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Chapter 39. 만월야 (1)
***
“아, 두 분 다 놀라긴 하셨겠네요. 올 사람은 안 오고 갑자기 저희가 와서.”
여전히 검붉은 피 같은 마력을 두른 심이수가 웃으며 건넨 말. 다른 것들은 논외로 두더라도 두 가지만은 확실했다.
우선 첫 번째. 심이수와 심정웅이 좋지 않은 뜻을 품고서 이 자리에 왔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도진이는…… 어딨죠?”
한세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어렵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올 사람은 안 오고’라는 언급. 이도진을 지칭하는 거다. 그가 이곳에 올 예정이었던 걸 알고, 자신들이 그걸 막았다는 거겠지.
심이수가 피식 웃는다.
“선배요? 그 사람 지금 한숨 푹 자고 있을걸요? 한세라 씨한테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한데…… 요 며칠 저랑 뭘 좀 격렬하게 했거든요. 애들한테는 말 못 하는 거. 그래서 아마 많이 피곤할-”
타아앙!
한세라가 쏘아낸 빛살 같은 마력이 그녀를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겨냥한 공격에 심이수가 가소롭단 표정을 지었고, 한태강이 앞으로 나서며 일렀다.
“물러서 있거라.”
콰아아아아아-!
푸른빛의 웅혼한 마력이 그의 전신에서 요동치듯 터져 나왔다.
무신 한태강. 영국의 샬럿 테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양의 최강자.
하지만 그 막강한 힘을 앞에 두고도 심이수와 심정웅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기색이다. 한세라가 보기에도 아버지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었고.
‘나 때문에…….’
적들의 기파만 해도 그리 만만치 않건만 자신까지 보호해야 하니까.
한태강이 입을 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제 딸을 해치려 하는 거라면,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때 푸흣, 하고 조소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아, 아니에요. 그냥 좀, 제발 애들은 손대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하시던 분이 분위기 잡는데…… 솔직히 웃긴 걸 어떡해요.”
물끄러미 응시하는 한태강의 시선에 웃음을 참고 답한 심이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유독 환하게 뜬 보름달을 보며 이어진 중얼거림.
“견딜 만하네. 할아버지, 해도 되겠어요.”
심정웅에게 짧게 이른 심이수가 걸어온다. 그녀의 뒤편에는 핏빛의 구체가 일렁이고 있다.
스으으으…….
구체에서 흘러나온 붉은 마력이 그녀의 전신을 감싼다. 흡사 힘을 전하는 듯한 모습.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많이 닮은 형상이라고, 한세라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즈음.
콰앙!
심이수가 땅을 박차고 뛰었다. 소리조차 쫓아오지 못한 속도로 돌진해 주먹을 뻗었고, 거기에 맞선 한태강도 같은 동작으로 대응한다.
퍼어어어억-!
주먹이 맞닿은 곳에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인다. 휘몰아치는 돌풍을 타고 한세라에게 마법적인 전언이 들려왔다.
<길을 열어줄 테니 먼저 나가거라. 도진이 놈이 보이면 데리고 곧장 도망쳐야 한다.>
심정웅과 심이수가 구현한 결계. 탈출을 막는 걸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마법이었고, 그걸 깨뜨리지 않고선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가능은 해.’
아버지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전력으로 때리면 부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당장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도, 결계를 부수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도.
그걸 알기에, 한태강이 부상을 각오하고 그녀만은 탈출시키려 하는 것을 알기에, 한세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타앙!
결계 외곽이 아니라 그 반대.
심정웅 쪽으로 달려간 그녀는 마탄을 연이어 날렸다.
퍼엉! 펑! 타아앙!
심이수를 돕고자 준비하던 노인이 손쉽게 공격을 튕겨 냈고, 심이수와 한태강은 다시금 격돌해 싸움을 벌여 나간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맞서기엔 지나치게 강한 적, 심정웅과 대치하며 한세라는 아버지에게 일렀다.
<버티고 있을게요. 같이 나가요.>
최선이라면 최선의 전략이다.
그녀가 시간을 버는 사이 한태강이 심이수를 쓰러뜨리는 방법. 성공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하며 탈출할 수 있다.
전제 조건은 두 가지.
