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여우 가면 (3)
***
올해 3월 13일.
화이트데이를 하루 앞둔 날.
“혹시 급하게 하루 당겨서 문제가 된 사람 있나? 그러면 미안하게 됐는데. 이 나라는 내일이 화이트데이라고 해서 연인과 보내는 날인데······ 그런 거라던가.”
팬텀의 정규 멤버가 모두 참석한 회합에서 서연희가 건넨 말을 한세라는 상당히 못마땅하게 들었다.
화이트데이.
연인과 보내는 날.
굳이 그걸 언급한 이유가 뭘까. 괜히 부정적으로 넘겨짚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나 들으라고?’
서연희 본인은 회합이 끝나면 이도진과 둘이 시간을 보내겠지.
하지만 한세라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여우 가면으로선 두 사람이 뭘 하든 말리거나 방해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회합은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났다.
“소원을 말하지 않은 세 사람은 너희가 가장 욕망하는 바를 보스에게 털어놓아라.”
냉혹한 기세로 이도진이 선언한다.
서연희에게 들은 바 있다. 오늘 회합에서 불온한 자를 제거할 거고, 아마 소원 계약으로 찾아낼 거라고.
그러면서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할래? 너도 소원을 빌기는 해야 하는데.]
물론 계약을 맺는 척만 하고 넘어갈 수도 있으나 자칫 잘못하다 이도진이 알아챌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에게는 서연희도 명확한 원리를 모르는 능력이 있고, 그건 특히 정보 측면에서 유용하게 작용한다니까.
매번 의지대로 사용하진 못한단다. 그도 여우 가면의 정체가 궁금할 텐데 여태 모르고 있으니 오늘 능력이 발현될지도 미지수.
하지만 한세라는 아주 자그마한 리스크도 남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소원을 정했다.
“위험인물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너는 나와 싸워야만 하고, 이건 결코 번복될 수 없다.”
제거해야 할 자를 파악한 이도진이 나섰다. 그러는 동안 한세라는 서연희가 펼쳐낸 붉은 기운을 맞이했다.
<뭘 원해?>
머릿속에 울린 음성.
그녀는 청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소원을 일렀다.
<······그래.>
언뜻 안타까워하는 눈길이던 서연희가 손을 내렸고, 이내 붉은빛이 걷히며 소원 계약이 마무리됐다.
이도진과 로버트 그린의 전투.
토끼 가면의 개입.
JR 길드의 급습.
서연희가 그들을 쫓아내기까지.
워프 공간 앞에 선 한세라는 말없이 이도진을 바라봤다.
분명 냉혹해 보이는데도 많이 지쳐 있다고, 심리적으로 몰려 있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닐 거다.
복수를 준비해온 지난 십 년만으로도 그는 한계였다.
고작 염의준 한 명을 죽였을 뿐인데.
이제 첫발을 뗐을 뿐인데.
어쩌면 때가 어긋날지도 모른다.
이도진이 무너지려 할 때, 자신이 그 자리에 없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았으나 그녀는 휴학해 한국에 돌아가 있을 것까지 염두에 뒀고, 이도진이 부디 버텨주기를 바랐다.
제일고 교원 일이 그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기를.
이세아와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실제로 그렇게 됐다.
***
-세아: 사진 파일을 첨부하셨습니다.
-세아: 냠냠 (08:00)
뉴욕 시각으로 3월 14일 아침,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미국에 와서도 여유가 날 때면 메시지를 주고받는 이세아가 보낸 사진 파일.
산더미처럼 쌓인 과자와 초콜릿, 젤리, 기타 등등이고, 짐작 가는 바가 있던 한세라는 답장으로 물었다.
-한세라: 도진이한테 받은 거야? (08:10)
-세아: 너무 많이 샀어
-세아: ...ㅎ (08:11)
딱히 부정하지 않았고, 말투가 평소와 달리 들떴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틀림없이 자랑하는 거다.
-세아: 요즘 좀 이상해
-한세라: 누구? 도진이?
-세아: 응 (08:12)
말문을 튼 이세아가 쉼 없이 메시지를 쏟아냈다. 자기랑 한집 사는 사람이 제일고에 취직해 며칠 전 첫 수업을 했는데, 정말로 엄청나게 잘 가르친다고.
