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Chapter 42. 용서 (1)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육 년 전.
한세라가 제일고에 다니던 열아홉 살 때의 여름.
그녀는 오전 일곱 시쯤 눈을 뜨고 방에서 나왔다. 방학임에도 기상 시각에 변화는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이 많았으니까.
집안일을 상당 부분 도맡아야 했고, 근래 들어선 일주일에 한두 번만 출근하는 아버지께 식사를 차려드렸다.
“다녀오세요.”
대문 밖까지 나서 아버지를 배웅한 그녀는 서둘러 집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넓은 집에서도 가장 좋은 방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삐익, 삐익-
무감한 기계음.
숨소리는 아주 가늘게만 들려왔다.
그녀의 어머니, 올리비아 윈이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쾌활하고 밝은 사람. 존경스럽고,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어머니.
지금은…… 많이 아프시다.
본인 힘으로는 방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 손가락을 까딱이고,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이제 어렵게 됐다.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잠든 채 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깨어 있을 때 몹시 힘겨워한다. 그나마 가능한 거라곤 눈을 깜빡이고,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끊어질 듯 천천히 건네는 정도.
겨우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와 싸워서 승리한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은.
“으음…….”
그즈음 희미한 신음이 났다. 표정을 살짝 찡그린 어머니가 깨어나 그녀를 본다.
“세라 일어났니? 아침은……? 아빠는, 출근하셨고?”
한세라는 두 가지 이유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그나마 상세가 좋으신 듯해서. 그리고, 정작 본인이 저렇게 아픈데도 딸과 남편부터 챙기는 게 슬퍼서.
두 번째 마음은 감추고, 첫 번째 마음만을 담아 그녀는 맑게 답했다.
“밥 먹었죠. 컨디션 좀 어때요?”
“응……. 오늘은, 괜찮네. 잠깐만…….”
그렇게 답한 어머니가 몸을 일으키려 힘을 준다.
힘겨운 침음성. 그 외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일어나려는 시도만 했을 뿐이다.
비교적 괜찮은 날이라지만 그래도 혼자서는 불가능했고, 민망하게 웃으며 어머니가 부탁한다.
“세라야, 엄마 좀…… 일으켜줄래?”
한세라는 그 말에 따랐다. 정성껏 어머니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혀줬다.
이제 익숙한 일. 앞으로도 해주고 싶고,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
그리고 휠체어에 태워 거실로 나서려는데…….
“오늘은…… 잠깐, 밖에 나갈까……?”
“밖에요……?”
한세라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바깥이라고 해본들 마당 정도가 한계다. 병실이 가장 낫고 그다음이 집 내부. 마지막이 마당이다.
거기까지는 한태강이 모든 힘을 기울여 마련해둔 치료 기능이 그나마 유지된다. 하지만 그곳을 벗어나 대문을 나서면, 어머니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겠지.
그러니 갑갑해서 마당까지만 나가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가 되고, 그래도 걱정스러워 한세라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자고도, 안 된다는 말도.
하지만 어머니가 옅게 웃으며 말한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
엄하게 키우는 건 아버지의 몫. 딸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건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걸 다 받아놓고서, 반대 상황에서 안 된다고 말하는 건, 한세라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이지만 마당의 공기는 덥지 않았다. 쾌적한 온도에, 마력을 실은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다. 더위에 지쳤는지 날아든 새가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지저귄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모녀는 마당을 한가롭게 걸었다. 나무 그늘에 둔 의자에 앉은 한세라는 옆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때요?”
“응, 공기도 맑고…… 햇볕도 좋네. 안 나왔으면, 억울했을 것 같은데.”
그러다 어머니가 문득 말을 꺼냈다.
“도진이 지금 일어났으려나? 저번 달에 보고 못 봤는데…… 오랜만에 그 애 목소리도 듣고 싶어서.”
“……방학이라서 자고 있을 것 같아요.”
한세라의 목소리가 살짝 침울해졌다. 그걸 눈치챘는지 어머니가 묻는다.
“싸웠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왠지 모르게 이전보다 조금 멀어졌다. 딱히 다툰 건 아닌데. 그런데도 이전만큼 가깝지는 않게 됐다고 자연스럽게 느낀다.
어머니의 간호에 집중한 자신의 탓일까.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 이도진도, 티가 나지 않게, 아주 조금씩, 거리를 두려는 것 같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도진이가 워낙 정이 많고 착해서…… 엄마한테, 되게 미안해하는 것 같더라고.”
