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Chapter 42. 용서 (5)
***
한세라는 꿈을 꿨다.
오래전의 기억이다.
십오 년도 더 이전에, 그녀와 이도진이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 천사처럼 귀여운 동생이 까르르 웃으며 언니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던 시절.
겨울을 맞이해 두 가족은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와 있었다. 어른들은 산책을 다녀온다며 잠시 산장을 나섰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엔 눈이 포근하게 내려앉는 중이었다.
종종, 걷는 소리.
낮 동안 잠을 한참이나 자서 그런지 눈이 말똥말똥한 이세아가 조막만 한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킨다.
“언니! 눈!”
눈빛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양팔로 이세아를 안아준 한세라는 조금은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와아, 눈이네? 세아 눈 보러 갈까?”
“응!”
그때 저쪽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감기 걸려.”
동생이 감기에 걸리는 건 결코 용납을 못 한다는 듯이, 본인도 어린 주제에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도진이 다가온다.
“감기……?”
오빠 말을 따라 한 이세아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언니를 봤다가, 오빠를 봤다가, 이내 급격히 표정이 안 좋아진다.
으에에엥- 이라고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
한세라는 다급히 외쳤다.
“아니야, 오빠만 안 간대. 세아랑 언니랑 둘이 눈 보러 가자?”
“응!”
간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뚝 그친 이세아가 방긋방긋 웃는다. 쪽, 뺨에 뽀뽀해주자 이세아도 똑같이 해준다. 이도진은 여전히 걱정하는 얼굴.
“감기 걸린다니까.”
“따뜻하게 입으면 되지.”
양말을 신겨주고, 겨울옷을 껴입히고, 따뜻한 털모자까지 씌웠다. 한데 장비를 다 착용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이세아가 이도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 눈!”
둘이서 가는 건 싫다는 거다. 이세아에게 점수를 땄다고 은근히 좋아하던 한세라는 아주 살짝 낙담했고, 이제는 차마 안 된다고 못 하겠는지 이도진도 옷을 챙겨 입었다.
왼쪽에는 한세라. 오른쪽에는 이도진. 각자 이세아의 손을 잡고 산장 밖으로 나왔다. 쌓인 눈을 밟으며 이세아가 해맑게 웃었고, 세 명의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제법 커다랗게 만든 도진 눈사람과 세라 눈사람.
그다음으로는 둘 사이에 작게 만든 세아 눈사람. 이세아에게 자그마한 눈덩이를 쥐여준 이도진이 말한다.
“응, 탁, 올리자. 옳지, 우리 세아 너무 잘하네.”
세아 눈사람의 머리를 완성한 이세아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좋아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꺄아!”
퍼걱-
이세아의 손에 밀려 세아 눈사람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어서 체중을 실은 몸통 박치기. 퍼걱, 퍼억. 세라 눈사람과 도진 눈사람도 파괴됐고, 반응이 정반대로 나뉘었다.
“우와아, 세아 엄청 잘하네?”
칭찬한 건 한세라.
“안 돼, 눈사람이 아야 하잖아. 호- 해줘. 호-.”
훈육한 건 이도진.
두 돌도 안 된 아기는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한세라의 응원에 힘입어 땅에 주저앉더니 손을 마구 휘둘러 세아 눈사람을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오빠의 말에 따라 손으로 파편을 톡톡 두드린다.
“호…….”
“아니, 다 때리고 나서 그러면 안 되지…….”
이도진이 한숨처럼 흘린 말. 상황을 유심히 살핀 한세라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겠다고. 해서 같이 땅에 앉아 이세아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우리 세아, 언니가 좋아, 오빠가 좋아?”
사실 온전히 알아듣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면 반응을 보이긴 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품에서 쏙 빠져나온 동생이 오빠에게 달려가 안긴다.
“오빠!”
오늘도 승리를 거둔 이도진이 얄밉게 웃었고, 한세라는 앉은 상태로 손을 움켜쥐었다. 눈이 한 움큼 잡힌다. 그걸 둥글게 뭉쳐낸 손을 뒤로 감추며 이도진에게 다가가서…….
“야압!”
이도진의 정수리로 내리쳤다.
퍼억! 물론 아프진 않게 했으나 머리를 타고 조각 난 눈의 파편이 흐른다. 선전포고임을 모르는 이세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동생을 땅에 내려놓은 이도진이 거리를 벌렸다. 재빨리 쪼그려 앉더니 양손으로 쌓인 눈을 그러모은다. 하지만 다시 퍼억!
“이거 반칙이잖아.”
“그런 게 어딨어?”
이도진이 전열을 가다듬는 사이 이미 새로운 공격을 준비한 한세라가 연이어 눈뭉치를 던졌다. 어느새 몇 미터쯤 걸어간 이세아는 눈 구경에 정신이 없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피유우우웅! 터엉! 마당 곳곳을 쏘다니며 나름대로 은폐와 엄폐, 원거리와 근접 전투를 오가는 눈싸움. 그리고 결전의 순간, 둘 다 한 아름 크기의 눈뭉치를 안고 서로에게 달려갔다.