제1 아카데미 익명 커뮤니티, 통칭 ‘제타’의 개발자로서 한세라도 그 정도는 안다. 커뮤니티 반응이 폭발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집에서도 뭔가 달라졌단다.
-세아: 개학할 때부터 바뀐 거 같아
-한세라: 좋게?
-세아: 나쁘진 않게 (08:19)
남매 사이를 고려해볼 때 이 정도 평가면 극찬이다. 한세라는 잘 됐다는 답장을 보냈고, 그러자 이세아가 일렀다.
-세아: 그러니까 언니한테도
-세아: 이제 못되게 안 할 수도 있어
-세아: 참고해 (08:20)
‘뭔가 했더니.’
한세라는 웃음을 지었다. 바다 건너 한국에서, 저 나름대로 신중히 고민하며 메시지를 썼을 이세아가 귀여워서.
일부러 의식해서 이도진 얘기를 그녀에게 꺼내지 않는 애가 갑자기 자랑한다 싶더라니 이게 목적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화해를 주선해보려는 의도.
한세라는 차분하게 답했다.
-한세라: 그러고 보니 도진이랑 연락한 지 꽤 됐네.
-세아: 연락하게?
-한세라: 그냥, 시간 되면?
-세아: 난 연락하라고 안 했어 (08:21)
-세아: 언니가 한 거야
-세아: (귀여운 여우가 시치미를 떼는 이모티콘)
-세아: ㅎ (08:22)
연락해보겠다는 답에 이세아는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했고, 한세라는 못내 안쓰러웠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이런 거로······.’
화이트데이에 과자를 받은 것.
이도진에게 연락하겠다고 대답한 것.
겨우 그런 것들로 이세아는 저렇게나 기뻐한다.
언니라고 있는 게, 오빠라고 있는 게 여태 얼마나 못 해주고 신경을 못 써줬으면.
이세아의 언니로서 한세라는 이도진을 책망했고, 이도진의 친구이자 약혼자로서 그의 상황을 이해했다.
다만 그녀 자신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이세아에게 미안할 뿐이다.
귀여운 동생과 대화하며 오늘의 활력을 얻고, 미안함과 다짐 또한 굳게 다잡은 한세라는 마음으로 응원했다.
‘힘내.’
3월이 되면서부터 달라졌다.
염의준을 죽이고, 이젠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동생과의 관계도 개선하려 한다.
반가운 변화였다. 더는 버티지 못해 바뀐 걸 수도 있지만, 마냥 부정적으로 보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조금만 더 견뎌주길.
그녀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이후 한세라는 서연희에게 어떤 소식을 들었다.
[유해빈이라고 세아랑 같은 반 친구인데, 이번에 팬텀으로 들였어.]
“누군지 알아요.”
이세아와 대화하며 가끔 이름을 들었던 남학생이다. 한데 그 애가 팬텀에 입단하게 됐다니 무슨 연유일까.
그리고 궁금한 게 있었다.
“세아 남자친구 아닌가요?”
[남자친구······?]
왠지 모르게 말을 흐리던 서연희가 이내 일렀다.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니야. 걔랑 관련한 건 내가 시시콜콜 알려줄 수 없고,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혹시 여자앤가요?”
[······.]
드물게도 할 말을 잃어서 나온 침묵. 잠시 답하지 않던 서연희가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도진이도 몰라보는 눈치던데.]
“그냥 감으로요.”
팬텀에 입단했다니 평범한 애가 아닐 거다. 감춘 정체가 있겠지. 게다가 남자친구가 ‘전혀’ 아니라는 서연희의 반응도.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진 몰라요. 그걸 무슨 수로 알겠어요?”
[내가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도 나만큼 눈치 빠른 거 같아.]
“당신이랑 비교하는 건 칭찬으로 안 들리네요.”
사근사근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라 그걸로 통신 마법이 꺼졌고, 한세라는 방금 들은 이름을 떠올렸다.
‘유해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최고 수준의 유망주. 동생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제일고 유해빈은 이미 길드에서 영입 일 순위로 꼽는 인재다. 한세라가 향후 이끌어나갈 영원에서도.
