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Chapter 39. 만월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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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가의 저택에서 나와 만난 서연희는 가장 먼저, 붉은빛이 은은하게 어린 손으로 내 머리 부근을 쓸어내렸다.
스으으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심정웅과 심이수, 나까지 셋이 함께 걸어둔 정신 금제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소멸해간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납치되고 심이수에게 당한 금제. 그것까지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안개의 마녀 서연희. 영웅 중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 알려진 천재. 공간 마법과 계약 술식의 권위자.
만월 밤, 장생종의 권능을 발현한 그녀에게 초일류 마법사의 금제 따윈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었고, 이제 내겐 어떠한 제한도 걸려 있지 않다.
나는 곧바로 서연희에게 일렀다.
“그때 아저씨 구하러 간 거였어요. 기억 지우고, 셋 다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심이수가 뭘 하려고 해요. 이 저택 사람들 생명력이랑 마력을 전부 다 빼앗아서. 목적이 뭔지는 모르고, 규모는 엄청나게 커요. 온전히 힘으로만 사용하면 마왕 이상으로 강해진다고 봐야 하고…… 이미 완성했어요.”
그즈음 건물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이곳을 포위한 상황. 다만 그뿐이다.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서연희가 차단해둔 터라 이 건물 안에 그녀와 내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저들까지 상대할 시간은 없어. 워프 마법을 펼치는 서연희에게 나는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을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말해줘요.”
복합적인 질문이었다.
내가 그날 한태강을 구하러 간 걸 얼추 눈치채고 있었는지. 심이수와 심정웅이 그 연장선으로 나를 노렸으며, 세라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을 파악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쪽 일까지 준비해둔 거예요?”
오늘 파혼하겠다고 연락이 온 것
그게 마침 만월이고, 내가 계획한 날과 같다는 사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필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서연희가 유도한 걸지도 몰라. 심정웅과 심이수를 저택에서 내보낼 미끼로 한태강과 세라를 끌어들인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며칠 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방법이야 찾아보면 없지 않을 거다. 파혼 서약을 할 수 있는 날은 사실상 주말로 한정되어 있으니까.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해 오늘 말고 다른 날이 불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서연희라면 가능한 일이야.
그녀가 내게 반문한다.
“전부 다 내가 꾸민 거라고 하면…… 화낼 거야?”
“그건 아니죠.”
“……왜?”
“믿으니까요.”
솔직히 아예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왜 세라까지 끌어들인 거냐고, 그러지 않고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것 이상으로 나는 이 사람을 믿는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고, 분명 나를 위하는 뜻이었을 거라고. 그걸 너무 잘 아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잖아요.”
“고마워.”
옅게 웃으며 전한 감사. 이어서 서연희가 일렀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니야. 그래도 오늘로 정한 거 알고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 완전히 떳떳하지는 않네.”
“활용한다는 거, 그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데요.”
위유우웅-
워프 마법이 허공에 빛무리를 자아냈다. 발동 타이밍을 재던 서연희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슈우우우-
둘 다 입고 있던 옷이 바뀌었다. 팬텀 작전 때 입는 복장. 얼굴엔 가면의 감촉이 느껴지고, 서연희가 말했다.
“나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날 구해주고, 그 시점부터 말할 수 있게 된 거 맞지?”
“네.”
역시나 그것 때문이었다.
한태강과 세라를 끌어들인 이유. 내 퀘스트를 알지 못하면서도 예감한 거다. 한태강을 구하면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대균열과 관련한 진실을 ‘무신’ 한태강이 알게 될 시에 그에게 미칠 영향
-답변: 필사(必死)
-추가정보: 추후 답변이 변동될 수 있으며 특정 가능한 시기에 질문자 이도진에게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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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3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7월 20일 오후 11시 30분까지 지정된 장소에 단독으로 위치할 것
-클리어 보상: ‘무신’ 한태강의 필사(必死) 조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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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면 오늘 알려주라고.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면 좋겠다고. 그걸 위해 세라와 한태강을 끌어들인 거였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으면, 오늘 보름달 뜨는 날이니까 수습은 할 수 있고, 일 끝나고 너한테 싹싹 빌려고 했지?”
“빌어요? 누나가 저한테요?”
“응. 왜, 너 예전에 해빈이한테 강요한 거 있잖아. 육체적으로 완전한 굴복-”
“안 해도 돼요.”
내가 황급히 답하자 서연희가 다시금 확인한다.
“안 해도 된다고? 진짜?”
“사양할게요. 괜찮아요. 아니, 그런 거 하지 마.”
“그래……?”
그걸 왜 당신이 아쉬워하는데……. 내심으로 중얼거린 나는 그녀에게 확고히 답했다.
“저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그래도…… 알리진 않을 거예요.”
지금 와서 말할 생각은 없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니, 나도 힘들었느니, 그딴 변명들.
물론 본심은 그걸 원한다. 알리고, 위로받고, 사과받고, 사과하고. 그러고 싶어. 그래도…… 욕심인 걸 아니까.
그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해.
가면을 단단히 고쳐 쓴 나는 서연희에게 물었다.
“갈 때 되지 않았어요?”
“아, 그러네. 가야겠다. 우리 귀여운 용용이가 애타게 너 찾고 있는데.”
콰아아아아-!
건물 밖에서 세찬 마력이 들이닥친다. 심가의 각성자들이 힘을 모은 마법. 하지만 그게 적중하기 전에, 나와 서연희는 공간을 타고 넘어가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
-스킬 ‘마력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
-스킬 ‘존재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S)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소량 회복됩니다. (랭크 D)
+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심이수가 나보다 강했다. 36 영웅 기준으로 나는 고작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
하지만 심이수는 이전에도 최상위권과 견줄 만한 무력을 자랑했고, 지금은 서연희의 피를 흡수해 그때보다 강해졌다. 거기다 만월 밤이라는 이점까지.