퍼어어억!
눈뭉치가 부서지며 흩날렸고, 양쪽 다 모든 힘을 소진한 두 사람이 땅에 쓰러졌다. 이도진은 하늘을 보는 자세, 한세라는 그의 위로 포개지듯 쓰러졌다.
눈이 마주했다.
거리가 가깝다.
문득 충동 같은 게 들었다.
한세라는 그 충동을 실행에 옮겼고, 살짝, 촉촉한 감촉이 부드럽게 닿았다. 이도진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야, 방금-”
“응? 왜?”
그녀는 모른 척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이도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든다. 닿은 게 맞는지, 자기가 생각하는 그건지 헷갈리는 걸까.
‘바보.’
절반의 안도와 절반의 불만. 한세라는 시치미를 뚝 떼며 이세아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고, 이도진도 그녀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온 건 그때였다.
“으아아앙! 으아아아앙!”
두 사람은 서둘러 달렸다. 산장 입구 쪽에 서 있는 이세아가 엉엉 운다.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면서. 동생을 품에 안은 이도진이 눈물을 닦아주며 달랬다.
“응, 괜찮아. 왜, 세아 넘어졌어?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그치?”
하지만 이세아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넘어지거나 다친 게 아닌 것 같다. 방금까지도 웃으며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언니 오빠가 안 보여서 무서워한 것도 아닐 텐데. 그리고, 이세아가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토끼…… 토끼…… 으아아아앙!”
“토끼?”
한세라와 이도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안전장치로 결계가 있으니 문 안으로 들어오진 못할 테고, 바깥에 지나다니는 토끼라도 본 걸까. 하지만 멀리 봐도 동물이 보이진 않는다. 한세라는 동생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이제 토끼 갔네. 토끼 안 와, 없어. 오면 언니가 혼내줄게?”
“응…….”
겨우 울음을 그친 이세아가 작게 답했고, 그즈음 산책하러 갔던 어른들이 돌아왔다. 잠깐 소동이 있었으나 그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그때 기억나?”
8월 28일 오전 열한 시.
십 년을 넘게 이어온 약혼 서약의 마력이 흩어지는 걸 바라보며 한세라가 물었다. 그녀와 마주 앉은 이도진이 되묻는다.
“언제?”
“우리 열 살 때였나? 산장에서 눈싸움했을 때.”
“기억나지. 그때 재밌었는데.”
한세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렀다.
“그때가 너랑 나랑 첫 키스였던 것도 기억하고?”
“아…… 그거 닿은 거 맞지?”
십오 년 만에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이도진이 고개를 주억였고, 십오 년이 지나서 이번엔 한세라도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 진짜 바보야? 당연히 닿았고, 당연히 일부러 한 거지.”
“죄송하다는 말씀 말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됐어. 첫 키스였던 거 확실히 알면, 그거로 봐줄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에게 한세라는 상쾌한 표정으로 일렀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어떻게 다시 관계를 쌓아 올릴지, 앞으로는 어떻게 다가갈 건지.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일이고, 굳이 말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으흠.”
둘이 얘기할 게 있으면 하라고 멀찍이 자리를 피해 있던 한태강이 헛기침하며 걸어왔다. 상당히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 여기 오기 직전까지도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굳이 파혼할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이도진에겐 워낙 미안한 게 많아 대놓고 그런 말은 안 할 모양이지만 한세라는 며칠 애를 썼다. 아버지가 듣고 혈압이 오르지 않으실 만큼만 상황을 설명하면서 설득하느라.
당장 약혼 다음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고. 할 일도 많고, 서로 가깝게 지내며 다시금 노력하는 게 옳다고.
그 화제로 서연희와 관련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얘기를 꺼내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게 파혼이 마무리됐고, 세 사람은 향후의 계획을 의논했다.
“아저씨는 저희 멤버로 나서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알겠다.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팬텀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하나 한태강이 테러리스트로 활동할 수는 없다.
세간에 소문이 파다했다. 테러조직 팬텀이 천리안과 그의 손녀를 살해했으며, 거의 동시에 런던에서는 일개 단원이 소드 퀸과 몽상가의 합공을 이겨냈다고.
이 시점에 새로운 멤버가 드러나는 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대단히 특징적인 무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더더욱.
한태강은 양지에서 움직여야 한다. 조용히 때를 노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도진을 도와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가 정오를 가리킬 즈음. 한세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걸 이도진에게 물었다.
“근데 토끼 있잖아. 정말로 그렇게 강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영웅들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을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샬럿 테이트와 아르노 뒤레가 전력을 다했는데도 놓쳤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런던에서 일으킨 사건은 이도진과 서연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니까.