‘되게 예쁘장한 애였지?’
다시 사진을 찾아봐도 그랬다.
여자라는 걸 알고 보니까 더 그런 느낌이 드는데, 무척 예쁘게 생겼다.
그냥 고등학교 학생증 사진인데도 쾌활한 매력과 미모로 이름난 어린 배우가 보이시하게 스타일링을 한 듯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세라는 스스로 황당해하며 되뇌었다.
별 의미도 없는 걸 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세아와 나이가 같은데. 일곱 살이나 어린 앤데.
설마 이 애가 이도진과 가까이 있게 된 게 신경이 쓰이기라도 하는 걸까.
‘그게 맞아.’
한세라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이성적이지 않았다.
“하아······.”
밀려오는 자괴감.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십 대 무렵, 이도진과 같이 교복을 입고 다니던 때는 꽤 여유가 있었는데.
‘네가 잘못한 거야.’
그래도 이 정도는 이도진을 탓해도 되겠지. 그렇게나 마음고생을 시켰으니 자신이 이렇게 된 거고, 창피해서 그 이상은 생각하기 싫었다.
시간이 흘러 이도진과의 통화.
“6월에 졸업하면 바로 갈 거야. 슬슬 취직해야지.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만하면 낙하산이라고 욕은 안 먹겠지 싶어서.”
<굳이 유학까지 안 가도 됐을 텐데.>
한세라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여기로 오고 나서 내가 그전에 몰랐던 걸 보고, 배우고, 반성한 게 꽤 많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너한텐 올해가 그런 시기인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네. ······친구로서.”
대부분 진심이었다.
바보처럼 그에 대해 모르고 있던 걸 알았다. 능력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그에게 잔인했던 순간을 반성했다.
딱 하나 거짓이라면······ ‘친구로서’라는 말.
그건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넨 부탁.
“우리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정말로 하고 싶던 말이 전해졌을까.
힘내라고. 무너지지 말라고.
이후 이도진은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그간 감춰왔던 천재성을 내보였고, 한세라는 그나마 안심이라고 여겼다.
머리칼을 염색하고 렌즈를 끼지는 않기로 했다. 안 어울릴 것 같다니까.
이대로, 그가 익숙하게 알던 모습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하지만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
올해 4월 17일.
한세라는 여우 가면으로서 이도진과 만났다. 경매에 나온 악마의 손을 탈취하고, 그걸 미끼로 끌어들인 범죄조직을 살해하는 일.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테러리스트로 아버지와 대하는 건 마음이 아팠지만, 이도진은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으며 완벽히 목표를 달성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보스.”
“왜? 문제라도 생겼어?”
“일 끝났으니 단원들은 돌려보내고,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이도진이 불안해 보인다.
무슨 이유일까.
서연희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고, 여우 가면이라는 신분으로는 그에게 어떤 조언도 건넬 수 없어 답답했다.
한세라로서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영웅 셋을 한국에 불러들인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수학여행을 가서 무슨 사건을 겪었는지. 그런 것들을 면밀히 파악하고 힘이 되어줄 수가 없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정도뿐.
“조언이라고 할 것도 없고, 오래 사귄 친구로서 참견하는 정도라고 생각해둬.”
<······뭘?>
“판단하기 애매한 게 있으면 정말 확실한 것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 애매했던 것도 명확해져 있잖아? 보통은.”
네가 뭘 원하는지 잊지 말라고. 그게 중요하다고.
한세라는 졸업식을 치르지 않고 귀국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본래도 보고 갈 생각이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랬으니까. 빨리 가서 만나야 했다.
그리고 이도진이 사과하려는 걸 알고 통화를 마쳤다. 들을 자격이 없고, 지금 들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한국에 가서.’
전화 따위로 어중간하게 매듭을 지으면 안 된다.
만나서 얼굴을 대하고, 이 년 전의 다툼 그다음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 지점부터 시작할 때만 가능하다. 나중에, 그가 마침내 무너지려 할 때,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가닿는 건.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도진의 현재를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 아니겠지. 서연희일 거다. 하지만 이도진이라는 사람의 근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역시나 자신이라고.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했던 멍청한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을 테니까.
