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73화 (173/207)

#173화. Chapter 42. 용서 (3)

36 영웅을 다섯이나 배출한, 제1 아카데미 역대 최고의 황금 세대.

이시혁과 정세빈이 번갈아 가며 수석을 다퉜다.

올리비아 윈이 그들에 이어 3등이었고, 염의준이 5위권.

윤의성은 4위였다. 염의준보단 확실히 뛰어났으나 이시혁과 정세빈은커녕 올리비아 윈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 그런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보다 앞섰던 자들. 이시혁과 정세빈이 죽었고, 올리비아 윈이 죽었다. 아래에 있던 염의준도 사망했다. 남은 건 윤의성 한 명뿐.

가장 오래 생존한 그는 한국 각성자 협회의 수장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느슨하고 유들유들한 성격.

농담을 좋아하고, 웃음이 많고, 각성자 협회 모든 직원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며 가족처럼 대한다.

권력과 부는 무가치하게 여긴다. 가진 재산은 충격적일 만큼 적다. 원한다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그런 데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원하는 건 오직 하나. 몬스터와 범죄자를 이 나라에서 남김없이 박멸하는 것. 그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서 가장 인간적인 영웅이라 불리는 그는, 또한 가장 정의로운 영웅이라 칭송받는다.

……모두 가면이다.

놈이 배신자인 건 홀로그램으로 일찌감치 파악했다.

왜 배신했는지 정황은 알 수 없었다. 목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냈다.

윤의성의 행보, 그 기저에 깔린 원칙이 무엇인지.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곡예사’ 윤의성이 지닌 사상

-답변: 마력 원리주의

+

그때 추측했다. 향후 명확한 동기를 파악해야겠지만, 놈이 배신한 이유도 이것과 관련 있으리라고.

마력을 신기한 친구쯤으로 여기던 쾌활한 청년은 없다. 심정웅이 타락했듯 윤의성도 타락했다. 아니, 그보다도 심각하겠지.

심정웅이 타락한 건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 그러나 윤의성의 타락을 대변하는 건 개인적인 욕망이 아닌 신념이다.

놈이 살아온 궤적과 사고방식이 신념을 구체화했다. 그렇게 자아낸 신념이 다시 삶과 의식을 지배했다. 그러니 망설이지 않겠지.

심정웅과 다르다. 윤의성은 추호도 의심치 않을 테니까.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마력만이 인간과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갈 힘이라고.

한태강에게 세세히 알리기엔 시간이 촉박해 나는 간략하게만 일렀다.

“좋은 뜻에서 대균열을 일으킨 건 아니었을 거예요. 상세한 계획은 다음 주에 만나 뵙고 상의드릴게요.”

끝으로 인사한 나는 공간을 뛰어넘었다. 스아아아-! 빛무리가 시야를 가렸고, 이어서 펼쳐진 광경.

우리 집이다. 너무 많은 사건을 겪고 마침내 돌아온 곳.

“실례하겠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해빈이 낸 인사. 서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안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직 우리끼리 해야 할 얘기가 남았으니까.

머릿속을 가다듬을 겸 내 쪽에서 먼저 제안했다.

“씻고 오죠.”

마법으로 피와 먼지를 지우긴 했어도 물로 샤워하는 것만 못하다. 나는 내 방 욕실 쓰고, 서연희는 세아 방 빌리고, 유해빈은…….

“해빈이 넌 바로 보이는 저기서 씻으면 되겠고.”

“해빈이 입을 옷은 내가 주면 돼. ……있다가 봐.”

조금 빠른 어조로 이른 서연희가 세아 방으로 향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하던 유해빈은 어느새 욕실 앞에 가지런히 놓인 옷을 챙겨 발을 디딘다. 그리고 십오 분 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 마침 유해빈도 다 씻고 나왔다.

“빨리 나왔네.”

“대충 씻은 건 아니에요.”

슬며시 얼굴을 붉힌 유해빈이 답한다. 딱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딱 봐도 그래 보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뭐 하나 마실래? 콜라 있는데.”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은 우리는 콜라 캔을 열었다. 치익- 하는 소리. 꼴깍꼴깍 마시는 소리. 어색한 느낌이다.