한세라가 영웅과 맞서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것.
한태강이 심이수를 제압할 것.
이 두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했다.
그러나…….
“끄아아아악!”
고통에 겨운 비명이 공터에 메아리쳤다. 첫 번째 전제 조건을 고려할 것도 없이 두 번째가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한태강이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있다. 과묵하던 표정은 오간 데 없고 몹시 괴로워하며 비틀거린다.
심이수의 상태도 썩 좋진 않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두통이 있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태강에게 가격당한 왼쪽 어깨는 반쯤 부러져 덜렁거린다.
그래도……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한태강보다는 월등히 나았고.
“아빠!”
“보내줄 것 같으냐.”
심정웅이 단출하게 일렀다. 한세라의 발걸음이 멈췄고, 노인은 흘끗 저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곧 끝나겠구먼.’
심이수가 방금 구현한 마법은 물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공격이 아니었다.
팬텀의 이인자가 개입한 습격 사건. 당시 거짓으로 덮어씌운 기억이 아닌, 실제 한태강이 겪은 일을 일깨운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다. 타인에게 진실을 알리지 못하는 금제는 심이수와 심정웅에게도 작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하늘에 환하게 뜬 보름달.
이도진이 완성해준 마법.
그 진전들에 힘입어 심이수는 진실을 알렸다. 이제 그녀와 심정웅에겐 금제가 무의미해졌고, 예상대로 한태강은 큰 타격을 받아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됐다.
불필요하게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단 이렇게 처리하는 게 낫겠지. 한태강만 무력화하면 한세라 혼자선 절대 그들에 대항할 수 없으니까.
“어서 정리하거라.”
“나도 아니까 명령하지 말고 입 다물고 계세요.”
싸늘하게 답한 심이수가 덜렁거리는 왼쪽 어깨를 두어 번 돌린다. 만월의 장생종으로서 지닌 힘. 압도적인 생명력이 그녀의 상세를 회복시켰고, 심이수는 여유롭게 걸어 한태강에게 다가선다.
콰앙!
틈을 봐 세차게 발을 구른 한세라가 그쪽으로 향하려 한다. 심정웅은 나직이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못 간다고 했거늘.”
스아아아-!
물결치는 마력의 파동이 한세라를 가로막았고, 노인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짐작한 것보다 상대의 움직임이 훨씬 날카로워서.
콰아아아아아-!
마력이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빠르게 달려 나가던 한세라의 발길이 겨우 막혔고, 심정웅은 적잖이 안타까워하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대로 무사히 커나갔다면…….’
이도진 그 아이와 함께 향후 삼십 년은 이 나라를 대표했을 인재인데.
그즈음 심이수는 한태강을 제압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놀랍게도 한세라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스아아- 타아아앙!
일반적으로 S급 각성자라 일컫는 수준을 넘어선 속도. 그뿐만 아니라 몇 가지 속성과 계통을 자유로이 활용한 복합 마법으로 되려 심정웅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파아아아아!
붉고 푸른 마력이 노인 앞에서 스러졌다. 또래 중에서 범접할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취였으나 수십 년 전부터 영웅의 경지에 올라 있던 그가 막아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이미 늦었구나.’
손녀가 한태강에게 손을 뻗는다. 가볍게 내리치는 것으로 의식이 꺼지겠지. 한세라가 방해하기 전에.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빛줄기 같은 마력이 날아왔다. 결계 바깥에서, 결계 내부로.
콰아앙!
영웅조차 쉽사리 부술 수 없는 결계가 단번에 깨졌다. 그리고 심정웅과 심이수는,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췄다.
외부 공격에 결계가 깨진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이것이…….’
외부와 모든 걸 차단한 결계가 사라짐에 따라 들어온 정보. 그들의 본거지인 심가 저택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타아앙!
한태강을 구출한 한세라가 외곽으로 빠졌고, 보름달을 가리듯 하늘에 떠 있는 방해자가 지상을 내려다본다.
머리칼이 긴 듯하면서 짧았다. 성별을 파악하기 힘든 체형. 용을 형상화한 가면을 쓴 그자가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혼잣말한다.
“용용이…… 등장.”