***
6월 6일.
한세라는 이도진을 만났다.
“우리······ 아마 파혼할 거잖아.”
그 말에 이도진은 비겁하게 반응했다.
그게 어쩔 수 없이 슬펐고, 한세라는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이도진이 알고 있는 그녀 자신을.
한세라라면 이렇게 말할 거라 그가 알고 있을 자신을.
진실을 모르고, 여우 가면으로 그를 지켜봐 온 게 아닌 자신을.
순전히 연기만 한 건 아니다. 슬픔은 거짓이 아니니까.
한세라는 이도진이 화를 내고, 부탁하고, 해명하기를 기대했고, 그는 비겁하게만 행동할 뿐이었다.
그걸로 알았다.
이미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서연희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자기가 지키고자 했던 걸 대신하려 한다고.
한세라는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이대로 더 얘기해봐야 소용없다.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오늘 그와의 관계를 파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건데, 그래서 파혼하는 건데, 그다음까지 신세 지는 건 너무 뻔뻔하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뭐? 아빠가 너 부르면 그 자리에서 파혼 성립시키고, 그다음부터는, 다신 만나지 말자고?”
“그게······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예의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
짜악!
뺨을 때렸다.
이번 행동엔 그 어떤 연기도 들어가 있지 않았고, 그녀는 해선 안 될 질문을 했다.
“너······ 나 좋아했어?”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어.”
기어이 이도진이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 되려 부담을 안겨주고 말았다.
실책이라면 실책.
다만 어떤 면에서 보면 최선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도진이 마음을 닫고 있었으니까. 그걸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나았다.
‘완전히 기회가 사라진 건 아니야.’
단 한 번,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마음을 구할 수 있다.
***
이후로 한세라는 최선을 다했던 실책을 수습하려 했다.
“어, 음······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교실 나올 때 이세아 본 거 같은데······ 그러면, 안 갔을 수도 있으니까······ 좀 기다려 보시면, 음, 나올 수도 있어요.”
제일고 교문 앞에서 유해빈과 대면하며 눈치챘다.
‘얘 도진이 좋아하는 거 맞네.’
토끼 가면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니다.
실패도 자주 하지만, 그만큼 더 발전해가는 타입.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나중엔 신경이 쓰이는 애. 한세라가 개중에 그나마 성가셔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세아의 친구고, 서연희보단 훨씬 덜 괘씸하고, 일곱 살이나 어린 애니까 귀엽게 봐줄 만은 했다. 현재까지는 친절하게 못 대해줄 것도 없었다.
몹시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는 유해빈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한세라는 이도진과 만나서 부탁했다.
“요즘 학생들이 길드 고를 때 뭘 주로 볼까 싶어서.”
도움을 구하지 않고 특강을 진행해도 문제는 없다. 정말 목표했던 건 관계가 끊기지 않는 것이다.
주말의 다툼으로 마음이 조금은 열려 있을 테니까.
서연희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게.
의지가 의존이 되고, 의존이 집착이 되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그냥, 서연희가 마음에 안 들고, 그냥, 더 가까워지는 게 싫고, 그냥, 이도진이 그녀의 자리를 서연희로 대신하는 게 싫고, 그냥, 같이 얘기하고 싶고.
그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 둘이 잘 지내라고 중간에서 말해주고 그런 거 안 할래. ······굳이 안 해도 알아서 하는 거 같으니까.”
오빠가 맞고 들어온 것에 분노한 이세아의 선언. 많이 미안하고, 또 귀여웠다. 뚱해 있는 게 누구와 좀 닮은 듯도 하나 귀여움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고.
그리고, 올해 1학기가 끝나고 이세아가 런던으로 가면서부터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
고작 네 명이 마도 명문 심가에 침입한다는 작전.
한세라로서는 몹시 걱정스럽고, 반대하는 마음이 컸다.
“네 명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불가능에 가까워요. 반드시 가야 한다면 인원을 더 보강하고, 계획을 더 늦춰서-”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서연희의 싸늘한 지적.
