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Chapter 43. 기념일 (3)
논문 내용은 간결하게 끝냈다. 알아들을 자들은 알아들었을 테고, 이제 실제 현상으로 설명할 차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작게 눈짓하며 이르자 작업을 보조해줄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
준비를 꽤 철저히 한 터라 객석에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우우웅-
내 정면에 마력 구성체 하나가 떠올랐다. 느리게 일렁이고, 지름 일 미터 정도의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지구가 홀로 자전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론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듯이.
물론 이곳엔 태양이 없고, 원리야 어느 정도 비슷하나 내 구성체가 공전축으로 삼는 물질은 따로 있다.
이 공간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마력.
조금 푸르게도 보이는 무지갯빛이 이윽고 푸른색 하나만을 내비쳤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나는 작업을 마저 이어나갔다.
이미 절반은 결과를 구현했다. 특정 공간과 자연 마력. 그 시점에서부터 속성이 두드러진다는 걸 밝혀냈으니까.
나머지 절반. 이 구성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려줄 거고.
슈우우……. 푸르게 일렁이는 힘을 반씩 나눠 보냈다.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에게. 푸른빛을 받아든 그들이 자신의 마력을 꺼냈다.
위유우웅-
푸른빛과 그들이 내보낸 마력이 어우러진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편안하게 변화가 일어난다.
푸른빛이 커진다. 본래 보유한 마력에서 융화 가능한 부분을 흡수하는 거다.
마력이 점차 푸른빛을 띤다. 수 속성으로 바뀌며 힘의 방향성을 구체화했고, 밀도와 효율이 상승한다.
터어어엉.
마침내 둘이 합쳐졌다. 영롱한 푸른빛의 마력.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가 그 힘을 허공으로 떨쳤다.
자연 마력에서 끌어낸 속성과 기존에 지닌 마력. 그 두 가지를 쌍방향으로 반응시켜 구성한, 감응력 훈련과 속성 마법 분야의 새 지평.
쏴아아아-! 새파란 물 같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오…… 신이시여…….”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거의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다.
물론 내가 한 일이지만 그 어떤 과장도 없이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마력이라는 힘에 대한 인류의 활용도는, 이 순간 비약적으로 진보했다.
내 어머니 정세빈은 모든 각성자가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도록 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곳으로 통하는 문을 세웠다.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각성자가 모든 속성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여전히 선명하진 않던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서상욱 교수는 상기된 얼굴로, 아르노 뒤레는 무척이나 경건한 목소리로 말한다.
“모두, 이도진 선생님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악마를 물리친 이 시대. 영웅은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음을 나는 이 천재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존경하는 내 친우, 시혁 리와 세빈 정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군요. 그들이 세상에 남긴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박수와 환호. 객석 전원이 밝은 표정이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모두가 이 이론을 받아들일 거다. 그 무엇도 손해 볼 게 없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자만 도태될 뿐이다.
모두가 내 구성체로 마력을 얻고, 감응력을 훈련하고, 속성 마법을 발현할 거다.
그만큼 쉽게 만들었다. 마력을 막 각성한 어린아이부터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게 귀찮은 퇴물까지. 모두가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결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짧으면 이 년, 길게 잡아도 삼 년에서 오 년.
내가 퍼뜨린 달콤한 번영이 이 세상 켜켜이 흩뿌려지고 심부에 자리 잡을 때까지, 그 정도 시간이면 족하다.
복합 계통의 방어 구성체.
그것에서 파생된 계통 마법의 활용.
마력 감응의 훈련 구성체.
그것으로 발현할 모든 속성 마법.
계통과 효과는 어그러지며 깨져나갈 거다.
속성과 마력은 내 힘으로 흡수당할 거다.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면.
연구를 의심한 자가 없다면.
나는 단 한 번, 일만의 각성자와 대적해도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다.
오직 그 순간을 위해 마련한 함정이자 돌파구다.
지금부터 공개할 건…… 이건 앞선 것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고.
“한 가지 더,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축제처럼 환호가 감돌던 회장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가 나를 본다. 정말 오늘 공개하겠냐는 듯한 눈빛. 조금 이르지 않냐고,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듯이. 실제로도 벌써 알릴 거냐고 내게 여러 번 묻기도 했고.
나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보냈다. 미리 말한 대로 오늘 공개하겠다고.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객석 앞자리에 앉은 세라를 보고, 한태강을 보고, 전체 좌중을 훑었다. 중간쯤에 앉은 윤의성이 보인다. 그가 기대감을 보이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또 누가 있을까. 짐작과 추측을 되뇌며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봄에 발표한 복합 계통의 방어 구성체. 오늘 여러분께 공개한 감응 구성체. 저는 지금껏 그 두 가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판을 흔들고자 한다.
마력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
각성자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걸 죄다 흔들고 뒤집어엎어서, 솎아내야 할 자들을 찾아낼 거다.
“그리고 지금, 그 두 가지 연구를 넘어선 지점에 있는, 제가 고안 중인 또 하나의 이론을 공개하려고 합니다.”
좌중이 술렁인다.
앞선 두 가지 연구를 넘어선 지점. 그런 게 가능하다고 여긴 자도 없을 거고, 그게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자도 없겠지.
