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Chapter 42. 용서 (2)
***
한편 저만치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유해빈. 그녀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핑핑 도는 느낌이다.
‘정리가 잘 안 되는데…….’
우선 여우 가면이 한세라였다.
아까 공터에서 그녀가 가면을 꺼내 들었을 때 유해빈은 정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그쪽이 거기서 왜 나와?’라는 느낌.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여우 가면을 손에 쥐고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한세라가 한 말.
“난 그릇이 좀 많이 작거든. 세상을 구하는 영웅보다는…… 당장 내 옆에 있는 내 친구 구하는 게 훨씬 더 멋진 것 같아서.”
그야 놀랐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엄청나게 멋있었다.
자세한 정황을 몰라도 한세라의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지금껏 여우 가면으로 활동한 건, 오직 이도진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일단 직관적으로 멋있었다.
서연희는 이미 알고 있던 일. 처음부터 둘이 상의해서 결정한 듯했다.
‘근데…… 그러면 속인 거잖아.’
둘이 연 단위로 이도진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뜻이었다고 해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긴 힘든 일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문제가 있고.
‘나도 끌어들이는 건가?’
만약 한세라가 오늘도 알리지 않는다면?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는 거라면?
그러면 의도치 않게 사실을 알게 된 유해빈 자신까지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 못 할 것 같은데…….’
속일 자신도 없고, 속이기도 싫다. 그렇게 복잡한 고뇌를 하며 심가에 도착한 유해빈은……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했다.
“어떻게 말해-!!!”
이도진이 운다.
너무, 정말 너무너무 충격이었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던 부모님이 사실은 슈퍼맨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접한 것과 비슷한 충격.
동생 바보인 것도, 서연희와 나누는 낯 간지러운 대화도, 한세라에게 미련을 가지는 모습도, 그런 건 모두 이해 가능했다.
하지만 저렇게 무너지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며 소리치는 건,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밖이었다.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 그만큼 냉철한 사람이, 그만큼 심지 굳은 사람이, 한데도 저렇게 평정을 잃고 울부짖으려면……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더 많이 힘들었던 거야. 내가 아는 거보다 훨씬.’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버틸 수 있어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결국은 한계가 와서, 그래서 이렇게 무너진 걸지도 모른다.
‘달래줘야 하는데…….’
실망한 게 아니라 안쓰러웠다.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방법을 몰랐고, 마침내 한세라가 나섰다.
“네 힘이 닿는 데까지 하면 돼.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난 주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받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야. 네가 전부 다 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이제 유해빈은 다 이해했다.
한세라가 왜 여태 숨겨 왔는지, 어째서 그래야만 했는지를 이해했다.
‘알고 있어서.’
언젠가는 이도진이 이렇게 무너질 거라고. 그때, 자기가 구해줘야 한다고. 그것 때문에 감춰온 거다.
어느새 한세라를 보는 유해빈의 시선에는 경외가 깃들어 있었다.
‘찢었다…….’
어휘는 가벼웠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건 유해빈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저만큼 사려 깊고, 저만큼 이도진을 생각하고, 저만큼 가장 필요한 말을 건네줄 수 있을까.
단순히 똑똑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닐 거다.
그만큼 오래 고민하고 간절히 바랐기에, 그래서 가능한 거겠지.
유해빈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엄마…… 나 커서 한세라가 될래요…….’
정말로 한세라가 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녀만큼, 나중엔 그녀보다도 어른스러워지고 멋있어지고 싶다.
도달해야 할 이상향.
뛰어넘어야 할 목표.
유해빈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했다. 한데 다음 순간.
“너 그때 나한테 그랬지? 나 좋아한 적 없다고.”
“난 너처럼 거짓말 안 해.”
“나 너 좋아해.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어?’
저기까지 한다고? 지금? 이 타이밍에?
유해빈은 당황했고,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타이밍이 안 좋은 것도 아니다. 한세라 본인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또 오기도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까드득-
아주 작게, 하지만 몹시도 선명하게 들려온 소리. 순간적으로 움찔한 유해빈은 옆을 봤다. 소리가 들려온 곳, 서연희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유해빈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보스 화났다…….’