[너한텐 의견을 낼 자격이 없어. 알고 있잖아?]
“······알고 있어요.”
한세라는, 여우 가면은, 이도진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 지켜볼 뿐이다.
이도진이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걸 알고 있었다. 작전 회의를 할 때 서연희가 넌지시 귀띔한 것이다.
[내 귀염둥이가 토요일까지 계속 일이 있어서. 얘가 인기가 많거든.]
토요일은 한세라 자신과 만나기로 했고, ‘계속’이라는 건 금요일에도 약속이 있다는 뜻. 암시한 바를 알아채고 서연희에게 직접 물어보니 순순히 알려줬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고 감탄하면서.
“어디야? 밖인가 보네?”
<아, 산책 좀 한다고.>
당연하겠지만 이도진은 그 사실을 숨겼다. 한세라는 얘기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고, 아버지를 보고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도진은 그녀와 멀어지려 했다.
토요일 약속. 이른 귀가.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걸까. 왜 더 거리를 두려는 걸까.
그리고 이도진이 서연희와 통화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맞네, 확실히 어제랑 다르긴 하네요.”
무척 편안해 보인다. 근래 한세라 자신과 대화할 때보다 훨씬 더. 예전의 자신과 대화할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벌써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기운 걸까.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몹시 슬펐고, 하지만 좌절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한세라만이 이도진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다가온 7월 10일, 토요일 밤.
심가 침입 작전은 실패했다.
***
“어째서 지시에 따르지 않았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요. 내 선택이 옳았어요.”
“······.”
“괜히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어떻게 봐도 당신의 실책이었으니까.”
이도진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연희를 구하려는 마음에 최선이 무엇인지 망각했다. 팬텀으로서, 작전 수행 중에는 처음 있는 일.
한세라는 안타까움을 감추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당신도 분명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서 이 일을 하는 걸 텐데, 그걸 망각하지 말라고요.”
이도진에게 그렇게 조언하는 게 자신에게는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는 이미 마음에서 그녀의 자리를 비우려고 하며, 그걸 부추기는 일이 되니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꼭 오늘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요즘 바빴어?”
“그냥······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서 그래.”
오늘로 사실상 파탄이 난 약혼 관계. 더는 막거나 미룰 수 없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가 파혼 서약을 늦추려 했다. 심지어 이도진이 가는 휴가지에 따라가려 한다.
서연희와 대화하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아버지, 혹시 어제 늦게 왔니?>
“맞아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추측이긴 하지만, 확실하다고 봐도 좋을 거야.>
심정웅과 심이수가 아버지를 습격했다고. 아마도 이도진이 구했을 거라고.
그 정보를 토대로 여행을 간 한세라는, 귀국하고부터 가장 마음껏, 이도진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이도진을 지키고 싶어 한다.
이도진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여전히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다시는 이런 순간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세라는 욕심을 정말 많이 부렸다.
“우연히 만난 거긴 한데, 서로 못 본 척 지나가는 것도 우습고······ 잠깐 걸을래?”
우연이라고 말한 건 절반만 사실이다. 그쯤 혼자 시간을 보내러 올 것 같아서. 그걸 정확히 맞춘 게 기뻤다.
“학생은 이름이······ 진유리 맞죠? 세아 친구. 나 누군지 알겠어요? 제일고 특강 때 서로 봤을 텐데.”
진유리와 알게 됐다.
요즘은 유해빈보다 이세아와 더 친한 듯한 친구.
샬럿 테이트의 제자.
면역체 보유자.
한세라는 그녀의 위험성과 잠재력을 단번에 감지했다.
‘얘는······ 좀 많이 그러네?’
얼핏 보면 토끼 가면보다 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지만, 얼핏 보면 유해빈보다 더 실수가 잦을 것 같지만.
그건 지금에 불과하다. 그릇이 너무 커서 초반만 성장세가 더딘 것처럼 보이는 거다. 한세라가 제일 경계하는 타입. 서연희야 그만큼 뻔뻔한 여자를 본 적이 없으니 논외로 치고.
어쨌든 넷이서 재밌게 놀았다. 이 순간만큼은 고민하지 않고, 두고두고 웃을 수 있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다음 날도.
