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Chapter 41. 여우 가면 (1)
***
이 년 전의 여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한세라는 굳게 결심했다.
‘알아낼 거야.’
이틀 전 이도진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날 선 말을 들으면서도 참고 사과하던 그가 견디다 못해 결국 내뱉은 말.
네가 대체 뭘 아느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좋고 나쁜 사람인지, 그건 나밖에 모르는 거라고.
알려주는 것에도 의미가 없다고.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자신이라 생각했던 한세라로서는 몹시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걸로 실의에 빠질 만큼 나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분명히, 틀림없이, 이도진은 뭔가를 감추고 있다.
그녀에게 결코 알리기 싫은 무언가가 존재한다.
‘어쩌면 나라서 더 그런 걸지도 몰라.’
한세라에게도 알리기 싫은 게 아니라면?
한세라라서…… 그래서 더 말하지 못하는 거라면?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후자가 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한세라이기에 털어놓을 수 없는 일.
무엇인지 알지 못함에도 마음에 불안함이 일렁인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정말 많이 중요한 생각 하나.
‘그러면…… 그건 다 거짓말이려나?’
방탕한 실패자.
이도진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그랬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이성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다고.
약혼자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것도 오래 만나는 것도 아니고, 금방금방 상대가 바뀐다고.
솔직히…… 다른 것보다도 한세라가 가장 슬프고 화가 났던 모습.
그건 연기일 뿐 이유가 있는 걸까. 사실이 아닌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한세라는 옅게 웃으며 창밖으로 멀어지는 서울을 바라봤다.
유치하고, 기대하고, 걱정하고, 미안하고, 보고 싶고.
그 모든 마음을 모아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도 이제 안다고.
이해해줄 수 있다고.
그리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
이 년 전의 가을.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한세라는 노트북을 켰다.
지난 몇 달 동안 모은 자료, 거기에 새로 얻은 자료를 취합하고, 그것들을 종합해 어떤 결론을 자아냈다.
‘확실해.’
아주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잡아낼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이도진의 목격담.
한국에 있을 당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습.
그녀가 아는 그의 성격과 생활 반경.
그것들에 일정한 흐름이 존재했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그가 외출할 때면…… 어딘가에서 사건이 터진다.
한국이 주된 무대도 아니고 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테러 행각이 일어난다거나, 다국적 기업의 자금 흐름이 바뀐다거나, 어느 나라의 군대와 각성자 부처에서 경계와 보안을 강화한다거나.
매번 그런 건 아니다.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을 그냥 넘어가면, 두 번째 사건은 규모가 더 컸다.
두 번째에도 그냥 넘어가면, 세 번째는 더 컸다.
이도진의 외출과 사건이 백 퍼센트 일치하는 건 아니었고, 대략 8할가량.
그 정도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변수였다.
나머지 2할은 연막이라고.
이도진은 그냥 외출하는 게 아니라고.
뭔가를 하고 있고,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때 외출하는 건…… 작전 회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물론 한세라는 자각하고 있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지도 몰라.’
스토커, 망상.
그럴지도 모른다.
이도진에 관한 정보를 남김없이 모으는 게.
그와 나눈 메시지, 통화 기록. 기억하는 대화. 모두 샅샅이 뒤지고 자료로 구성하는 게.
이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스토커가 할 법한 짓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가 범죄 행각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일 뿐이다.
하지만 한세라는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본심으로는 확신했다.
그저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하는 게 아니다.
‘내가 너를 아니까.’
정말로 믿는 건 이도진이었다. 이십 년도 넘게 가장 가까운 사이인 그를 믿으니까.
그래서 알아낼 수 있었던 거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누구도 캐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자신만은 믿고 있어서.
이유가 있을 거니까.
유학을 와서 이도진의 시선에서 멀어져 있다는 환경적인 이점.
과거의 그에게도 그리 밀리지 않았던 두뇌와 재능.
그리고 신뢰와 애정, 집념.
그 모든 것을 갖춘 한세라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고, 그녀는 마침내 하나의 이름에 도달했다.
세계 규모의 일급 범죄조직 팬텀.
그들과 이도진을 연결했다.
***
날이 갈수록 추워지던 초겨울의 어느 밤.
마법으로 외견을 변장한 한세라는 집을 나섰다.
‘오늘일 거야.’
최근 뉴욕 근교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됐다.
경계가 삼엄해졌고, 그 정체가 확실히 드러나진 않았으나 한세라는 추측하고 있었다. 팬텀일 거라고.
내로라하는 첩보 기관도 알아내지 못한 걸 그녀가 단독으로 파악한 데는 정보의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도진과 팬텀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상정하고, 거기서 되짚어나가면 그들이 팬텀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언제쯤 행동할지.
오늘 이도진은 오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팬텀과 당장 대면할 생각은 없었다.
여태까지 추측해 온 게 옳은지 확인하고, 그다음은 상황을 봐가면서 행동할 작정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파아아앙!
상대에게 들켰다.
한적한 교외.
외진 길목에서 누군가 그녀를 공격해왔다.
체구가 작았다. 엄청나게 빠르고 강했다. 토끼 가면을 쓰고,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에 눈동자가 붉은 여성.
한세라는 직감했다.
‘나보다 강해.’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으나 그녀는 이미 S급 각성자 이상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장세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고 알려진 건 숨기고자 했기 때문에. 이도진이 신경 쓰여서.
그녀의 재능은 한 번도 빛을 잃은 적이 없었다.
무신과 방벽의 딸. 그 재능을 온전히 물려받았고, 힘껏 갈고닦았다.
