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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69화 (169/207)

#169화. Chapter 41. 여우 가면 (2)

“무슨 뜻인지 설명해줄래?”

낮게 잦아든 목소리.

한세라는 서연희를 노려봤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추궁하듯 반문했다.

“팬텀으로 활동할 때, 도진이는 거의 강박적으로 확인했을 거예요. 누가 뭘 잘못했는지, 언제 작전에 나설지,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 혹시라도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지, 죄 없는 사람들이 입을 손해와 그 보상까지도. 다 철저히 알아봤을 거예요. 당신이 아는 것도 있을 거고, 당신이 모르는 선에서도 걔는 마음에 두고 있었을 거야. 알고 있었나요?”

“알고는 있었어. 그 애가 그런 부분을 많이 신경 쓰고 있다고-”

“정확히는 몰랐단 말이네요. 착해서 신경이 쓰이는구나, 잘 처리했으니까 됐다, 매번 잘하고 있으니까 본인도 마음을 놓겠지……. 여태 그렇게만 생각해왔다는 거네요.”

이제 한세라는 서연희가 너무너무 미웠다. 그것도 제대로 몰랐던 주제에, 그런 사람이 그를 데리고 대체 뭘 해왔던 걸까.

열다섯 살 봄부터다. 지금 한세라와 이도진은 스물세 살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구 년. 무려 십 년에 가까운 시간. 그렇게 긴 시간을…… 잘 알지도 못하고서…….

한세라는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장담할 수 있어요. 여태 해온 모든 작전, 장례식 이후로 해왔던 모든 일, 도진이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어. 지금도, 자기가 예전에 했던 일로 누군가 피해를 보고 있지 않을지, 그걸 주기적으로 알아보고 있을 거야. 일일이 마음 졸이며 확인하고, 그런 다음에야 겨우 안도하면서 잠들 거예요. 그게, 그 모든 게…… 단순히 착하고 마음이 강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바보 같은 질문.

한세라는 짧게만 답을 일렀다.

“걔는…… 정말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애예요.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하는 애라고요.”

심성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선하다. 주변 사람을 자기 자신보다 많이 챙긴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자기가 원하는 걸 다 이뤄내려 한다.

그리고…….

“그 애는, 이 세상을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냥 적당히 아끼는 게 아니야.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낸 이 세상을, 자기가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기적처럼 소중하게 여겨요.”

한세라는 이도진을 안다.

그가 사소한 것에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해하는지 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어느 것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안다.

본인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일,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 마음이 닿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소중하고 감사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이도진은 그랬다.

“잘 이해가 안 되죠? 근데…… 도진이는 그래요.”

선하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이 세상 자체가 소중하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명망 있고, 세력이 강대한, 드높은 곳에 올라선 이들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 네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까.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며 이뤄내는 게 가능할까.

서연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침내 깨달은 걸까.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가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애초에 불가능하다 해도 무방한 걸 이루려 한다고.

그저 착한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강한 게 아니라, 너무나 욕심이 많아서 단 하나도 포기를 못 하는 거라고.

한세라는 원망을 숨기지 않고 일렀다.

“당신은 그 애를 하나도 몰랐어. 아는 척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면서, 사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그럴 만해요. 당신도 똑똑하지만, 도진이도 똑똑하니까. 열심히 숨기려고 했을 테니까. 그래도…… 걔를 십 년이나 봤으면,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부했으면, 그만큼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래도 알았어야 해요.”

결말은 예정되어 있다.

틀림없이, 이도진은 가장 처참하게 무너질 거다.

그가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들을 차례로 포기하고, 버리고,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다.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걸 다 짊어지고 갈 수 없을 테니까.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도진이는 착하지 않게 될 거예요. 더는 이 세상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지도 않게 될 거예요.”

그러면 뭐가 남을까. 온 세상에 쫓기는 테러리스트만 남는다. 그런 다음에 그가 행복할 수 있을까.

“복수를 포기한다고, 그런다고 도진이가 행복해지지는 않아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줘도, 걔가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아마 본심으론 더 살고 싶지 않아 하겠지.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그것 하나만 보고 평생을 살아갈 거다. 죽을 때까지 그가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한세라는,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진실을 일렀다.

“……이미 늦었어요.”

벌써 십 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계속해서 달려왔다. 네 가지를 다 이루려고.

불가능하다 생각지 않고, 어쩌면 외면하면서, 양손으로 감싸 안고, 등에 짊어지면서 그렇게 살았다.