얘도 얘 나름대로 무슨 대화를 할지 고민일 거고, 나도 민망했다. 오늘 보인 모습이…… 좀 너무 어른스럽지 못해서.

결국 내가 꺼낸 말은 격려와 감사였다.

“수고했고, 도와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할 일 무사히 마쳤어.”

단순히 듣기 좋게 한 말은 아니다. 분명 여러모로 도움을 줬으니까. 한데 정작 본인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는지 침울하게 답한다.

“저 뭐 한 거도 없는데.”

“한 게 없기는. 맨 처음부터 네가 찰떡같이 알아들어서 성공한 건데.”

심가에 납치당한 내가 전화했을 때 이 애가 침착히 대응해주지 않았다면 일이 꼬였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응한 거다. 아무래도 빈말로 듣는 것 같지만.

“그것도 못 하면 진짜 용가리잖아요.”

“용가리?”

뭔가 했더니 생각도 못 한 의미였다. 용용이 빡대가리. 나도 모르게 나온 웃음에 유해빈이 추궁하듯 묻는다.

“왜 웃으세요?”

“아, 웃겨서 웃은 거 아니야. 내가 그래도 너 선생님인데 험한 말은 쓰면 안 된다고 말해줘야 하나?”

“사실인데 험한 말이고 뭐고 그런 게 어딨어요.”

다시금 침묵. 하지만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유해빈도 나도 서로 무사히 돌아온 걸 다행이라 생각하니까.

그러길 십 초쯤 지났을까.

조용히 있던 애가 문득 묻는다.

“교수님, 죄책감 같은 거 가지세요?”

“어떤 면에서?”

“심이수요.”

공기가 내려앉는 감각.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아예 그런 생각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네.”

죽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최후의 순간 거짓을 말한 게 그나마 옳은 방법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미안해.

심이수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었든.

그냥 내가 미안한 거다.

숨기는 것 없이 말하니 유해빈이 눈을 찡그린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는 거 같은데, 근데 왜 미안해하시는지 이해는 되고, 심이수 어머니랑 여우 선배 어머니랑 교수님 부모님이랑…… 아, 저 막 그렇게 머리 안 나쁜데 왜 말이 잘 안 나오지.”

“고맙다.”

“왜요?”

“고마우니까.”

말로 설명은 못 해도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어서.

어머니를 살려주겠다고 심이수를 속였다.

설령 올리비아 윈이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죽은 그녀를 되살릴 수 없다. 내 부모님은 살리려고 발악하면서.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들. 얘기할 수 없는 것들.

그걸 다 알면 유해빈의 위로도 달라질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은 얘가 나를 얼마나 위해주려는지 알겠고, 그게 고마웠다.

그다음으로 들은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고마웠고.

“이거 절대로 교수님 부담드리려는 거나 그런 거 아니고요, 아, 말 안 하는 게 나은 거 같은데…….”

“뭔데, 말해봐.”

“근거도 없고, 부담드리려는 거는 아닌데…….”

그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유해빈이 꿈에서 본 이야기를 털어놓듯 일렀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심이수 부탁 들어주라는 게 아니라, 교수님이 지금보다 훨씬 대단해지셔서, 심이수랑 심이수 어머니 만나게 해주고, 여우 선배 어머니도 살리고, 그리고…… 교수님도 부모님이랑 다시 만나고, 그런 거요. 무조건 그러셔야 한다는 게 아니고…… 뭔가, 우리 도진쿤 나중에는 그런 거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생각이요.”

뜻밖의 말. 내가 답하지 않자 유해빈이 흠칫한다.

얼굴빛이 사색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느낌. 서둘러 수습하듯 말을 주워섬긴다.

“아…… 그으, 부담드리려는 거 아니고 불가능한 거 아는데…… 아…… 괜히 이상한 거 말했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헛소리했어요. 그,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 말해놓고 어떻게 못 들은 거로 해.”

“그렇죠……?”

유해빈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실언했다고 여기는 건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몸짓. 나는 웃으며 그 애에게 말했다.

“나 화 안 났는데 뭘 혼자 물어보고 혼자 미안해하고 그러냐.”

그러자 유해빈이 조심스레 나를 본다. 잔뜩 풀이 죽어 안쓰러운 눈빛이다.

“진짜요? 뭔가 어쭙잖게 위로해보려다가 거하게 망한 거 같은데…… 교수님 진짜 화 안 나셨어요?”

