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Chapter 42. 용서 (4)
토끼 가면은 잠시 구체를 바라봤다. 고요한 눈동자에 몇 가지 감정이 깃든다. 미움, 원망, 증오, 그리움.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다!”
“놓치지 마라! 영웅분들께 알려!”
은신해 있는 그녀를 발견한 헌터들이 외친 말. 토끼 가면은 단숨에 하늘로 치솟았다.
‘어디지?’
우우웅- 손에 든 보석이 빛난다. 가리킨 방향은 북쪽. 그녀가 날랜 몸짓으로 내달리자 헌터들이 마탄을 퍼붓는다.
콰아앙! 런던의 정예 각성자들이 힘을 모은, S급에 상당하는 마법. 피하지 않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스아아악! 다섯 손가락이 자아낸 마력이 공격을 갈랐다. 하늘에 불꽃놀이 같은 폭풍우가 일었고, 적들의 시야가 흐려진 틈을 타 그녀는 허공을 박찼다.
‘최대한 빨리.’
이미 발각됐으니 몰래 접근하긴 어렵다. 이 도시 전역에 펼쳐진 추적 마법을 쉽게 떨칠 순 없으니까.
시전자가 누구인지 알기에 내린 판단. 다행히 맞서기 싫은 이들은 아직 멀리 있으니 방해하기 전에 목적을 달성해야겠지.
우우우웅- 보석의 빛이 거세진다. 정면으로 뻗는다. 그리고 빛이 멈춘 곳,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륵, 캬르륵……. 꺼흐으!
기이한 생김새다. 썩은 흙으로 빚어낸 듯한 괴물.
토끼 가면은 저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없어야 할 것들.’
인간이 아니다. 몬스터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순리를 벗어난 현상의 잔해가 마력으로 실체화한 존재.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것들. 반드시 소멸시켜야 한다.
타앙! 파아아! 쏟아지는 헌터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괴물들을 바스러뜨리며, 토끼 가면은 문득 그런 의문을 되뇌었다.
왜 이런 게 생겨난 걸까.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
지금 당장이라도 산산이 부수고 싶은, 품속에 넣어둔 붉은 보석 때문일까.
이걸 그녀에게 건네준, 네가 가지고 있어 달라고 애원했던 그 사람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실은 그녀 자신 때문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싸운 토끼 가면이 괴물들을 먼지로 흩어낸 직후.
띠링- 슈아아아악!
하나는 익숙한 소리. 다른 하나는 빠르게 들이닥친 마법이 그녀를 지상으로 끌어당긴 소리. 찰나가 지나고, 이제 토끼 가면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다.
“안녕? 벌써 세 번째네?”
등 뒤로 열 개의 마력 검을 일렁이고, 어마어마한 투기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여성. ‘소드 퀸’ 샬럿 테이트.
“로티 말로는 여기서 꽤 말썽을 피우고 다닌다던데. 혹시 투항할 생각 없나? 아주 약간은 선처해줄 수 있거든.”
친절히 권유하면서도 초고도의 결계를 덧대어 쌓아나가는 남성. ‘몽상가’ 아르노 뒤레.
인사에도, 항복 요구에도, 토끼 가면은 무엇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들을 응시하기만 했다.
‘영웅이 두 명.’
이곳에 36 영웅이 둘씩이나 모였다. 그녀를 잡아들이기 위해.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은 이들이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토끼 가면은 무의미한 대답 대신 양손을 떨쳤다.
촤아악!
열 손가락의 마력이 폭포처럼 물결친다. 샬럿 테이트가 구현한 빛의 검에 밀리지 않는 출력. 아르노 뒤레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한다.
“이야, 과장한 줄 알았는데 정말이잖아?”
“아르노, 제발 말 같은 소리를 해.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이나 하겠어?”
어이가 없다는 듯 핀잔을 준 샬럿 테이트가 간결하게 평했다.
“방심하지 마. 명백히 ‘우리’와 같은 수준이야.”
“로티, 제발 말 같은 소리를 해. 내가 이런 일에서 방심이나 하겠어?”
방금 들은 핀잔을 그대로 되받아친 말. 두 사람이 피식 웃는다.
방심은 하지 않되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마왕 파르투스와 단신으로 대적한다는 위업을 이루어 명실공히 최강의 헌터로 자리매김해가는 샬럿 테이트.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철저히 준비하고 전투에 나서는 아르노 뒤레.
저들의 협공에 우세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고, 그게 가능한 극소수 강자들과 싸워본 토끼 가면은 알고 있다.