유해빈까지 온 건 예상 밖이었지만, 남이섬을 여행하고 이도진의 생일을 축하했다.
“너무 한 번에 다 하려고 안 했으면 좋겠어.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 조언은 괜찮지? 친구로서.”
친구로서도, 다른 의미로서도.
“넌 나 이쪽으로 휴가 오는 줄 몰랐지만 난 알았잖아? 혹시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챙겨오긴 했어.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고르고 고른, 꼭 만나서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선물을 줬다.
그녀도 생일을 축하받았고, 다섯 명이 무척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이도진에게 받길 바라는 선물을 말했다.
“그거 나 줄래?”
“이거? 담배?”
“응, 너 지금 가지고 있는 케이스랑 라이터까지 전부.”
가지고 있고 싶어서.
그리고 한 가지.
“다음에 너랑 나랑 만났을 때.”
“네가 조금 엇나가는 것 같아서 참견하고 싶을 때.”
“그때는 내가 하는 말, 흘려듣지 말고 제대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너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내가 아니겠지만······ 나 장담할 수 있거든.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이도진을 제일 잘 아는 건 나라고.”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까, 그때는 내 말 잘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생일선물이라기엔 좀 뭐한데,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이도진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줬으면 했다.
달이 바뀌어 8월.
그가 심가에 납치당했다.
***
[도와줘야겠어.]
“뭘 말이죠?”
[네 방식대로.]
서연희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도진이 심가에 사로잡혔다고.
[너도 노릴 거고, 네 아버지도 노릴 거야.]
“약혼이랑 연관이 있는 거겠죠?”
심이수와 심정웅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를 공격했고, 이도진을 납치했다. 약혼과 연관이 있으며 한세라 자신까지 노릴 가능성이 크다.
[도진이······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네가 하려는 걸 해줘.]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계획을 구체화하는 게 좋겠어요.”
여러모로 고민해야 할 게 많았다.
아버지에게 알릴 수 있는지. 대균열의 진상을 알면 아버지가 죽는다고, 이도진이 아는 사실이 해제되었는지.
심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들을 끌어낼 것인지.
서연희와의 대화를 마치고 한세라는 탁자로 손을 뻗었다. 자그마한 물체 두 개. 이도진에게 받은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다.
지금껏 오기를 바라던 순간.
그러나 오지 않기를 바라던 순간.
한세라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피웠다. 굳건한 다짐을 되뇌면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곳에 그녀 자신도 있기를 바랐다.
***
계획을 완성했다.
한세라는 파혼 서약을 8월 22일 밤에 하려 한다는 뜻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이도진이 결행할 때로 정한 시점.
약속 장소에 심정웅과 심이수가 오겠지. 그 틈에 서연희가 이도진을 구해내고, 부족한 정보를 마저 얻어서 이후의 방향을 결정하려 했다.
[그렇게 해도 돼?]
“원래 그날밖에 시간이 안 됐어요. 저랑 아빠 둘 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터라 22일 외에는 가능한 날이 없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녀의 의지였다.
“먼저 도진이 의사를 확인해주세요. 걔가 어떻게 하려는지.”
이도진은 알리길 원치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대.>
심가 저택에서 그를 구출한 서연희가 전해준 말.
진상을 알릴 수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앞으로도 쭉 숨기고 싶다고.
‘오늘은 아닌 걸까.’
한세라와 서연희는 계획을 전면 보류하려 했다. 어중간한 건 소용이 없으니까.
서연희는 이도진과 심가로 향했고, 한세라는 아버지와 남아서 유해빈의 감시를 받았다.
“무신과 방벽의 딸. 촉망받는 각성자. 길드 영원의 차기 대표. 그런 사람이 테러리스트한테 협조해도 되는 건가?”
“나만 위험한 게 아니니까요.”
“글쎄······ 그건 영웅이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부모님이 영웅이라고 자식도 반드시 영웅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게 답한 한세라는 유해빈 쪽으로 걸었다. 서연희의 마법을 해제하고, 외견을 바꾸고, 손에 여우 가면을 쥐고.