“걔가 엄마한테요?”
생각지 못한 말.
이도진이 왜 미안해하는 걸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오히려 한세라도, 부모님도, 그에게 고마워하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꼭 엄마 아픈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도진이가 그렇게 행동하거든. 엄마 젊을 때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 엄마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자책하는 사람들. 그래서 도진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대충 알겠거든. 누구 때문이 아닌데.”
어머니가 천천히, 힘을 모아서, 아주 조금 고개를 올렸다. 쏟아지는 햇빛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한다.
“엄마는 지금도 행복하다? 더 잘 싸웠으면, 대균열이 없었으면, 마력이 없었으면, 이렇게 나중 돼서 아파야 하는 능력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생각은 안 해.”
“……왜요?”
한세라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처럼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걸 후회하지도 않고, 억울해하지도 않는 걸까.
그리고 어머니가 답했다.
“엄마가 선택한 거잖아.”
받아들일 수 없는 말.
한세라가 나직이 답했다.
“아프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알았어도,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그 사람이 말해줬어도…… 그래도 똑같이 했을 거야. 그렇게 안 하는 건…… 애초에 엄마가 아니잖아? 아빠 보자마자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고, 관심 없다는 사람한테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데이트 신청하지도 않았을 거고, 우리 이쁜 딸도 안 낳았을 거고, 도진이랑 세아도 못 봤을 건데…… 그게 우리 딸이 아는 엄마는 아니잖아?”
한세라는 아직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떼를 쓰듯이, 억지로라도 이유를 만들어내 재차 물었다.
“신이 있는데, 그게 나쁜 사람이면요? 마력을 써도 안 아프게 할 수 있었는데, 그런 거 신경 안 쓴 거면요? 그러면…… 원망해도 되잖아요.”
“글쎄……?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웃는다.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그건 엄마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엄청 좋은 사람일 거야.”
이유를 묻자 꼭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답했다.
“신이 정말 그렇게 못된 사람이었으면…… 그때 세빈이랑 시혁이가, 엄마랑 아빠가, 아마 못 이겼을걸?”
비밀을 속닥이는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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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염화’를 발동합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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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와 눈을 마주했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 세라가 이제껏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들이 내게 흘러들어온다.
전부 다 볼 수는 없다. 드문드문, 세라가 내게 말해주길 원하는 것들만. 내가 알아주길 원하는 것만.
“그래서 봄에 네가 처음 복수했을 때 참여 안 했어. 복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엄마가 원하진 않을 거니까. 순전히 내 의지로 복수하려는 거니까. 엄마랑 했던 말 너한테 안 알리고 나만 아는 상태에서는…… 아직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내게 말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 윈이 말했다.
세라 본인도 온전히 수긍하지 않았고, 나는 틀림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더 자책하고 슬퍼할 거라고.
나중에, 슬픔이 잔잔하게 가라앉았을 때, 내가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고 나면, 그때 말해주라고.
그녀는 비밀이라며 맑게 웃었다.
그리고 지금.
세라가 당당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묻는다.
“그때 내가 엄마한테 얘기한 거 이상으로, 너 반론할 수 있어?”
할 수 없다.
나는 올리비아 윈이 고통스럽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고, 무신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태강과 올리비아 윈이 마왕 카르딘에게 승리할 확률은 2할도 안 됐다. 카르딘은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했다.
이시혁과 정세빈이 악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설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쪽 다 못 이겼어야 해. 설정 하나하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야기의 흐름을 신경 썼으니까. 등장인물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말과 행동만 글로 옮겼으니까.
그러니까 졌어야 하고, 하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만은 억지를 부렸다.
그냥 이기게 했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럴 힘이 없는데, 그래도 이기게 했다.
그들이 지는 게 싫어서. 책 속의 이야기가 끝나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그러니까 반론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라. 비겁한 마음을 자각한 나는 세라에게 말했다.
“그런다고 내가 잘못한 게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야. 너 속이고, 아저씨 속이고, 세아 속이고…… 내가 떳떳한 게 아니잖아.”
“나도 너 속였어.”
“…….”
“나도 아빠 속이고, 세아 속였어.”
“너랑 내가 한 일은 같지 않아. 그게 어떻게 같-”
“다를 건 뭔데?”