“화가 왜 나. 기대해주는데 고맙지.”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심이수도, 심이수의 어머니도, 올리비아 윈도, 내 부모님도, 내 힘으로는 살리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내가 그걸 해낼 수 있다고 믿어주는 유해빈이, 나도 근거는 없지만, 그냥 희망처럼 느껴져서.

“네 말대로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건데, 안 된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낫잖아. 부담감은 안 가지더라도.”

“교수님.”

“왜?”

“저 방금 교수님 진짜 도량 넓으시고, 엄청 어른스러우시다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안 그랬냐?”

“원래도 당연히 그랬죠…….”

곤란해하는 답. 부드럽고 잔잔해 기분 좋은 침묵.

그리고 말없이 정면을 보던 유해빈이, 시선은 그대로 두고서 불쑥 이른다.

“유엘 비안느예요.”

“응?”

“평소에는 다들 유엘이라고 불렀어요. 정확히 발음하면 이름 중간에 h 비슷한 발음 들어가서 유 ㅎ-엘 비안느인데, 그러면 비안느의 딸 유엘이라는 뜻이에요. 비안느는 할머니 가문이고, 저희는 모계 사회거든요. 생각해 보니까 교수님한테 말씀 안 드려서요.”

유엘 비안느. 유해빈이 아니라, 이 애의 진짜 이름.

그 말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대균열을 넘어 이 세상에 왔을 때 어떻게 이름을 지은 건지.

“그래서 유해빈이야?”

“네, 이름 뭐로 정할까 하다가 빨리 발음하면 유해빈 되길래요.”

간단하면서 은근히 잘 지었다 싶네.

한데 무슨 이유인지 유해빈이 자조처럼 말한다.

“솔직히 별로 필요도 없는 정보에 타이밍도 진짜 어정쩡해서 아무 임팩트 없는 거 알아요. 벌써 살짝 후회되고요.”

“그런 생각 안 했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교수님한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말할 수 있을 때, 말하고 싶을 때요.”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일에 이 애는 무슨 의미를 담았을까. 어떤 마음일까.

잘못을 고백하듯, 그러면서도 다짐하듯 말이 이어졌다.

“저는 보스처럼 세지도 않고 여우 선배처럼 똑똑하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그냥 저라는 용이 교수님 응원하고 있다는 거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요.”

많이 기쁜 말.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나는 곧 해줄 수 있는 말을 떠올렸다. 홀로그램이니 퀘스트니 그런 건 말 못 하지만…….

“내레이터.”

“네?”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비밀로 해주면 좋겠네.”

유해빈이 고개를 갸웃한다. 얘가 듣기에는 수수께끼 같으려나.

“내레이터, 내레이터……?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어디다 쓰는 암호 같은 거예요?”

“글쎄? 비슷한 걸 수도 있고.”

애가 되게 궁금해하고 묻고 싶어 하지만 그 이상 말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던 그즈음.

“다 씻었어요?”

서연희가 세아 방에서 나왔다.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이 무겁고 고요하다. 남은 콜라를 들이켠 유해빈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그으, 저 잠깐 아플 거 같아서 쉬었다 나오려고요.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세요.”

그러고선 잽싸게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는 나와 서연희만 남은 상황. 내 옆에 앉은 그녀가 사과한다.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해.”

“…….”

심가에서 평정을 잃었을 때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이 년 가까이 내게 말하지 않은 것도, 마음은 알겠지만 화가 나는 게 사실이다.

참는 건 간단하다.

나를 위했던 걸 안다고.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 괜찮다고. 그러니 화내지 않을 거고, 이해하고 고맙다고. 어제까지였다면 그렇게 말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장, 쉽게는 용서가 안 될 것 같아요.”

“응, 그렇겠지…….”

낮게 가라앉은 말. 슬픔을 내보이지 않으려 해도 서연희가 슬퍼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이유를 말했다. 어째서 당장, 쉽게는 용서가 안 되는지.

“그러면 안 되거든요.”

“무슨 뜻이야?”

놀라는 기색. 미약한 기대도 숨기지 못한다.

방금 말로도 이미 대부분 전해졌겠지. 워낙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그래도 확실히 하고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냥 넘어가는 게 오히려 잘못인 거 알아서요.”