그리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릇이 좀 많이 작거든. 세상을 구하는 영웅보다······ 당장 내 옆에 있는 내 친구 구하는 게 훨씬 더 멋진 것 같아서.”
제일고 특강 당시 유해빈이 던진 질문에 답한 말.
각성자가 지켜야 할 원칙은 중요하다.
개개인의 신념 때문에 독단적으로 어겨선 안 된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어기고 말고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한세라는 자신이 그걸 진정으로 어겼다고 생각지 않는다.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악인과 싸우는 것. 물론 각성자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가족을 구하고, 친구를 구하는 것. 그것도 각성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비단 마력을 지닌 각성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
무신과 방벽. 세상을 구한 두 영웅의 딸은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작은 영웅을 택했다. 그걸 위해 지난 이 년을 살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스아아아아-!
공간을 넘은 한세라는 여우 가면을 쓰고 심가에 도착했다.
<바로 나서도 되겠죠?>
<네가 알아서 판단하면 돼. 내 귀염둥이 다치지 않게 부탁할게.>
내 귀염둥이.
저 말을 들으니 짜증이 솟구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연희가 이어서 말한다.
<너도 알겠지?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고, 다음에 나랑 다시 얘기해.>
여기까지는 인지하고 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유해빈.
‘그 애도 알게 됐으니까······.’
서연희와 그녀 두 사람이 아니다. 유해빈까지 셋이 이도진에게 감추는 거다. 그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선을 많이 넘은 것 같다.
초조함, 미안함.
그리고 달갑지 않은 변화가 생겨났다.
콰앙! 콰아앙!
이도진이 미친 듯이 심정웅을 몰아붙인다. 평소처럼 싸우는 게 아니다. 명백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한세라는 서연희에게 물었다.
<도진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답이 돌아왔다.
심이수의 목적을 알아냈다고.
죽은 어머니를 살려내는 것.
한세라는 주저 없이 말했다.
<······계획한 대로 하겠어요.>
위유웅-
서연희가 마법을 발동했다.
아버지를 저택으로 불러왔다. 공터에서 대기하던 유해빈을 데려왔다.
이도진이 심정웅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 심정웅이 이 저택 사람들을 살리려 했음을 알게 되면서.
이도진이 심이수를 죽였다.
부모님을 잃고 복수를 위해서 살아온 그가, 어머니를 살리려 하는 사람을 죽였다.
마침내 그는 무너졌다.
“어떻게 말해-!!!”
“내가, 내가-! 아저씨한테 그걸 어떻게······ 그걸 어떻게 말해요······.”
견디지 못해 가면을 벗은 이도진이 울면서 소리친다.
한세라는 기억한다. 그는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린 동생이 이미 울고 있어서. 슬퍼하며 주저앉아 있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울지 않았는데. 그 후로도,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다 감당하려고 했던 애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게 됐다. 속에 있던 말을 모조리 토해내며, 한편으로는 바뀌고 있다.
착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이 세상이 소중하고.
복수하려 하고.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그렇게 해왔는데.
한세라는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는 이제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지 않게 될 거다.
버려야 할 걸 버릴 줄 알게 될 거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판단하게 될 거다. 차갑고 냉정한 저울에 달아서.
이 세상 자체가 소중하지 않게 될 거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우선순위로 두고, 그 나머지 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더 외면하고, 나중엔 귀찮고 하찮게 여기게 될 거다.
가장 중요한 것.
부모님의 복수.
그것만 바라보며 살게 될 그는, 더는 착하지 않게 될 거다.
한세라는 그게 싫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 하는 건, 나만 그러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래서 이도진에게 말했다.
“아니, 네가 틀렸어.”
앞으로 나섰고, 그가 아는 한세라로 돌아와, 여우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다시금 말했다.
“방금 네가 한 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어.”
말 그대로.
전부 다 틀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떤 것부터 말해줘야 할까.
너무 많아서 갈피를 잡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제일 하고 싶은 말.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꼭 해줘야 할 말.
그것부터 그에게 말해줬다.
“도진이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세라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마치 그에게 모욕을 들은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는 절대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신 적 없어.”
죽음을 앞둔 어머니와 딸.
올리비아 윈과 한세라 둘만이 아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