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Chapter 43. 기념일 (2)
9월까지만 해도 조금은 존재감이 남아있었던 여름은 이미 흔적도 없이 물러갔다. 이젠 저녁 무렵엔 서늘하게 느껴지는 날씨. 추모 광장에 도착한 이세아는 이도진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불그스름히 저물어가는 하늘빛 사이로 작은 솜뭉치처럼 구름이 드리웠다. 고요하게 예쁜 정경. 추모 광장은 그보단 활기가 흘렀다.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세아는 오빠에게 말했다.
“……평소보다 사람 좀 더 많네.”
“이날은 원래 그래.”
이도진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10월 12일.
온 나라가 떠들썩한 기념일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이 추모 광장엔 평소보다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 날이다.
‘수호자’ 이시혁의 생일.
‘대마법사’ 정세빈의 생일.
그리고…… 그들의 결혼기념일.
경쟁자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마침내 악마를 물리치고 부부가 된 두 영웅은 우연히도 생일이 같았다.
실제로는 이시혁이 아주 조금 더 일찍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태어난 직후에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에게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살아온 고아였고, 정세빈은 멸문한 마도 명가 출신이니까.
어쨌든 주민등록상의 생일은 같고, 생일을 축하해줄 가족이 한 명도 없다는 것 또한 둘의 공통점이었다.
제일중에 입학하기 전까지 지내던 보육원에서 학대를 견뎌온 이시혁. 마력을 각성하고 탈출하듯 그곳을 빠져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의 삶은 진정으로 막을 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직계 혈족이 모두 사망한 정세빈이었으나 먼 친척들은 살아있었다. 차라리 없는 편이 훨씬 나았을 자들. 마도 명문 정씨 가문이 소유해왔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져간 인면수심의 철면피들.
제1 아카데미에 입학해 실력을 키우며 성장한 정세빈은 성인이 되고 그들이 지은 죄에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 그 시점부터 온전하게 관계를 단절했고, 그러니 그녀 또한 생일을 축하해줄 친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없는 그들이 가족이 됐다. 그리고 가족이 두 사람 더 생겨났다.
이세아 자신과 오빠인 이도진.
가족으로서 이시혁과 정세빈의 생일을 축하하고, 결혼을 축하해줄 수 있는 단 두 사람.
그중에서도 혈연관계인 이도진이, 오빠가 좀 더 자격이 있겠-
‘아니야.’
이세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떠오르려던 생각을 떨쳐냈다. 철없는 자격지심. 오빠가 알면 슬퍼할 거다. 친자식이든 입양된 아이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동생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까.
부모님의 동상 앞에 이른 남매는 잠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그런 다음 이도진이 물었다.
“생신이랑 결혼기념일, 잘 기억 안 나지?”
“……조금 기억나.”
이세아는 절반쯤 거짓말로 답했다.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10월 12일이 어땠는지.
그냥, 안간힘을 쓰며 그러모아 보면 환상처럼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
커다란 케이크, 선물, 웃음소리, 그런 것들.
그게 10월 12일의 기억인지도 모르겠고,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짜내서 무의식적으로 꾸며낸 장면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는 말에 오빠가 무척 기뻐해 주니까, 그거면 거짓말을 한 보람은 충분했다.
“다음 달에 또 같이 오자.”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왔지?”
하늘에 어둠이 깔릴 즈음 추모 광장을 나서며 이세아가 물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연구와 교원 일로 바쁘게 살면서도 달에 한 번씩은 꼭 왔다고.
오빠가 그랬다고 답했고, 이세아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는 나도 같이 올게.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계속.”
스스로는 알고 있다. 순수하게 부모님을 기리고 싶어서만은 아니라고.
고3이 되어도, 어른이 돼도, 오빠가 결혼해 자신 이외에 다른 가족과 살게 돼도, 그래도 이날만큼은 함께 와서 추억을 떠올리면 좋겠다.
이기적인 속마음을 들키면 오빠가 황당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별로 떳떳하지는 않은 생각이라서, 그래서 이세아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그러자.”
그녀보다 더 나직이 답하는 이도진의 대답에, 어렴풋하게나마 망설임이 스며있었다는 걸.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이도진은 자기 방에 들어가 연구에 매진했다. 거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던 이세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웅-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진유리.
-유리: 놀지 말고 빨리 중간고사 공부해 (20:13)
“…….”
다짜고짜 온 메시지에 이세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보지도 않고선 공부를 안 하고 있을 거라고 단정하는 걸까.
그야 실제로도 안 하고 있긴 했지만. 샬럿 테이트에게 배우는 게 훨씬 중요하니 지루한 이론은 손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핑계를 대고 있긴 하지만.
이세아는 약이 올라서 답장을 보냈다.
-이세아: 하고 있었어
-유리: 안 믿어
-유리: 책상 사진 찍어서 보여줘 (20:14)
“…….”
한층 더 화가 났다.
자기가 뭔데. 오빠도 공부하라고 독촉 안 하는데.
‘잘 보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랬던 적도 있다.
발칙하게도 그녀를 예비 시누이로 생각하는 진유리가 잘 보이려고 애를 썼던 적이 있다. 얼추 여름방학까지는.
하지만 휴가를 갔을 때 너무 지나치게 도와준 게 탈이었을까. 지금은 전혀 아니게 됐다. 자신감이 붙어선 자기가 무슨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사사건건 참견해댄다. 대부분 옳은 말에 정론이라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도 열받고.
그렇게 십 분쯤 진유리와 대화를 주고받던 도중. 문득 저쪽에서 화제를 바꿨다.
-유리: 근데 세아야 ㅎㅎ (20:27)
상당히 은근해진 말투. 대충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이세아는 읽기만 하고 답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유리가 연이어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리: 교수님 지금 뭐 하셔?