서연희의 지시에 따라 몰래 대기 중이던 유해빈. 멋지게 등장하긴 했으나 사실 그녀는 긴장한 상태였다.
‘나 힘 별로 안 남았는데…….’
들은 지시는 두 가지였다. 서연희가 마련해준 공간 마법을 통해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숨어 있을 것.
전황을 지켜보다가 한태강과 한세라가 위험해진다 싶으면 개입할 것.
첫 번째도 완수했고, 두 번째도 완수했다. 그녀의 최대 무기인 브레스를 통해서.
그러나 결계가 워낙 강력해서 힘이 많이 남진 않았다. 심정웅이나 심이수가 공격해오면 당해낼 수 없겠지.
유해빈은 내심 되뇌었다.
‘뭐해, 빨리 나오라고요…….’
이 자리에 은신해 있던 건 그녀만이 아니다. 팬텀의 멤버 여우 가면. 그 사람도 숨어 있다. 서연희의 말에 따르면, 유해빈 자신까지 위기에 몰릴 때는 도와줄 거라고 했는데.
‘나 허세 부리는 거라니까? 진짜 위기라고요, 빨리 나타나!’
하지만 여우 가면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검붉은 마력을 사납게 두른 심이수가 중얼거린다.
“하,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 이거네?”
타앙!
그녀가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한세라는 심정웅을 견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심이수와 일대일로 싸워야 하는 난처한 상황.
꿀꺽.
유해빈이 남몰래 침을 삼켰고, 그래도 겉으론 궁지에 몰린 티를 내지 않으며 도발했다.
“덤벼보시지.”
“너 같은 잔챙이한텐 관심 없어. 빨리 처리하고 가야 하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죽어.”
슈아아아아-!
심이수의 검붉은 마력이 더욱 팽창한다.
영웅조차 넘어선 힘. 유해빈은 자신이 십 초도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여우 가면을 마음 깊이 원망하며 한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
‘도진쿤, 도와줘요……!’
콰앙!
심이수가 허공을 박찼다. 그녀의 마력이 가녀린 아기용의 심장을 꿰뚫고자 뻗는다. 그리고…….
위유웅-
무엇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온 소리.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두 개 나타났다. 다음 순간.
콰아아아앙!
검은 안개가 심이수를 덮쳤다. 분노에 찬 그녀가 손을 떨친다.
퍼엉! 타아앙!
검붉은 힘이 습격자를 향해 날았고, 그러나 순식간에 스러지듯 흡수됐다.
“……!”
심이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은 안개는 지척에 이르러 있다.
퍼어억!
복부를 강타한 주먹에 그녀는 숨을 내뱉었다.
“커헉!”
파아아아아!
검은빛의 안개가 좌우로 뻗는다. 날개를 닮은 형태를 이루며 심이수까지 가둔다.
“이깟 걸로!”
악을 쓰며 외친 그녀가 마력을 폭발시켰다. 힘의 총량이라면 유의미하게 우세. 힘과 힘의 대결로 떨쳐낼 수 있겠지. 하지만…….
스으으으…….
그녀의 마력 중 일부가 다시 검은 안개로 흡수됐다. 남은 힘만으로는 완전하게 우위라 할 수 없고, 거기에 더해 누군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조금만 도와줄게.
“허억!”
심이수는 경악해 헛숨을 들이켰다. 만월이 전해주는 힘이 일순간 흩어졌다. 필시 그녀 자신보다 더 강한 지배력을 가졌을 자에 의해서.
콰앙!
힘의 균형이 깨졌다. 명백히 열세. 검은 안개가 그녀를 공격한다.
퍼걱!
어깨를 노린 일격.
피하지 못했다.
파아아!
그녀가 뻗은 오른팔은 상대가 막아냈다.
콰악!
적의 양손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챈다. 이어서 재빨리 뒤로 돌아가더니…… 퍼억! 망설임 없이 어깨뼈를 산산이 부서뜨렸다.
“아악!”
격통에 저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 검은빛이 심이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쿠아아아아아-
공기를 찢어내며 지상으로 급격히 하강해, 그녀를 땅에다 처박았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땅이 지하로 깊게 파였다. 혼곤한 정신에 꿈틀거리고 있는 심이수에게 검은 안개가, 흰 가면을 쓴 사내가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