세라가 말했다. 도와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고.

주기만 해서도 안 되고 받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근데 누나가 다 저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넘어가 버리면…… 그건 제대로 직시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지금껏 서연희를 진정으로 대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날 도와주고,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

고맙게 여기고, 나도 힘내서 보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라에게 듣고 깨달았다.

너무 내 중심으로 생각했다고. 나를 돕는 서연희 본인이 원하는 걸 간과했다고.

자기 의지로 힘껏 나를 도와주는 그녀를 그저 초인으로만 여긴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게 아닌데.

서연희도 실수하고, 화내고, 어떨 땐 감정에 치우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요약하면, 제가 화 안 내는 게 진짜 실례라서요. 그래서 안 그러기로 했어요. 제 생각엔 이게 더 건강한 사고방식 같은데…… 누나가 보기에는 어때요?”

서연희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한다. 젖은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녀가 장난스러운 핀잔처럼 물었다.

“그런 말 하면서 화내니까 화난 것처럼 안 보이는데.”

“화는 났어요.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지? 프라이버시는 무슨 프라이버시야. 제 프라이버시는 어딨는데요.”

“미안해…….”

내 팔에 와 닿은 손길. 매달리듯이 양팔로 안는다. 이걸로 화가 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세게 말하지도 못하겠다.

화나는 건 화나는 건데, 이 사람한테 언성 못 높이는 마음은 또 별개라서. 그리고 하나 더 하고 싶은 말을 일렀다.

“혹시 마음에 담아둘까 봐 말하는 건데, 아니면 흘려들어요.”

“뭔데?”

“세라가 한 말이요.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해요.”

세라 말이 상당 부분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가령 내 잘못이 없다고 단언한 것.

거기에 사적인 관점, 친구이자 약혼자인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곤 말 못 하겠지.

세라가 말한 것만큼 잘 해내진 못했다. 앞으로는 더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수긍한 건 그게 타당하다고 판단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말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궤변이라 여길 수도 있는 세라의 변호를, 나는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연희에 대해 세라가 한 말. 그것도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해.

“누나가 저를 망친 게 아니에요. 알고 있으라고요.”

“……난 세라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직이 답한 서연희가 뇌까리듯 말을 이었다.

“너한테 부담을 준 걸지도 몰라. 도와준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쉴 곳도 없는 데로 몰아넣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

서연희의 팔에서 전해져오는 힘이 강해졌다. 내 팔을 꼭 붙잡고, 미안해하고, 지나온 날을 후회하고 반성한다. 나는 웃음기를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예요, 왜 세라 말을 더 믿는데? 당사자인 제가 하는 말을 믿어야죠.”

“그냥…… 너한테 미안해서.”

이 말까지는 할까 말까 했는데. 하지만 지금 보니 말해줘야겠다.

나는 확고하게 일렀다.

“분명히 말할게요. 그때 십 년 전에 장례식장, 기억나죠?”

“응.”

“그때 누나한테 도와달라고 했던 게 지난 십 년 동안 제가 한 행동 중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확하게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첫 번째는 서연희에게 도움을 청한 일.

두 번째는 세아와 화해한 일.

세 번째는 오늘 세라의 말에 응한 일.

하지만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라고 하는 건 이 상황에서 멋이 없으니까.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다.

한데 그걸 또 안 건지 서연희가 확인처럼 묻는다.

“두 개 더 있을 거 같은데…… 아니야?”

“순위는 못 정해요.”

내 대답으로 침묵.

나와 맞닿은 팔을 풀어낸 서연희가 내게서 조금 떨어져 앉는다. 실망한 느낌은 아닌데. 뭔가를 참는 듯한 표정.

이내 답을 알 수 있었다.

“상도덕이라는 게 있잖아. 가까이 있으면 이것저것 하고 싶어지는데,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오늘만.”

그리곤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내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기습적으로 문을 열었고, 방 안에서 와악-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듯하던 유해빈이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방에서 나온다.

“아…… 그으, 뭐냐, 두 분 얘기는 잘 끝나셨어요?”

“음, 해빈이 네가 들은 것만큼만?”

“네가 들은 그대로.”

“으흠, 흠, 저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잔 식으로 유해빈이 시치미를 뗐고, 그때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난 게 있어 나는 서연희에게 일렀다.