그런데도…….
퍼억! 콰아앙! 쿠아아아앙!
나는 접근전에서 능히 그녀를 압도했다. 검은 심장의 스킬에 서연희의 견제. 조건만 비슷하게 맞추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이런 싸움에 익숙지 않을, 자기 힘에 취해 으스댈 뿐인 자에게 당할 만큼 내가 대충 살진 않았으니까.
콰아아아앙!
전력을 다해 심이수를 메다꽂은 나는 차갑게 일렀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내 개인적인 원한, 여태 네가 벌여온 악행. 모두 갚아주려면 한참 남았다.
“후우, 하아…….”
커다란 구덩이에 대자로 뻗은 그녀는 거친 숨만 내쉴 뿐 답하지 않았고, 주위를 살피니 다섯 사람이 보인다.
“흥, 아까처럼 허허 웃으면서 여유 부려 보시지!”
서연희의 옆에 찰싹 붙은 용가면, 유해빈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반면 심정웅은 침중한 눈길.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세였다.
그리고 세라와 한태강은…….
“아빠, 괜찮으세요?”
“세라야……. 도진이는…….”
세라가 겨우 정신을 차려가는 한태강에게 묻는다. 한태강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애쓰고 있다.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오래, 십 년을 가슴에 대못을 박고 살았으면서.
나까지 안 챙겨도 되잖아. 괘씸한 놈, 한심한 놈, 그렇게 욕만 해도 되잖아.
“빨리…… 도진이도…… 이 근처에 있을 거다. 데리고, 이 자리를 피해서-”
더 듣고 있지 못하겠다. 타앙- 땅을 박차고 구덩이로 내려간 나는 이제야 몸을 일으키고 있는 심이수에게 선언했다.
“넌 오늘 죽어.”
“죽는다고……?”
아주 자그마하게 흘러나온 물음. 나는 다시 한번 힘주어 일렀다.
“그래. 너도, 저 노인도, 나한테 죽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든, 실패하고 죽는 거야.”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심이수의 진정한 목적. 가능하다면 무력화시켜 알아내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면 어쩔 수 없다. 퀘스트 실패를 감수하고서라도 죽여야만 해. 살려뒀다가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까.
콰아아아아-!
손에 검은 마력을 담아내며 나는 적에게 접근했다. 서연희가 달에서 오는 기운을 억제해주고 있는 이상 승산은 내 쪽으로 기운다.
상성이 유리해도 너무 유리해. 가진 마력과 생명력이 방대할 뿐 전투 기술이 뛰어나진 않은 상대. 검은 심장의 스킬에 이만한 먹잇감도 없으니까.
타앙!
빠르게 접근한 나는 손을 내질렀다. 접근전에 취약한 심이수가 받아내긴 힘든 공격. 파앗- 퍼어억! 한 번 공방이 오갈 때마다 그녀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고, 다만 그런 와중에도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왜 그걸 사용하지 않는 걸까. 내가 완성해준 마법. 이곳에서도 발동은 가능할 텐데. 심가 각성자들의 생명력을 빼앗아 온다면…… 그러면 전세가 훨씬 나아질 텐데.
하지만 심이수는 전혀, 티끌만큼도 그 마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다. 자기 힘으로 어렵게나마 대항하려 한다.
어째서일까. 그 마법으로 이루려는 목적이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목숨이 위험에 처했어도 결코 허투루 소모하고 싶지 않을 만큼.
바로 그때.
“아아아아악! 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이 개새끼야아아아-!!!”
갑자기 심이수가 비명처럼 괴성을 질렀다. 새빨갛게 물든 눈을 희번덕이며 내게 재차 욕설을 내뱉는다.
“왜 방해해! 대체 왜! 내가 너희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하지 마! 저리 꺼지라고-! 나 가만히 놔두라고, 이 쳐죽일 새끼야!!!”
퍼억!
내 주먹이 그녀의 입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파아앗! 피가 튀고, 치아가 몇 개 부러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커흡……!”
피 흘리는 얼굴을 손으로 감싼 심이수에게 나는 차갑게 일렀다.
“몰라도 돼.”
그거 알아서 뭐 하게. 너도 쓰레기고, 나도 너 뭐라고 할 자격은 없는데.
“그냥 나쁜 놈한테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해. 그게 마음 편하지 않겠어?”
“허억, 허억…….”
심이수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한다. 지상은 여전히 대치 상태로 별다른 전투가 일어나진 않고 있다.
하지만…….
“……!”
순간적으로 심이수가 눈을 크게 치떴다. 경악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몹시 낮은 어조로 중얼거린다.
“당신…… 설마…….”
***
심이수는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땅 위에 있는, 정작 중요할 때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노인네가 방금 지껄인 말 때문에.
<이수야, 그 사내의 정체를 알 것 같구나.>
거기까지는 흘려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정체가 뭐든 쓰러뜨리는 게 급선무니까.
‘왜, 왜……!’
분노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대체 왜 방해하는 걸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정말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그 고통을 참고, 방해물을 죄다 치우며 노력해왔는데.
‘쓰면 안 돼.’
마법을 쓸 수는 없다. 절대 헛되이 낭비해선 안 된다. 심정웅에게 힘을 더해준 것만 해도 한계에 가깝다.
‘여기서 더 소모하면…….’
그러면 목적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죽는 것보다도 더 싫은 일이니까.
해서 팬텀의 이인자에게 욕설을 내뱉고, 어떻게 해서든 그를 쓰러뜨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그때, 심정웅이 다음 말을 일렀다.
<네가 맞서고 있는 그자가…… 이도진,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