“본인은 자각 못 하겠지만 도진이는 지금도 너무 버거워하고 있어요. 나랑 세아가…… 그 증거예요.”

훗날까지 갈 것도 없다.

현시점에 벌써 네 가지를 다 챙기지 못하고 있다.

그가 한세라 자신과의 관계를 지지부진하게 끄는 건 그녀가 소중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녀에게 상처가 될 걸 아는데도, 손에서 놓기 싫어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거다.

파탄에 이른 동생과의 관계. 그는 막막함을 느낄 거다.

본인은 한다고 하는 건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건데도 멀어지고 있으니까. 애써 부정하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선 한계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걸 지금 와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래도 있는 힘껏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포기하기 싫어하는데.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시간이 걸릴 거고, 그전에 그는 무너진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니?”

저 원망스러운 여자는 다른 걸 묻지 않았다.

이도진이 맨 처음 도움을 청했을 때, 장례식 당시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줬어야 할지, 이후 어떻게 이끌어줬어야 할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무의미하니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니까.

서연희가 알고 싶은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한세라는 싸늘하게 답했다.

“당신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팔 년을 넘게 부추겨놓고.

잘한다, 잘하고 있다, 해낼 거다, 믿고 있다, 응원한다, 나도 도울 거다, 그따위 헛소리만 지껄여놓고.

서연희조차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서연희라서,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줄곧 이도진의 이해자를 자처해왔던 그녀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

“당신은 해오던 걸 하면 돼요. 오늘 내가 한 말을 다 무시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까, 내 기억을 지우지 말아줘요. 나는 내 방식대로 걔를 구할 거니까.”

“네 방식이라는 게 뭔데?”

사실 한세라는 말해주기 싫었다.

그녀 모르게 이도진을 위로해주는 척 접근한, 지금도 그러고 있는 이 짜증 나는 여자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말을, 정말 티끌 하나도 건네주기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약혼자를 구하는 일이 훨씬 중요해서…… 그래서 말해줬다.

“걔는, 자기가 다 아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가 뭘 했고, 뭘 못했는지 전부 다 파악하고 있는 줄 알아요.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려줄 거예요.”

당장은 안 된다. 이도진은 인정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논리를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리겠지.

어중간한 시점에 말해 본들 역효과만 날 거고,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그가 무너지기 직전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하나라도 포기해야만 할 때.

그때 말해주면…… 그래도 귀에 들어오긴 할 거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서연희가 물었다.

“가면은 뭐로 하고 싶어?”

이 흐름을 예상하긴 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말.

한세라가 침묵하자 서연희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위유웅-

빛무리에 이어 어느새 그녀는 여우를 닮은 가면을 들고 있었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하필이면 여우.

한세라는 대놓고 물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걸 주는 거죠?”

“별 뜻은 없었는데. 그냥, 이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역시나 화가 난다고, 욕이라도 하면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까 생각하며 한세라는 가면을 받아 들었고, 그날 테러조직 팬텀에 새로운 정규 단원이 입단했다.

서연희로선 토끼 가면에 이어 두 번째로 이도진에게 정체를 알리지 않는 멤버. 그를 구하기 위한 프라이버시.

그리고 그즈음부터였다.

서연희가 이도진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변한 것도.

그가 느끼기에 그녀가 이전보다 더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까지 헤아려 준다고 생각한 것도.

그가 그녀를 이전보다 더 가깝게, 이전보다 더 의지하기 시작한 것도.

장생종의 차대 여왕 일레이아나 라큘리는 적에게서 얻은 조언을 귀히 여길 줄 알았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그걸 반복하지도 않았다.

한세라가 짐작하고 불쾌해한 대로.

원치 않게 도움을 준 그녀에게 한마디 언질도 두지 않고, 이도진에게도 당연히 이유를 알리지 않고.

답례라면 답례일까. 이후 한 달가량 그녀는 한세라를 단련시켰다. 본래 지닌 힘을 성장시키고, 정의로운 각성자가 아닌 테러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다.

한세라의 재능은 이도진에게 미치진 못했으나 상당히 뛰어났고,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거둬 서연희의 요구 기준을 충족해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맞이한 1월 중순.

한세라는 드디어 이도진과 만날 수 있었다. 여우 가면을 쓰고, 정체를 감추고서.

***

“자, 서로 인사해. 이쪽은 내 귀염둥이랑 토끼고, 이쪽은 신입으로 온 여우. 능력은 내가 보증하니까, 오늘은 넷이서 가볍게 훔치고 오자.”