듣고 나면 간단한 이야기라고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다. 성공할 수 있냐 없냐는 논외로 치고서 발상 자체는 단순하니까.
그냥 내가 한 말 그대로 두 가지 연구를 넘어선 지점에 있는, 그것들을 포괄해 한 차원 더 거시적인 논의다.
계통 마법의 확장.
속성 마법의 활용.
“하지만 두 가지 연구 모두 결정적인 한계를 내포합니다.”
범위가 좁다.
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마력의 계통과 속성은, 근본적으로 각성자에게만 허용되니까.
첫 번째 연구는 마력 계통.
두 번째 연구는 마력 속성.
그다음 세 번째는…… 마력 그 자체.
+
-수동발동형 특성 ‘파헤치는 손’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스킬 ‘인식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S)
+
파헤치는 손.
3권을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얻은 특성.
엿보는 눈과 정확히 상반된 힘이었다.
엿보는 눈이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이라면 파헤치는 손은 떠오른 심상을 현상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보상으로 랭크를 올린 인식지배 스킬.
나는 가장 확신에 찬 어조로, 청중들이 가장 믿고 싶어지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 저는, 마력과 대비되는 ‘생명력’이라는 개념을 주창합니다.”
아무도 모르고 있으나 생명력은 분명 실재한다.
존재와 직결된 에너지.
균열 너머 세상과 연결되며 얻게 된 마력이 아니라 본래 이 별의 인간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힘.
<세계의 수호자>라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낸 나는 그 힘을 알고,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연구했다.
“마력은 우연히 얻은 힘입니다. 각성자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얻은 능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생명력을 마력과 흡사한 성질로 치환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각성자가 아닌 사람도, 각성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시점에서는 미완성이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가능하다.
엿보는 눈.
파헤치는 손.
존재흡수와 마력흡수.
내가 아는 개념들, 겪어온 사건들, 실현할 능력.
준비물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니 불가능한 게 아니다.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우려하시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까지 빠짐없이 고려해 비각성자와 각성자의 경계를 허물어보겠습니다. 마력이 특권이 아니도록. 모두가 더 강한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그리고 종국에는…….”
모두가 마력을 다루는 날까지.
생명력과 마력을 구분 지을 필요도 없이 온전히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각성자라는 개념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도록.
그러한 목표를 천명하며 나는 객석을 바라봤다. 윤의성의 표정을 살폈다. 아주, 무척 볼 만했다.
+
OX 질문 (1/1)
-질문 내용: <킬 더 이블>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에 마력 원리주의자들이 개입하는지 여부
-정답: O
+
3권의 보상으로 얻은 정보.
마력 원리주의자들이 개입한다고 했다.
다른 말로는 마력 근본주의자.
마력을 절대적이고 신비한 힘이라 믿는 자들. 그것을 휘두르는 각성자를 특별한 존재라고, 비각성자를 이끌며 지배해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 자들.
내로라하는 범죄 조직 중에도 다수가 있다. 마력 근본주의를 자신들의 신념으로 내건 자들이.
자, 어떻게 할래.
내가 방금 말했는데.
마력이 특별하지 않다고. 각성자도 특별하지 않다고. 그냥, 재수가 좋아서 우연히 얻은 힘이라고.
비각성자도 각성자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나중엔 아예 각성자라는 개념조차 유명무실해질 거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내 말을 들은 너희는 알겠지. 내가 농담처럼 허황한 꿈이나 지껄이는 게 아니라는 걸 알 거야.
나한테는 그 목표를 실현할 능력이 충분히 있고, 인식지배까지 발동하면서 귀에 때려 넣었으니 믿을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러면 어떡할래.
내가 방금, 너희가 신봉하는 역겨운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놨는데.
마력이 초능이 아니라고 규정한 기념일 같은 날인데.
애초부터 불공평했던 지반을 반듯하게 세워놓으려고 하는데.
이러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맑은 개울가에 돌을 던지면 미꾸라지들이 움직인다. 꼭 그것처럼 놈들이 숨어 사는 세상에 커다란 바위를 떨어뜨렸다.
깜짝 놀라서 수면으로 올라오겠지. 먹음직스러운 미끼도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그것만 쏙 물고선 다시 숨으려 할 거다.
쓰레기들답게 어디 한번 엉겨 붙어봐.
이도진이라는 훌륭한 미끼가 있으니까, 물어뜯고 삼키려고 안간힘을 써봐.
그리고…….
충격이 경외감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이 자리 전체에 울리는 박수로 바뀐 그 시점.
띠링-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
<킬 더 이블> 4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0일 자정까지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곡예사’ 윤의성과 대면할 것
-클리어 보상: OX 질문 1회
+
나는 내심 기껍게 생각했다.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 역시 범인은 너겠네.
곡예사 윤의성. 한국에 한 명 남은 배신자.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이 세워진다.
어떻게 윤의성과 접촉하고, 놈과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할지. 그때 내가 어떤 패를 들고 가야 하는지까지도.
여느 때보다 훨씬 예리해진 사고로 나는 판단했다.
몇 가지 준비만 거치면…… 곧 만날 수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