상대가 영웅 수준의 강자만 아니라면 맞서 싸워서 이기지는 못해도 도주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힘을 끌어모았다.
세 겹의 마법 속성을 중첩하고, 하나로 뭉쳐내며 자아낸 폭발력. 그걸로 적을 떨쳐내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서걱-!
마력이 조각조각 잘려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새빨갛던 눈동자에 더욱 붉은빛을 뿜어내며 토끼 가면이 휘두른 손길. 그것에 닿자마자 힘없이 갈라진 것이다.
‘이 정도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팬텀의 일반 단원이 이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한세라는 이어질 공격을 견뎌내고자 의식을 집중하며 공간 마법을 발현했다.
다치지 않고 도망칠 수는 없다. 최소한 팔 하나는 내줘야겠지. 절단되지 않는 것만 염두에 둬야 했다.
한데 그때.
타악.
토끼 가면이 공세를 멈췄다. 실처럼 만든 마력으로 공간 마법만 방해할 뿐 한세라에게 직접 상처를 입히진 않으려는 듯했다.
‘왜?’
그녀는 조용히 의문을 되뇌었고,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물러서 있어.”
우아한 말투.
잠시 한세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토끼 가면이 모습을 감췄고,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드레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한세라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손을 휘두른다.
스아아아아-!
한세라의 변장이 걷혔다.
유학을 와서부터 자르지 않아 꽤 길어진 금빛 머리칼.
푸른색 눈과 아름다운 외모.
본래 외견으로 돌아온 그녀는 상대를 바라봤고, 방금 등장한 여성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이걸…… 어쩐담……?”
무척 곤란해하는 모습.
한세라는 깨달았다.
상대가 망설이고 있다. 파고 들어갈 틈이 보인다.
그녀는 승부수를 던졌다.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겠죠?”
눈빛과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적잖이 놀란 듯한 기색.
이내 여성이 흥얼거리듯 말한다.
“음…… ‘내 귀염둥이’ 때문에?”
내 귀염둥이.
한세라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욕설을 써본 적이 없지만, 그 말에 난생처음으로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걸 겨우 참고 그녀가 답했다.
“나는, 걔를 구하고 싶어요.”
“구한다고? ……네가?”
여성의 어투가 조금 바뀌었다.
여유 있고 우아한 분위기는 이전과 같았으나 또 다른 감정도 담겨 있다. 마치 경멸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자를 벗어낸다.
“…….”
한세라는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그 이상 동요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묻는다.
“아예 모르진 않았나 봐?”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36 영웅의 한 사람.
지닌 재능만은 정세빈에도 못지않다는 천재 마법사.
‘안개의 마녀’ 서연희.
그녀가 테러조직 팬텀의 보스였다.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서연희가 선언한다.
“정확히 한 시간 있다가 네 기억을 지울 거야. 내가 왜 너한테 여유를 주는지 알겠니?”
이유는 오직 하나일 거다. 이도진을 구하고 싶다는 말 때문에.
같잖게 여기면서도 일단 들어나 보려는 생각에.
알려줄 걸 알려주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지 보려고.
그만큼 이도진을 아끼고 있는 거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단번에 기억을 지워버리겠지.
한세라가 답하지 않고 노려보자 서연희가 묻는다.
“세라 너, 나한테 화내는 거니?”
그야 화가 난다.
당장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다.
잘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소중한 척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면서, 대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한세라는 그 모든 말을 삼키고 물었다.
“내게 알려주려는 게 뭐죠?”
서연희가 답한다.
“그 애가 얼마나 착하고 강한 애인지.”
***
기억을 전달받았다.
개인적인 것들은 적당히 감추고, 한세라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열다섯 살, 부모님이 사망한 이래로 이도진이 뭘 겪어왔는지.
왜 실패자를 가장했는지. 무엇을 미안해하고,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거기에는 그녀도 들어가 있었다. 아주 높은 비중으로.
한세라는 말없이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물기가 묻어 나온다. 계속 뺨에서 흐른다. 그녀는 힘겹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서연희에게 물었다.
“……여기에 거짓말은 없겠죠?”
“전부 사실이야. 너한테 자격이 없는 이유도 이제 알겠니?”
희생, 그리고 희생.
한세라는, 한태강은, 이도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대균열, 이시혁과 정세빈, 올리비아 윈, 복수.
한세라는 이도진을 이해했다.
감출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가 다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연희가 자신을 경멸하는 이유도 알겠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다 받아놓고선.
원망하고, 탓하고, 혼을 내고, 부담을 주고, 몇 년을 그렇게 행동해놓고선…….
지금 와서 돕고 싶다고?
“네가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한태강 선배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도진이를 방해하지 마. 걔는 정말 착하고 강한 애지만…… 그래도 상처를 하나도 안 받는 건 아닐 테니까. 난 걔한테 너라는 부담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 이해하겠지?”
위유우웅-
서연희의 손이 빛난다. 한세라를 향해 내민다. 인정했다면 기억을 지우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세라가 답했다.
“아니, 틀렸어요.”
“뭐?”
서연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단순히 의아해하는 게 아니다.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한세라는 물기가 맺힌 눈으로, 확신처럼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걔는 그렇게 강한 애가 아니에요.”
“내가 보여준 걸 보고도 그런 말이나 하는 거니? 어른스러운 줄 알았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
한세라는 눈물을 닦으며 서연희에게 말했다. 그녀 자신에게는 너무도 당연히,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결말을.
“이대로 가면…… 도진이는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