아 몸을 바로 세웠다.
스아아아…….
새빨간 달의 중심부.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프릴이 달린 예쁜 드레스 차림에 간소한 신발. 머리칼이 길고, 눈동자가 붉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신장은 160대 후반. 우윳빛처럼 새하얀 피부에 늘씬하고 완벽한 체형이다.
그리고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용모. 내가 아는 그 어떤 단어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붉게 빛나는 보름달이 없었다 해도, 그래도 눈이 부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녀가 나를 보며 생긋 웃는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보고 싶었어요.”
지능 9.3
내가 아는 중에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의지 9.6
내가 아는 중에 가장 굳건한 의지를 지닌 사람.
감각 9.4
내가 아는 중에 가장 힘을 다루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
매력 9.7
내가 아는 중에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
근력과 민첩, 체력과 내구. 합계 평균이 98 이상.
생명력과 마력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사실상 무한대.
‘멸망의 예언’에 대비한 자들이 탄생시킨 최대·최후의 걸작.
마왕을 압도할 수 있고, 악신과도 단신으로 맞설 수 있는 존재.
현시대의 세계관 최강자.
장생종 차대 여왕, 일레이아나 라큘리. 내게는 서연희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한 그녀가, 기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민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