-유리: ㅎㅎ 연구 중이시지?
-유리: 오늘 수업도 있으셨는데
-유리: 엄청 피곤하시겠다 ㅠㅠ
곧바로 이어진 메시지.
-유리: 선물과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20:28)
커피와 디저트 기프티콘이었다.
-유리: ㅎㅎ
-유리: 교수님 피곤하실 텐데 이거 드시고 힘내시라고 말씀드려줄 수 있어?
-이세아: ㄴ
-유리: 아 왜애애애
-유리: (귀여운 토끼가 애교를 부리는 이모티콘)
-이세아: 사러 나가야 하잖아
-이세아: 귀찮아 (20:29)
-유리: 너도 공부하느라 힘들구
-유리: 잠깐 바람 좀 쐬면서 산책하다가 들어오는 김에 겸사겸사 ㅎㅎㅎ
-유리: 내가 내일 맛있는 거 사줄게!!
-이세아: 나 공부 안 하고 있었어
-이세아: 지금부터 할 거니까
-이세아: 톡 그만 보내 (20:30)
우웅, 우우웅- 진동이 연이어 울렸으나 이세아는 확인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팽개쳤다. 그리곤 부엌으로 향했다.
진유리가 보낸 기프티콘이야 자신이 홀라당 먹을 생각이었지만 오빠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간식이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진하게 내려야겠다.’
거의 독약처럼 새까만 색으로 내린 커피와 딸기잼만 바른 식빵. 실패하는 것보단 간단한 게 낫다고 판단한 결과였고, 이세아는 오빠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이도진은 책상에 앉아 연구에 여념이 없었고, 그러다 이세아와 그녀가 든 쟁반을 보곤 웃으면서 묻는다.
“오빠 간식 주게?”
“먹고 해.”
책상 한쪽에 쟁반을 내려놓은 이세아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종이를 흘끗 살폈다.
한글과 숫자와 영어와 문자 기호의 조합. 딱 그것까지만 알겠다.
저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 수식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런 건 무슨 외계인이 쓰는 언어처럼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대자마자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이도진에게 그녀가 물었다.
“이거 그거 맞지? 주말에 발표하려는 거.”
책상의 종이만 봐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도진이 뭘 연구하고 있는지는 직접 들어서 알고 있다.
자연 마력이 어쩌고, 감응력이 어쩌고, 속성 숙련도가 어쩌고, 그렇게 들었다.
원리는 이해를 못 하겠고, 하지만 이 연구로 이루어낼 수 있는 효과는 이세아도 단번에 깨달을 만큼 직관적이었다.
앞으로 각성자들이 마력 속성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마법을 더 쉽게 익힐 거라고. 더욱 강하고 효율적으로, 좀 더 자유롭게.
오빠가 첫 번째로 발표한 연구. 복합 계통의 방어 구성체가 계통 마법 전반에 혁신을 가져온 것처럼, 이번에는 마력의 속성 측면에서 마학이 커다란 진전을 이룰 거라고.
그리고 이도진이 답했다.
“아,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준비한 게 있어서.”
“다른 거?”
이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차피 잘 알아듣지도 못하긴 하나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에 대해 이세아가 물으면 친절하게 답해줬는데. 지금 말한 건 여태까지 언급한 적이 없다.
“그게 세 번째야?”
“음…… 아직 완성한 건 아닌데, 속성 발표하면서 사람들한테 공개는 하려고.”
“뭔데?”
이세아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뭔가, 잘 모르긴 해도 이도진의 표정을 보고 느낌이 왔다. 첫 번째로 공개한 연구보다, 두 번째로 발표하려는 이론보다, 훨씬, 어마어마하게 더 대단한 연구가 아닐까 하고.
이도진이 싱긋이 웃으며 답했다.
“비밀.”
“비밀……?”
장난스러운 말투. 이세아는 조금, 아주 조금, 아니…… 꽤 많이 서운했다.
중요한 연구인 건 알겠는데, 말을 안 해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냥, 오빠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서운하다. 유치하고 철없는 마음이라는 건 알지만 감정이 마음대로 다스려지는 건 아니니까.
“나 어차피 들어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말해주면 안 되냐고, 그녀 딴에는 망설이면서도 보챈 말. 그래도 이도진은 답해주지 않는다.
겨우 힌트처럼 한마디만 해줬을 뿐이다.
“나중에, 좀 더 지나면 우리 학교 후배들 더 많이 입학할 수 있는 연구?”
“……돈 많이 벌어서 우리 학교 사려고?”
이세아가 추측한 바는 그 정도.
이도진이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근데 세아야.”
“왜?”
“이거…… 아니, 오빠 마시라고 만들어준 건 진짜 고마운데…….”
“고마운데 뭐?”
“커피가 좀, 어, 살짝 진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그렇게 타준 건데.”
새침하게 답한 이세아는 오빠의 손에서 잔을 뺏어갔다. 검게 찰랑이는 액체를 마셔봤고, 그제야 깨달았다.
살짝 진하다는 건 오빠로서 정말 대단히, 최선을 다해서 동생을 배려해준 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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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1)
-질문 내용: <킬 더 이블>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에 마력 원리주의자들이 개입하는지 여부
-정답: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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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토요일, 오후 한 시.
단상에 올라선 나는 객석을 살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자리해 있다. 국내외의 유명 인사들. 마학 연구에, 헌터 활동에, 각성자 장비 산업에, 각자의 분야에서 선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기대를 담아 나를 바라봤고, 나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자연 마력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속성 숙련도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겠습니다.”
짝짝짝-
힘차게 울리는 박수.
나는 조소처럼 되뇌었다.
미끼를 던져줄게.
어디 한번 물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