“맞다, 누나.”

“왜?”

“이거 될 수 있으면 오늘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요.”

검지로 심장을 가리키며 한 말. 샤워하면서 보니 붉은 달 모양의 문양이 제법 많이 기울어 있었다.

대략 3할 가까이.

이번 일로 다시 랭크가 B까지 상승한 검은 심장을 억제해둬야 하고, 만월이라 서연희의 힘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 봉인해두는 게 옳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 전에 말씀하셨던 거, 마신의 파편인가 하는 그거요?”

여기 유해빈이 있다는 것.

서연희도 언뜻 곤란해하며 묻는다.

“지금 하려고?”

“시기는 지금이 맞죠.”

빨리 처리해야 하고, 봉인 술식을 구현해주는 서연희의 힘이 가장 강할 때니까.

그리고 내 예상대로, 걱정한 대로, 유해빈이 눈을 빛내며 부탁해왔다.

“그거 봉인하신다는 거, 저도 관계자니까, 음…… 저 참관해도 돼요? 믿음직한 부하 직원으로서요.”

“…….”

“어떻게 할래?”

나는 침묵했고 서연희는 내 의견을 묻는다. 그야 이거 봉인하려면 옷을 홀딱 다 벗고 있어야 하니까.

쟤한테 보여주기에는…… 좀 많이 그렇지.

일단 쟤는 벗고 시술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그걸 알려주는 것도 민망하고, 총체적으로 혼란스럽다. 우선 준비할 것부터 해놓고 생각해야겠어.

+

[미수령 보상]

1) OX 질문 1회

2) 주관식 질문 1회

3) 생명력과 마력 포인트 150p

4) 신체 포인트 3p

5) 소질 포인트 0.2p

+

남은 보상 중에서 3번부터 5번까지를 수령했다.

마력과 생명력을 절반씩.

체력과 내구에 각각 2포인트와 1포인트.

소질 포인트는 의지에 0.2를 모두 투자했다.

+

[신체]

근력 85 / 민첩 87 / 체력 83 / 내구 84

[소질]

지능 8.7 / 매력 8.5 / 의지 8.8 / 감각 9.0

+

홀로그램의 보상으로 올린 수치.

그간 조금은 성장했는지 포인트 외에 자연적으로 상승한 수치.

내가 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검은 심장을 좀 더 효과적으로 봉인할 수 있도록.

여기까진 좋아. 꽤 순조롭다.

그런데…….

“혹시 있잖아요…… 교수님이랑 보스…… 저 따돌리시려는 거는…… 아니죠?”

“뭘 따돌려. 그런 거 아니다.”

“거짓말. 제가 무능력하고 활약도 못 하고, 그래서 참관 못 하게 하고, 이번에도 애 취급하시는 거잖아요. 저도 그 정도는 안단 말이에요.”

입이 부루퉁하게 토라진 유해빈이 실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거 반쯤은 연기인 거 같은데.

봉인이 뭔지 궁금해서, 그거 보고 싶어서 일부러 더 실망한 척하는 거 같다.

근데…… 그래도 순전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애가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자괴감이 드는 것 같고, 달래주고는 싶은데…….

바로 그때.

스아아아아-

붉은빛이 아름답게 일었다. 서연희의 주위로.

“어…… 어어억-!”

유해빈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한다. 경악해 떨리는 손가락은 서연희를 가리키고 있다.

일레이아나 라큘리.

본래 외견으로 돌아온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아, 해빈이 미안해? 이게 나 원래 모습이거든.”

“뭐가, 왜 미안하신데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

유해빈은 이 모습을 본 게 처음이고, 여태 숨겨서 미안하다는 뜻이겠지.

서연희가 내게 말한다.

“바로 시작하자.”

나는 눈짓으로 물었다.

<해빈이 보는 데서요?>

<응, 옷은 입고.>

<그러면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최대한 잘 봉인해두고 싶은데, 옷 입은 상태에선 그게 안 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서연희가 눈을 찡긋한다.

<오늘 보름달이고, 좀 더 신경 쓰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요?>

서연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한다.

<아마 옷 입은 상태에서 하는 게 최대 효율일 것 같아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어진 답에 나도 민망해졌다.