표정엔 딱히 변화가 없다. 무표정이라고 봐도 될 정도. 하지만 그냥 무표정도 아니다. 화가 치밀어오르는데, 또 이도진이 안정을 찾은 건 반길 일이라서. 양쪽이 평형을 이루고 있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거겠지.
직설적으로 말해서…… 다 뒤집어엎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거다. 한세라가 그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러고 보니까…….’
한세라가 은근히 서연희를 언급했다. 나는 저 사람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논리 자체는 이해가 된다.
‘그래도…….’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한세라가 말한 것만큼 서연희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도진의 곁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은 서연희니까.
‘그냥 방법이 다른 거 아닌가?’
누가 더 옳은 게 아니라.
이도진이 도움을 요청했던 서연희와, 이도진에게 알리지 않고 그를 도우려 했던 한세라. 딱 그 차이일 뿐인 것 같은데.
‘어쩌면…….’
한세라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없다고.
다 알면서, 특별히 자신이 더 우위에 있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일부러 평가절하한 거라고.
기습적인 고백도 고백이지만 서연희가 특히 화를 내는 건 그 지점이라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무서운 사람들…….’
선제공격을 거하게 날려놓고도, 어쨌든 전체적인 전세로는 아직 자신이 불리한 걸 알고 ‘지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라며 일단락하는 한세라도.
한 방 거하게 맞아놓고도, 어쨌든 지금은 자신이 나서 봐야 손해만 본다는 걸 알고 참아 넘기는 서연희도.
둘 다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문득 드는 자괴감.
‘그럼 난 뭐지……?’
답은 정해져 있다.
서연희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고, 이 자리의 다섯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유해빈은 그 답을 되뇌었다.
‘난…… 용가리.’
‘용용이 빡대가리’의 줄임말이었다.
***
공터에 도착한 직후 서연희가 말했다.
“심정웅이 증거를 남겨두진 않았을 거야. 알아서 처리했을 거고…….”
“나머지는 그냥 이대로 둬도 저희가 한 일로 알려질 것 같아요. 그것까지 숨기는 건 어려울 거고요.”
가장 오래 산 영웅이 죽었다.
그의 손녀도 죽었다.
심가가 폐쇄적인 집단이라 해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번 습격까지 더해 세간에 공표되겠지.
테러조직 팬텀이 이전에 심가를 습격했고, 기어이 심정웅과 심이수를 살해했다고. 천만다행으로 다른 인명 피해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마도 명문가를 그야말로 초토화했다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아볼게요.”
+
OX 질문 (1/2)
-질문 내용: 심가와 관련해 고유 퀘스트 클리어 조건 이외의 정보가 드러나는지 여부
-정답: X
+
팬텀의 일원으로서 인외 지성체를 제거할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는 성립하되 다른 정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답변.
나도, 서연희도, 유해빈도, 세라도. 팬텀으로서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 거다.
방금 OX 질문으로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으나 심정웅과 심이수의 목적도 아마 어둠에 묻히겠지.
“오늘은 이대로 해산해도 걱정할 일 없겠어요.”
그리고 또 하나 확인했다. 고유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을 위반하고 있다는 문장. 그게 사라졌다. 팬텀의 멤버가 아닌 한태강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는데. 내가 그러지 않겠다고 결정했는데.
이런 뜻이겠지. 한태강 자신이…… 내게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그가 나와 세라를 본다. 오늘 알게 된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하는 표정. 그리고 나직한 어조로 나를 부른다.
“도진아…….”
나는 애써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
“저 다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이제 다 괜찮으니까.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었다.
“말씀 못 드려서, 변명 한마디도 못 드려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이른 사죄. 한태강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진다. 내 쪽으로 온다. 눈시울이 시뻘게졌고, 포옹처럼 나를 감싸주며 말한다.
“네가, 뭐가…… 왜 죄송해……. 내가, 너를 믿었어야 했는데…… 그럴 애가 아니라고, 네가 말을 안 해도 알고, 이해했어야 했는데…….”