다행히 런던에 가 있던 이세아나 진유리와 직접 싸우진 않았다고 들었지만……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도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한다.
“아마 나랑 싸워도 걔가 이길 거야.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 하는데…….”
“연락 안 받는댔지?”
“응, 완전히 잠수. 자기 당분간 쉬고 싶으니까 건드리지 말라던데. 궁금한 거 있으면 잠수 푼 다음에 말해주겠대.”
“토끼 걔가 조용한데 성격 있잖아.”
한세라가 생각하기에 팬텀이 어쩌고 떠벌리진 않을 것 같지만, 통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 불안 요소긴 했다. 한데 오히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이도진이 그녀를 변호한다.
“그래도 애가 말이 없어서 그렇지 착하지 않나?”
“착해?”
한세라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아무래도 착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못된 건 아닌데, 낯 많이 가리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만 챙기는?’
그런 사람을 한 명 더 알고 있다. 그 애는 귀엽고, 토끼 가면은 별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고. 그렇게 보면 자신도 누굴 탓할 입장은 아니라 한세라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내가 보기에도 나쁜 애 아니긴 해.”
“걔가 잔정이 많거든. 나중에 친해지면 느낄걸?”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라고 한세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슬쩍 떠보듯이 마력으로 귓속말을 전했다.
<걔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아…… 뭐, 그런 거 같더라.>
조금 곤란해하는 대답. 그걸로 알았다. 이성으로는 아예 생각도 안 한다고. 그냥 동생처럼만 여기는 거다.
그즈음 정오가 됐다.
십일 년 전에 약혼을 서약한 시간.
한세라와 이도진은, 한태강은, 말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더는 볼 수 없는 세 사람. 그들에게 사과하고 맹세했다. 복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할 거라고.
다짐을 마친 그들은 산에서 내려갔고, 한태강이 이도진에게 물었다.
“같이 점심 한 끼 먹고 가야지. 세아도 불러서.”
“그게, 오늘 애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요. 다음 주 중에 찾아뵐게요. 죄송합니다.”
하기야 이세아도 심경이 복잡할 거다. 자기 딴에 애를 썼는데, 결국은 파혼하게 됐으니까. 이도진이 왜 일찍 집에 가려는지 한세라는 이해할 수 있었고, 각자 차에 타려던 그때.
“세라야.”
“응?”
이도진이 약간 망설이며 묻는다.
“말해줄 수 있으면 말해주고, 아니면 말 안 해도 돼.”
그리고 질문이 이어졌다.
올해 3월 13일. 서연희와 계약을 맺으면서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한세라는 짧게 답했다.
“노코멘트해도 되지?”
“……그래.”
쓰게 웃으며 이도진이 차에 탔다. 도로에서 길이 갈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당시의 대화를 떠올렸다.
서연희와 맺은 소원 계약.
<뭘 원해?>
그 물음에 한세라는 답했다.
<단 한 번, 도진이의 생명을 구해주고 싶어요.>
언젠가 한 번, 그의 마음을 구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목숨은 어떨까.
이도진이 위험에 처할 때, 자신이 그를 구할 만큼 강할까.
알 수 없는 일이기에 한세라는 그 소원을 빌었다.
딱 한 번, 좋아하는 사람을 구해주고 싶다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진이가 알면 화내려나?’
분명 그러겠지.
사과한다고 용서해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세라는 그러고 싶다.
***
띡, 띠리릭-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세아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미묘하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고.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아가 대뜸 물었다.
“하고 왔어?”
“응.”
“…….”
소파에 누운 채로 몸을 돌려 엎드린 세아가 휴대전화만 만진다. 슬쩍 다가가서 보니까 진유리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며칠 전에 공항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얘네 방학 동안 진짜 엄청 친해진 것 같은데.
최대한 살가운 목소리로 세아에게 물었다.
“밥 안 먹었지? 뭐 먹을까?”
“안 먹을래.”
“그래? 나 배고픈데.”
세아가 몸을 움찔한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점심 안 먹고 왔어?”
“한 시잖아. 너 배고플까 봐 안 먹고 바로 왔지.”
“……그럼 먹을게.”
소파에서 일어난 세아가 자기 방에 들어갔다.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더니 새침한 말투로 먹고 싶은 메뉴를 이른다.
대강 서너 가지는 되고, 그거 다 먹을 수나 있나 싶어서 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이세아 씨, 순서부터 정해주시면 점심이랑 저녁이랑 따로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음…….”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도 저랬으면 좋겠다. 일상적인 고민을 하고, 평범하게 웃고. 세아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때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
<킬 더 이블> 3권, ‘새로운 세대’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3권 태그: [여름방학] [캐릭터 중심] [어반 판타지]
-진행률: 99.9%
-3권의 남은 문장
: 그리고, 이세아는 혼자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