<물론 이거 일로 하는 거긴 한데…… 오늘 너 옷 안 입고 있으면, 음, 나 집중이 잘 안 될 것 같아서.>

“……방에 누워 있을게요.”

성큼성큼 방에 들어간 나는 침대에 누웠다. 함께 따라 들어오며 서연희와 유해빈이 대화를 나눈다.

“근데 보스.”

“응, 왜?”

“그게 본래 모습이시면, 어, 제가 보기에는 교수님보다 저랑 연령대가 더 가까운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그 물음에는 내가 답했다.

“지금은 서연희라는 신분으로 활동하는 거야. 그렇게만 알아둬.”

서연희가 장난처럼 부연한다.

“나 사십 대 아니거든.”

그야 충격이긴 할 텐데. 한데 어째 내 생각보다 유해빈은 훨씬 더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러니까…… 사십 대 아니시면…… 아예 자릿수가 다르면…… 그건 또 딱히, 음…… 으음…….”

뭘 저렇게 골똘히 중얼거리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검은 심장의 봉인을 보강하는 술식이 이어졌다.

스으으으…….

붉은빛을 머금은 서연희의 오른손이 내 심장 부근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내 몸 전체를 부드럽게 쓸어올린다. 배꼽보다 더 아래부터, 천천히 타고 올라가 오른손과 겹쳤다.

두근- 하는 감각.

검은빛의 스파크가 저항하다가…… 희미하게 사그라든다.

+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랭크 B -> 랭크 D)

+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파르투스를 제물로 삼아 놈을 막았을 때의 랭크.

서연희가 내게 묻는다.

“어때?”

“생각한 만큼은 됐어요.”

맨 처음 봉인 술식을 받았을 때처럼 완벽하게 억제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만약 이다음에 또 랭크가 오른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억제하기 힘들어지겠지.

“잠깐 실례할게.”

그렇게 말하곤 손을 뻗은 서연희가 내 상의를 살짝 젖혔다. 가슴께에 자리한 문양. 완벽한 원을 그리고 있지 않고,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지워져 있다.

“이 이상은 어렵겠는데…….”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응, 문제 있으면 바로 말해주고.”

젖혔던 상의를 본래대로 돌린 서연희가 내 가슴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그걸로 술식 보강은 끝났고, 거기까지 한마디도 없이 참관하던 유해빈이 낮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요, 교수님이랑 보스…….”

“해빈이 왜?”

“왜.”

“제가 가만히 보니까요, 왜 저한테 안 보여주려고 하신 건지 알 것도 같은데…….”

서연희는 피식 웃기만 하고, 충격에 찬 유해빈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거, 그 술식이요. 원래는 그으…… 그러니까-”

“옷 안 입는 게 효율 더 좋은 거 맞아.”

“앗…… 아아…….”

유해빈이 나와 서연희를 번갈아 본다.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다. 둘이 잘 논다고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얼굴을 붉히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제가 뭣도 모르고 훔쳐보려고 해서,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다른 때도 아니고 일인데 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러냐.

-라고는,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서연희를 보니 양심적으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서연희와 유해빈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맞이한 새벽.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살폈다.

심가의 일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킬 더 이블> 3권의 진행률도 그대로였고, 세아에게 연락해보니 한창 오후 훈련에 매진하는 중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에 스민 피로를 씻으려 나는 눈을 감았고, 일어나 보니 아침을 넘겨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리고 바뀌었다.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진행 중입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98.4%

+

팔십 퍼센트 초반대였던 진행률이, 끝에 다다라 있다.

***

런던 현지 시각으로 8월 22일 자정.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상공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온다.

아름답게 뜬 보름달. 하늘 저편에서 쏟아져 오는 달빛을 받으며 토끼 가면은 왼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에 쥐어진 구체.

크기는 크지 않다. 토끼 가면의 작은 손으로도 감싸 쥘 수 있을 정도.

영롱하게 붉은빛을 내는 구체 내부는 마치 하나의 세상인 것처럼 조화로웠다.

땅이 있고, 하늘이 있다. 그사이에 세상이 있다.

그리고 가장 밝게 빛나는 것. 새빨간 달.

구체 내부를 밝히고, 바깥까지 아득한 빛을 내는 달이 하늘을 따라 흐른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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