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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61화 (161/207)

#161화. Chapter 39. 만월야 (3)

그녀는 그리 멍청한 편이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명석하다고 표현해야겠지. 고작 스물셋 나이로 마도 명문 심가의 마법을 높은 경지까지 익혔을 정도니까.

게다가 다년간 견뎌야 했던 인체 실험이 그녀에게 고통만 안겨준 건 아니다.

극도로 상승한 육체 능력. 몸을 움직이는 분야뿐 아니라 뇌를 활성화해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심이수가 얻은 능력 중 하나였다.

칼날처럼 예리한 그 판단력이, 그녀 자신에게 고한다.

‘어쩌면…….’

심정웅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가정이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고 있었다면 영영 눈치챌 수 없었겠지.

가령 팬텀이 심가 저택에 처음 침입하고 나서, 아주 잠깐 이도진을 그들의 조력자로 용의선상에 올렸으나 곧바로 폐기했던 것처럼.

우선 수호자와 대마법사의 아들이 테러리스트 따위에게 협력할 이유가 없고, 그가 저택의 결계를 그만큼 자세히 파악하고 있진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조력자는 심가 내부에 있거나, 그게 아니면 팬텀의 보스와 이인자가 조력자 없이 결계를 돌파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을 거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도진을 의심한 건 정말 잠깐. 그때조차 그를 팬텀의 일원으로 여긴 건 아니다. 조력자일 수도 있다고 얼핏 생각하다가…… 역시 아닐 거라고. 그 정도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니 만약 오늘 저녁에 심정웅이 저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라고 일축했을 거다. 이도진이 팬텀의 이인자라고 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치당해 이런 수모를 견딜 필요가 없으니까. 논리적으로 사리에 맞지 않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맞을지도 몰라.’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추측하는 것과 어떠한 결론에서 역으로 단서를 맞춰나가는 건 또 다르다.

오늘 밤 그녀가 겪은 일. 이도진이라는 사람을 알아오며 들은 말, 행보, 사고방식까지.

결과적으로 나와야 하는 문장을 정해두고 단서를 조합하면 신빙성이 있다.

그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팬텀의 이인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가면을 벗은 채로 그녀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도진일 거라고.

“당신…… 설마…….”

심정웅의 말을 듣고, 그녀가 경악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 남짓.

이어서 노인이 건조한 어조로, 심이수 자신은 명확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녀에게 ‘명령’했다.

<이수야, 마법을 발동시키거라.>

<병신 같은 늙은이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노망이라도 났어!?>

심이수는 격노해 대번에 답했다.

무력을 상승시키는 일 따위로 헛되이 쓰면 안 되는 마법이다.

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만 보고 수년을 살아왔는데.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데.

‘이딴 걸로…… 안 돼. 절대 용납 못 해.’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이 마법이야말로 살아나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니까.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겠지.’

모르긴 해도 이도진은 마법을 발동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이 힘을 손에 넣고자 지금껏 허약한 척하며 협조한 것일 테니까.

그러나 심정웅이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마법을 발동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야.>

<뭐?>

<내 추측이 옳다면 그 순간부터 이도진 저 아이의 우선순위가 바뀔 거다.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 본가 쪽 일을 우선시하겠지. 마법에 생명력과 마력을 빼앗길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잠자코 들어!>

천둥 같은 노호가 날아와 심이수의 귀를 때렸다.

심정웅의 지시사항은 간단했다.

일단 마법을 발동하라고. 그리하면 대응이 바뀔 거고, 그 틈에 공간 마법으로 탈출하자고.

<아마 외부에 알리지 않고 따라올 거다. 본가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겠지.>

<하지만 마법을 소모하면->

<힘은 이기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어. 저만한 강자들이라면 능히 네 목적을 달성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야. 이수야, 이 할아비 말을 들어야 한다.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어.>

과연 그 말대로였다. 지상의 두 사람, 팬텀의 보스와 용 가면을 쓴 부하가 심정웅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아무리 그가 장생종의 시신을 흡수해 전성기 시절의 활력을 되찾았다 해도, 만월의 부담을 극복할 만큼은 마법의 효력을 받고 있다 해도, 팬텀의 보스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물론 심이수 자신도 아주 큰 위기에 처해 있었고.

“뭘 자꾸 주절거리는 거지?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이나 계속해봐. 나한테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흰 가면을 쓴 사내가 의심스러워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 조금이나마 불안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건 단순히 착각일까.

스아아아아아아-!

지상에서 붉은빛이 치솟는다. 팬텀의 보스가 새빨갛게 빛나는 보름달을 이끌고 심정웅을 제압하려 한다. 영웅이라 해도 버티기 힘든 압도적인 힘.

콰앙!

그와 동시에 흰 가면의 사내도 뛰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며 손에서 검은빛의 마력을 내뿜는다.

그야 맞서 싸울 순 있다. 꽤 오래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패해서 죽겠지. 지닌 무력도, 수적으로도, 팬텀 멤버 전원을 그녀 혼자 당해낼 수는 없으니까.

절망스러운 마음에 이를 꽉 깨문 심이수가 되뇌었다.

‘제발, 제발…….’

부디 심정웅의 추측이 틀리지 않기를.

이곳을 벗어나 최상의 전력으로 결전을 벌이고, 또 승리해서, 저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자들을 마법의 제물로 삼을 수 있기를.

그리고…….

쿠아아아아앙!