그 말에 조금 용기를 얻었다. 주저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그래…… 말해라.”
“그러면, 아, 좀 창피한데…….”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나으니까. 멋쩍음을 가리듯 웃으며 부탁했다.
“고생했다고…… 딱 한 번만, 저한테 그 말 해주시면 안 돼요?”
한태강이 안은 팔에 힘을 준다. 그리고 울음처럼 계속 말한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미안하다, 몰라줘서 미안해…….”
“괜찮다니까요.”
정말로 괜찮았다.
이거면 충분했다.
한태강이 나를 용서했고, 나도, 그럴 자격은 없지만…… 그를 용서했다.
이걸로 다 괜찮았다. 힘들었던 게, 전부 다 괜찮아졌다.
그즈음 세라가 다가와서 묻는다.
“둘 다 우는 거예요?”
“안 울어.”
장난을 거는 듯한 말투.
나는 대번에 답했고, 한태강은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세라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별문제 없으면 오늘은 해산하자. 나도 아빠한테 자세히 말씀드려야 하고, 파혼은…… 다음 주에 만나서 하면 되겠지?”
그러자 한태강이 말한다.
“이제 다 알게 됐는데 굳이 파혼할 필요는-”
“본인이 잘 모르는 문제에는 나서지 않는 게 옳지 않을까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은 사람은 서연희였다.
스으으으-
그녀의 모습이 바뀌어 간다. 팬텀 보스의 외견에서, 안개의 마녀 서연희로.
한태강이 눈을 부릅뜬다. 세라가 내게 정체를 알릴 때 서연희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으니까. 직접 언급하지 않아도 아는 거고, 해서 한태강은 이제야 알게 됐다.
팬텀의 보스가 서연희라고.
“이게…… 네가-”
“그렇게 됐어요. 설명 듣고 싶은 게 있다면 세라한테 들어요. 내가 일일이 말할 생각은 없으니까.”
학교 선배라 존대는 하나 호의가 담겨 있지 않은 대답. 그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으흠, 흠…….”
용 가면을 쓴 유해빈이 낸 소리. 조금은 엉거주춤하게 나선 유해빈이 가면을 벗는다. 의미심장한 눈길이 세라를 향하고, 그러나 세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딱 봐도 용 가면이 누군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듯한데. 결국 뭔가 어중간하게 정체를 공개한 유해빈이 침울하게 말한다.
“제일고 2학년 유해빈입니다……. 이도진 선생님 제자이자 이세아 친구고, 팬텀에서 용 가면을 맡고 있습니다…….”
짝짝짝.
짝짝.
서연희와 세라가 작게 손뼉을 친다. 짐짓 안쓰러워하는 듯한 반응. 더욱 풀이 죽은 유해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 왜 호응을 그렇게 해……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키기로 했다. 나까지 그러면 우리 용용이 기가 더 죽을 것 같아서.
마법으로 전투의 여파와 핏자국을 지우고, 우리 앞에 워프 공간이 일렁이고 있다.
세라와 한태강은 차를 타고 돌아가야 하고, 나와 서연희와 유해빈은 공간이동으로 내 집에 돌아가려 했다.
두 사람에게 인사한 내가 워프 공간을 넘어가려 하던 그때.
“도진아.”
“네, 아저씨.”
한태강이 무거운 표정으로, 시리게 타오르는 분노를 담아서 묻는다.
“대균열, 네가 복수하려는 놈들……. 누가 남아 있는지 알고 싶구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려는 게 아니다. 그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나는 답을 일렀다.
“다섯 명 남았어요.”
본래 여덟 명이 있었다.
한국에서 둘.
유럽에서 둘.
북미와 중남미에서 둘.
중국과 일본 중에서 하나.
그 외의 나라들에서 하나.
그중에 내가 이름을 알아낸 건 다섯이다.
‘철권’ 염의준.
‘몽상가’ 아르노 뒤레.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
그리고…… 한국에 남은 배신자 한 놈.
“윤의성.”
한국 각성자 협회의 수장.
‘곡예사’ 윤의성.
그 개새끼를 쳐죽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