한세라는 이도진을 응시했다. 그도 마주 바라본다. 무늬 없는 흰 가면. 본래 외견과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그가 단출하게 이른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후방에서 보조해보도록 해. 솜씨를 보고, 어디까지 맡길지 결정할 테니까.”

싸늘한 어조.

한세라로서는 그가 이런 말투를 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판 싸울 때는 이것과 비슷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엔 애정이 있어서 차갑게 대하고, 애정이 있어서 대화를 거부한 것이니까.

한데 지금은 새로 들어온 부하 직원을 시험하는 듯한 삭막함이다. 실제로도 썩 틀린 표현은 아니고.

‘이럴 거 같긴 했어.’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의외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애니까. 한세라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들리는 말로는 정말 칼 같다고 했다. 이도진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호의를 거절할 때는.

그전까지는 되게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사람인데, 언성 하나 안 높이면서도 너무 단호해서 아예 헛된 희망을 못 품겠다고.

지금도 그와 같은 원리로 선을 긋는 거겠지.

한세라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러죠. 저도 당신 얘기를 꽤 들었는데,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게요.”

네가 나를 시험하는 만큼 나도 널 시험하겠단 말.

듣고 있던 서연희가 웃으며 중재한다. 본심이야 웃음이 나오기보단 난처하겠지만 그렇게 약속했다. 한세라라는 이름을 배제하기로.

서연희는 그녀를 신입인 여우 가면으로 대하고, 한세라는 신입인 여우 가면으로서 이도진을 대해야 한다.

앞으로 이도진이 뭘 하든 ‘한세라’의 관점으로 참견하거나 조언할 수는 없다.

오늘 그를 처음 본, 이도진을 사적으로 알지 못하고 딱히 호의를 가질 이유도 없는, 신입 여우 가면으로만 행동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팬텀에 들어온 의미가 없다.

건조한 대화를 마친 한세라는 여태 한마디도 없이 대기하고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토끼 가면.

한세라의 정체는 모르지만 작년 말 자신이 제압하려 했던 그 여자라는 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지금 처음 본 것처럼, 그리고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마치 투명인간처럼 없는 사람으로 대한다.

‘너무 티 나는데.’

말은 안 해도 피부로 느껴진다. 토끼 가면이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한세라 자신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이렇다 할 근거는 없지만…….

‘방해꾼?’

꼭 그런 사람을 대하듯이.

‘저 애 도진이 좋아하나?’

단번에 짐작해낸 건 표본이 있기 때문에.

저런 타입도 가끔 있었다. 본인이 말을 걸 용기는 없고, 괜히 옆에 있는 그녀만 원망스럽게 보는 거다. 한세라가 제일 신경을 덜 쓰는 타입이기도 했다.

어쨌든 서연희가 작전을 설명한 다음, 네 사람은 계획을 실행했다. 결과는 순조롭게 성공.

이도진은 별달리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으며 나중엔 그녀를 선두에 세우는 것으로 능력을 인정했고, 토끼 가면은 꼭 필요한 통보만 전하는 것으로 적대심을 증명했다. 이도진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니 확실하겠지.

그리고 얄밉게 여유롭던 서연희가 작전이 끝나고 한세라에게 물었다.

<할 만할 것 같니?>

<딱히 문제없어요.>

어려울 건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이도진이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그는 오늘도, 마음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끼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에게 조언해줄 수는 없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다.

그가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지켜봐야 하니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으려 자신이 그어둔 선 바깥에 두는지. 그걸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가장 가까이 머무르는 방관자로서 살피고 기억해야 하니까.

그리고 일 년이 넘게 흘러 올해 봄이 다가왔을 때.

한세라는 서연희에게 제안을 받았다.

<때가 됐어.>

<뭘 말하는 거죠?>

<복수.>

<…….>

<제일 먼저, 염의준을 죽일 거야. 너도 참여할 거지?>

그녀에게도 염의준은 원수다.

대균열 때문에 어머니가, 올리비아 윈이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한세라는 거절했다.

<아니요, 참여하지 않겠어요.>

<좀 의외인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서연희는 그 이상 묻지 않았고, 기실 더 캐물었다 해도 말해주지 않았으리라.

복수를 이도진의 손에만 맡기는 이유. 아직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야 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염의준이 팬텀의 이인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한세라는 직감했다.

때가 머지않았다고.

이도진이 곧 한계에 이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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