심이수와 팬텀의 이인자 사이에 나타난 휘황찬란한 구체. 그것이 소리를 넘어선 속도로 회전하며 빛을 낸다. 저 멀리 심가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각성자들의 생명력과 마력을 남김없이 갈취하는 것이다.

팬텀 쪽의 대응도 빨랐다.

스아아아……. 콰아아아앙!

흰 가면의 사내는 두 가지 대응책을 한 번에 펼쳤다.

여태 그녀의 힘을 흡수한 정체불명의 기술을 최대한으로 구사해 마법의 발동을 억제하려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공격한다.

쿠오오오오오-!

팬텀의 보스. 그녀의 대응도 훌륭했다. 심정웅을 제압해나가며 이쪽에 개입했다. 마법 발동을 억제하고, 보름달이 주는 힘을 가로막고, 심이수를 속박하려 한다.

두 사람 모두 할 수 있는 한 가장 뛰어난 대응이었다. 심이수를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틀림없이 성공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 환희했다.

‘할아버지 말이 맞았어!’

가장 오래 산 영웅의 통찰력이 기어이 빛을 발했다.

팬텀이 가장 중요시한 목적은 그녀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마법의 발동을 막는 것에 좀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걸 내버려 두면 수십 명의 각성자가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심이수를 죽이고, 마법의 발동까지 억제한다. 그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엔…… 아슬아슬하게 모자랐다.

퍼억!

심이수의 어깨가 꿰뚫리며 피가 튀었다. 그러나 치미는 격통에도 그녀는 하던 것을 이어나갔다.

저들이 방해로 발동 직후 예상한 만큼 힘을 모으진 못했다 해도, 목적한 바를 달성하기엔 충분했다.

위유우웅-

그녀의 뒤편으로 공간이 찢어졌다. 심정웅에게도 발동됐겠지. 심가로 이어지는 워프 마법.

스아아아아아-!

심이수의 몸이 공간 저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

“후우…….”

그녀는 어느새 익숙한 저택에 와 있었다. 옆에는 노인이 보이고, 심이수는 주위의 정경을 둘러봤다.

“으윽…….”

“끄으으…… 이게, 무슨…….”

그녀는 단출하게 평했다.

“병신들.”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죄다 비틀거리며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빠져나온 힘은 심이수가 발현한 구성체로 흡수되고 있다.

그녀는 쌀쌀맞은 어조로 조부에게 물었다.

“외부에선 모르겠죠?”

“채비를 그리 해놨으니 그럴 테지.”

지난번 팬텀의 습격 이후 심가는 극히 비밀스러운 경계 태세를 유지해왔다.

무슨 일이 있든 무조건 심정웅에게만 보고할 것.

외부 세력에 무엇도 알리지 않을 것.

오늘도 그러했으니 알아챈 자는 없겠지.

박살이 난 결계와 함정은 팬텀 보스의 소행일 거고, 그녀는 폐허에 가까워진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본래 그녀가 머무르던 곳. 그 안에는 이도진이 잠들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말대로네요.”

그가 없다. 있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걸 확인한 그녀는 건물을 빠져나왔고, 마법을 최대치로 활성화했다.

슈아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악! 아아악! 으으…….

저택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이 점차 커지다 다시 잦아든다. 소리를 낼 기운조차 남지 않은 거다.

‘다들 더 애써봐요.’

방금이야 탈출을 위해, 각성자들을 인질로 삼고자 급격히 힘을 흡수했으나 그건 효율적이지 않다.

천천히, 골수까지 빨아들여야 했다. 곧 들이닥칠 자들을 죽여버리려면.

전신에 충만한 힘을 느끼며 심이수는 물었다.

“할아버지, 어때 보여요? 저랑 마왕이랑 비교하면.”

현재 생존해 있는 인간 중에서는 심정웅이 가장 잘 아는 축이겠지. 과거 악마와 맞서 세상을 지켜냈던 영웅이 답한다.

“힘만이라면…… 그 이상이구나.”

“말본새가 좀 거지 같은데, 뭐, 오늘은 봐 드릴게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재잘거린 심이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밝디밝은 보름달이 힘을 전해준다.

지상에선 무수한 각성자들의 생명을 불태운 힘이 그녀를 바로 일 초 전보다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조용히 뇌까렸다.

“착한 척하는 쓰레기들…… 어서 와봐.”

그 피를 마시고, 살점을 찢어내고, 뇌를 후벼 파서.

그렇게 해서 이뤄낼 거다.

저 앞에 보이는 정원. 예쁘게 피어난 수국에 영혼을 걸고 맹세한 바를.

***

<피차 떳떳하지 못하니까, 알아서 조심해서 이쪽으로 와.>

심이수가 남긴 전언이 공터에 메아리쳤다. 이내 서연희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와 말한다.

“바로 가자. 워프는 막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있으면 돌파할 수 있어.”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내가 완성해준 마법이니 짐작할 수 있다. 탈출을 시도했을 때처럼 단번에 생명을 빼앗으려 들지는 않겠지.

그건 효율적이지 못하니까. 그 정도 힘으론 서연희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판단할 테니까.

이곳에서 할 일을 마치고 가도 늦지 않다.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저편을 바라봤다.

“크윽…….”

상세가 나아졌다곤 하나 전투를 치를 정도로 회복되진 않은 한태강이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타악.

세라가 앞으로 나선다. 위험을 직감하며,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런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죽일 거라면 나부터 죽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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