‘내가 질 거야.’
그녀는 자기 실력을 과신치 않는다. 여태 살아남은 건 결코 자신이 그들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았기에.
누군가 희생해줬기에.
오늘은 운이 좋을 요소도 없고, 그녀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도 없다. 소드 퀸과 몽상가를 쓰러뜨리는 일은 요원하겠지. 하지만…….
쿠아아아아아앙-!
환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토끼 가면은 자신이 가진 전력을 끌어냈다.
“와우…….”
경계처럼 감탄을 낸 아르노 뒤레가 준비해둔 마법을 운용한다.
감속, 물리 행동 방해, 인지력 저하, 구성체 간섭, 국소적인 중력 제어 등 적에게 작용하는 십여 종의 약화 효과.
아군에는 정반대다. 현존하는 가장 좋은 마법 장비만 골라서 전신을 감싸도 그가 구현한 강화 효과에는 미치지 못한다.
“내가 좀 잘못 봤나?”
콰아아아아아!
낮은 목소리로 이른 샬럿 테이트의 앞에 불그스름한 빛무리가 모여든다. 마력 자가면역반응 구성체의 최대 활성화.
그녀는 오늘도 어제보다 강해지고 있으며, 해서 이 면역체에 담긴 힘은 과거 파르투스의 본질에 타격을 입혔을 때보다 유의미하게 강했다.
“두 번까지 버텨줄 수 있어. 마음껏 휘두르라고.”
“일격에 끝낼 거야.”
짧게 대화를 나눈 두 영웅이 마침내 공격해온다.
파아아아아!
몽상가의 마법이 이곳을 지배한다.
슈아아아아악!
소드 퀸의 검격이 빛살처럼 다가온다.
빛무리를 맞이한 토끼 가면은 그들을 노려봤다. 물론 핑계일 뿐이다. 정말로 미운 건 무력한 자신이다. 누구를 탓할 자격이 그녀에게는 없다.
스아아아아!
토끼 가면은 열 손가락의 마력을 하나로 모았다.
그 힘이, 샬럿 테이트의 면역체와 아르노 뒤레의 마법을 심부에서부터 해체한다.
“저건…….”
샬럿 테이트가 경악해 중얼거렸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어떻게 단번에 간파할 수 있을까. 이 짧은 동안에 영웅들의 진신 절기를 파악해 근본적으로 상쇄한다고?
“불가능해.”
아르노 뒤레가 단출하게 일렀다.
차라리 힘으로 맞섰다면 모르겠지만 저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생포해야겠는데.”
“그렇게 될 거야.”
샬럿 테이트가 확언했다.
믿기 힘든 대응을 보이고 있으나 적은 곧 쓰러질 거다. 절대적인 힘의 총량이 부족하니까.
아르노 뒤레가 불가능이라 단언할 정도로 최적의 방어를 해내고 있다 해도, 그걸 끝까지 수행할 힘은 없다.
당연히 토끼 가면 본인도 아는 일. 그녀는 이어질 상황을 예감했다. 힘에 부쳐서 밀리고, 싸울 기력도 없을 거다.
자연스레 그다음이 떠오른다.
‘여기서 져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다 망쳐버리는 걸까.
‘이제 못 보는 거야?’
그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걸까. 앞으로는 지켜줄 수 없는 걸까. 처음 만나서 빌었던 소원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패배를 직감하면서, 토끼 가면은 아프게 되뇌었다.
‘싫어.’
스아아아아-
품속의 보석,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 붉게 빛났다.
***
콰아아앙!
아르노 뒤레의 결계가 깨졌다.
샬럿 테이트의 면역체가 절반 이상 튕겨 나갔다.
쿠오오오오오!
아득한 빛과 폭음이 용솟음치고 난 뒤. 시야 어디에서도 토끼 가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드 퀸과 몽상가가 고작 테러리스트 한 명을 놓치고 만 거다.
“쫓아갈게.”
“늦었어.”
급히 땅을 박차려 하는 샬럿 테이트에게 아르노 뒤레가 일렀다.
탐지 마법에 잡히지 않는다. 생명이 위중한 상처를 입었겠지만, 인제 와서 다시 추적하진 못하겠지.
“이봐, 로티.”
“왜?”
“내가 믿기지 않아서 묻는 건데, 토끼 저 친구가 팬텀에서 제일 강하진 않은 거지?”
“그럴 거야.”
보스와 이인자는 확실하다. 토끼 가면보다 그 둘이 더 강하겠지. 아르노 뒤레가 황당해하는 어투로 재차 묻는다.