세라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선다. 그대로 걸어오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테러하고, 훔치고, 죽이고, 너 그렇게 했고, 나도 그렇게 했어. 너는 나랑 아빠랑 세아한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나는 너 걱정해서. 그 둘이 무슨 차이가 있어? 순서만 달라. 네가 먼저고, 내가 너 따라서.”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했다. 되받아쳐야 했다. 세라가 나랑 같은 일을 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늦었다. 내가 입을 떼는 것에 앞서 세라가 또 한 번 말한다.
“네가 지금까지 잘못했다는 것도, 심이수랑 다를 게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돼. 도진아, 네가 보기에는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아니다.
나는 내 또래 중에 세라만큼 똑똑하고 사려 깊은 애를 본 적이 없다. 또한 자기 주관이 확실한 애다.
아닌 건 아니라고, 옳은 건 옳다고,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그 넷을 명확히 구분하고 판단할 줄 아는 애다.
“이 년 동안 너 지켜봤어. 네가 뭘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옆에서 다 지켜봤어.”
세라가 저편을 본다. 서연희가 있는 곳.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난 저기 저 사람이랑 달라. 무조건 네 편만 들지 않아. 나라는 감시자가 없는 줄 알면서 네가 그동안 해온 일을, 전부 다 보고, 전부 다 판단했어. 너한테 직접 물어볼게. 친구라고, 약혼자라고, 네가 잘못한 건데도 잘못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 안 해.”
이제 세라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다. 시선이 가까이 닿는다. 숨결이 느껴진다. 세라의 눈이 조금 물기에 젖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줄게. 너를 제일 잘 알고, 너만큼 똑똑하고, 네가 여태 해온 일에 아무 참견도 하지 않고 지켜봐 오기만 한 내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야.”
세라가 마침내 말한다.
“너, 잘못한 거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거 다 했어. 잘못 저지르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그 말에는, 간신히 되돌릴 말이 있었다.
“앞으로 다를 수 있어. 잘못할 수도 있고, 못 버틸 수도 있어. 방금도…… 그러려고 했고.”
세라가 웃는다.
비웃는 게 아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설명해주듯이, 타이르듯이 말한다.
“네가 뭘 지키고 싶어 하는지 알아.”
세라의 마음이 전해진다.
착하고, 이기적이면서 욕심이 많고, 내가 글로 적어낸 이 세상을 좋아하고, 복수하려 하고. 세라가 보는 나는 그랬다.
“근데, 그거 다 할 수는 없어.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해. 전부 다는…… 못 하는 게 정상이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좌절감 같은 게 든다.
세라도 불가능하다니까.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면 버릴 수밖에 없잖아. 하나나 둘쯤, 아니, 셋까지도, 제일 중요한 것 하나만 남길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세라가 이어서 말했다.
“네 힘이 닿는 데까지 하면 돼.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세라 본인도 도와주겠다고. 그러니까 열심히 하라고.
이번에도 잘못 생각한 거였다.
“저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거야.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힘내라고. 응원하고, 조언하고, 지켜보면서 바로잡아주겠다고. 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뭔데?”
세라가 답한다.
“나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을 할 거니까. 너만 내가 소중한 게 아니고, 나도 네가 소중해. 너만 목표가 있는 게 아니고, 나도 내 의지로 열심히 하는 거야. 난 주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받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야. 네가 전부 다 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나는 발에 힘을 줬다. 버티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아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세라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해도 돼?”
단지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내 몫이라고, 혼자 감당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나눠도 될까.
그걸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까. 받아들이고,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까지 허락해도, 그래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나갈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라가 응원처럼 답한다.
“너 지금도 그러고 있어.”
“하아…… 아……. 아아…….”
말을 잇지 못하겠다.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는 것도 힘들었다.
세라가 손을 뻗는다. 흘러내리려던 내 눈물을 닦아낸다. 그러는 자기도 눈가에 투명한 물방울을 매달고 있다.
그러면서, 내게 말한다.
“그리고 하나 더,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 있는데.”
“……뭔데?”
“너 그때 나한테 그랬지? 나 좋아한 적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세라가 귀국하고 만났을 때, 추모 광장에서.
그때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지금은 활짝 웃으면서, 세라가 말한다.
“난 너처럼 거짓말 안 해.”
서로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던 마음을 내게 전한다.
“나 너 좋아해.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