“가능한 일인가?”
“내가 거기 멤버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잠깐 연락 좀 할게.”
샬럿 테이트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신신당부해뒀으니 집에 있긴 하겠지만…….
뚜우- 뚜우-
살짝 근심하는 표정을 본 아르노 뒤레가 묻는다.
“안 받아?”
“응, 마법으로 봐야겠네.”
집과 연동된 마법을 활성화한 샬럿 테이트는 내부를 확인했다. 이세아와 진유리.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말썽꾸러기인 두 제자가 얌전히 있는지. 그리고…….
“유리! 세아!”
급기야 통신 마법까지 켠 그녀가 세차게 외쳤다.
전화를 안 받는다. 집에 없다. 통신 마법에도 답하지 않는다.
쿠아아앙!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샬럿 테이트가 굉음을 일으키며 달렸다.
***
한편 그 시각.
샬럿 테이트의 집에서 일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진유리와 이세아는,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처음부터 스승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건 아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심상치 않은 장면을 목격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교외를 떠다녔고, 두 사람은 그것들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지난번 토끼 가면을 봤을 때. 당시 그녀가 물리쳐가던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쫓아갔고, 싸움이 벌어졌다.
격전 와중에 진유리의 트리거는 한층 성장했고, 이세아는 파르투스와 싸울 때처럼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해 괴물들을 베었다.
그러나 중과부적.
마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남은 괴물은 일곱 마리. 다 쓰러뜨리진 못할 수도 있다. 이세아와 진유리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 먼저 가.”
“내가 막고 있을게.”
의도치 않게 동시에 꺼낸 말. 두 사람은 못마땅한 눈길로 서로를 쏘아봤다.
“내가 힘 더 남았어.”
“나 멀쩡하니까 빨리 가.”
이번에도 동시에 말이 나왔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각오를 깨달았다. 단어를 아주 많이 순화하면 이런 표현이 되겠지.
아, 이 용기 있는 친구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구나…… 라고.
그렇다면 쓰러질 때까지 함께 싸우는 게 맞지 않을까. 그야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뚜렷한 이 친구가 자신보다 먼저 쓰러질 테니까.
기절하고 나면 발로 뻥 걷어차 저 멀리 보내버리고, 자신은 헌터들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 거다.
차후 일이 해결되고서 그러게 내가 뭐랬냐고 으스대려면 꼭 버텨내야 한다. 옆에 있는 얘를 지켜야 한다.
“…….”
“…….”
괴물들이 포위망을 좁히는 가운데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은 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웃음이 나오고, 힘이 솟는다.
슈우우우-
희미하게 잦아 들어가던 진유리의 면역체가 빛을 낸다. 이세아의 감각이 더없이 예리해진다.
그리고…….
괴물들과 맞서려던 그때.
스아아아악!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마력의 실이 그것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화아악!
흙처럼 형태가 뭉개진 놈들을 마력으로 불태워버린 여성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지상에 내려왔다.
피에 젖은 은빛 머리칼.
본래도 새빨갰으나 지금은 실핏줄이 다 터져 섬뜩한 눈동자.
반쯤 금이 간 토끼 가면.
그녀가 이세아와 진유리 쪽으로 걸어온다. 이내 대응할 수 없는 속도로 뛴다.
콰앙!
토끼 가면의 어깨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세아가 나가떨어진다. 많이 지친 영향도 있겠으나 적도 부상이 극심하다. 순수한 전력 차부터 절망적이다.
“아…….”
이세아가 가늘게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려 한다. 토끼 가면이 한 걸음씩 다가갔고, 진유리는 온 힘을 다해서 그녀를 공격했다.
“으아아압!”
친구의 위기에 또 한 번 한계를 넘어선 면역체. 토끼 가면이 강하다곤 하나 쉽게 받아치진 못할 거라고, 진유리는 그리 생각했다. 어림도 없는 오산이었다.
스으으으…….
혼신의 힘을 다한 면역체가 힘없이 꺼졌다.
“어……?”
진유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토끼 가면을 바라봤다. 당황을 넘어서 이해가 안 된다.
그녀의 힘. 마력 자가면역반응 구성체는 이런 디스펠이 사실상 통하지 않는데.
이 세상에서 그녀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이세아와 샬럿 테이트라도, 이렇게 아예 없던 것처럼 사그라뜨리지는 못할 텐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토끼 가면이 손을 휘젓는다.
콰아악!
진유리의 몸이 속박당했다. 마력과 신체 양쪽 방면으로 완벽하게 구속됐다. 이세아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는 토끼 가면을 보며 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하지 마아아! 이 미친년아! 하지 말라고-! 세아야! 이세아-!!!”
퍼억!
토끼 가면의 발길질. 피를 토한 이세아가 하늘로 붕 뜬다. 그 모습이 진유리의 눈에 또렷이 각인됐다. 분노, 무력감, 슬픔.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아아아아악!”
스아아아아-
토끼 가면이 걸어둔 속박 마법이 옅게나마 떨린다. 진유리의 주위, 면역체의 빛무리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첫 번째 트리거는 경쟁심.
두 번째 트리거는 연심.
세 번째 트리거는 우정.
지금 하나가 더 아로새겨지려 한다.
저 여자가 밉다. 이세아를 죽인 저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다. 친구의 원수를 갚고 싶다.
그리고…….
진유리의 감정이 폭발하려던 그때.
“쿨럭-! 아…….”
피를 울컥 뱉어낸 이세아가 팔다리를 뻗고 땅에 누웠다.
눈이 감겨 있고 표정을 찡그리고 있지만, 숨소리가 그런대로 고르다. 죽은 게 아니라 단순히 기절.
마력을 실어서 걷어찼다면 즉사했을 텐데. 천만다행히도 그러지 않은 거다.
“아…… 아아…….”
진유리는 살면서 이렇게나 안도한 적이 없었다. 감정이 가라앉음에 따라 면역체의 빛도 잦아든다. 트리거는 여전히 셋.
저벅, 저벅.
토끼 가면이 다가온다. 이세아는 살아 있으나 위기가 끝난 건 아니다. 진유리는 안간힘을 쓰며 속박 마법에서 탈출하려 했고, 하지만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운 거리.
눈이 마주했다.
진유리는 두려움을 힘겹게 외면하며 토끼 가면을 응시했다. 토끼 가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피에 젖은 손을 뻗는다.
저도 모르게 질끈 감은 눈. 진유리의 의식이 꿈결처럼 흐릿해졌다.
슥, 스윽. 이마와 머리칼에 닿은 기분 좋은 감촉.
그걸 명확히 알지는 못하며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토끼 가면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샬럿 테이트. 그녀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유리 괜찮니?”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생님…….”
진유리는 멍하니 대답하며 짐작했다.
‘도망친 건가……?’
그럴 거다. 스승이 이곳으로 오는 걸 알아챈 토끼 가면이 도주한 거겠지.
한데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무언가 세뇌라도 당한 걸까.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느낀다.
잠들기 직전에 본 눈빛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고.
***
“쿨럭, 흐윽.”
어두운 골목에 몸을 기댄 토끼 가면이 연이어 기침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핏덩어리가 울컥 쏟아진다.
“하아, 하아…….”
격통을 견디려 옆으로 웅크려 누운 그녀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냈다.
띠링-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할 일을 마쳤다고 격려라도 하려는 걸까.
토끼 가면은 몹시 지친 눈으로 시야에 보이는 문장들을 읽었다.
‘끝났네.’
런던에서 해야 하는 일이 끝났다. 돌아가면 당분간은 푹 쉴 수 있을까. 아니, 그래야만 한다. 아무도 자신을 말릴 수 없다.
‘말려줄 사람도 없고.’
자조적인 말을 되뇐 토끼 가면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꺼낸 붉은 보석. 아름답고, 짜증 난다.
이번 일이 워낙 험난했던 탓일까. 그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이 보석이 밉다.
이걸 그녀에게 맡긴 사람, 지금은 죽고 없는 그가 원망스럽다.
그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사과만 했다. 걱정만 했다.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도 원망스럽다.
그렇게 사과할 거라면. 걱정할 거라면. 변명 한마디도 못 할 거라면. 그러면…….
“안 그랬으면 됐잖아…….”
눈물이 피와 섞여서 떨어져 내린다. 토끼 가면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품에 보석을 넣으며 결심을 되새겼다.
감당이 안 되는 일을, 그래도 감당해 보려고 애쓰면서 내린 결론.
이해할 수는 없다.
용서할 수도 없다.
그래도…… 그런 거랑은 별개다.
이해가 안 돼도.
용서를 못 해도.
그래도 사랑할 수는 있다.
토끼 가면은 굳건히 걸었다. 손을 휘저어 시야에 비치는 문장들을 지워냈다.
스으으…….
아래에서부터 사라지는 글자. 가장 위에 있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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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3권, ‘팬텀 편 下’를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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