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Chapter 44. 쌍방과실 (1)
학회가 마무리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논문을 발표하고 구성체로 보여주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쏟아진 질문 세례가 어마어마했다.
하긴 이해는 된다. 본래 공개하기로 한 연구만 해도 궁금한 게 많을 텐데 그보다 훨씬 거대한 파장이 일어날 폭탄을 떨어뜨렸으니까.
감응 구성체의 향후 발전 방향.
방어 구성체와의 연계 가능성.
내가 새로 꺼내든 생명력이라는 개념.
질문을 받고, 토의하고, 그러다 보니 두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오후 네 시. 늦은 점심을 겸해 참석자들이 담소하던 와중, 누군가 불쑥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이구, 도진아. 네가 이 삼촌 고생시키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렇지?”
조금 세게 짓누르는 듯하다가 툭툭 두드리는 손길. 시선을 돌려 말을 걸어온 자를 봤다. 윤의성. 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요.”
“이놈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생명력인지 뭔지, 내가 잘은 이해를 못 했는데, 결국 나중에 각성자들 많이 나온다는 거 아니냐. 무슨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삼촌이 그래도 협회장인데 그러면 골치가 안 아플 것 같아? 안 그래도 일 많아서 직원들 힘들다고 난린데 벌써 걱정이 태산이다.”
“이봐, 유니. 그걸 왜 진 탓으로 돌리고 그러나. 협회장씩이나 맡은 본인의 책임감을 탓해야지. 안 그래?”
농담조로 말하며 다가온 사람은 아르노 뒤레. ‘유니’는 그가 윤의성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너무 말랑말랑한 어감이라며 윤의성 본인은 들을 때마다 격하게 거부했고.
“이제 몇 번짼지 세지도 못하겠네. 아르노, 제발 부탁인데 날 그 끔찍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 내가 당신 ‘아리’라고 부르면 좋겠어? 어? 좋겠냐고.”
“오, 훌륭한데.”
아르노 뒤레가 답하자 윤의성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우리 주위에 있던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런 다음 윤의성이 다시금 내게 일렀다.
“어쨌든 도진아, 삼촌 좀 봐주라. 너 다른 연구도 할 건 많지 않냐. 삼촌 고생하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좀, 지나치게 파장이 클 거야.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니까 안 좋게 듣지 말고.”
말끝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다른 이들이 볼 땐 걱정. 내가 이해하기엔…… 경고.
나는 힘주어 답했다.
“그래도 해야죠. 걱정하시는 문제까지 다 살펴서 결과물 내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잠시의 침묵.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의성이 쓰게 웃는다. 그리곤 격려처럼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정 각오가 그렇다는데 삼촌이 조카 안 도와줄 수도 없고, 열심히 해봐라. 누가 쓸데없이 구박하면 말하고. 왜, 저기 무서운 사람 한 명 있네.”
히죽 웃는 얼굴로 윤의성이 눈짓한 곳. 한태강과 세라가 서 있다. 나는 아무 부담 없는 어조로 정정했다.
“그렇진 않아요.”
“아니라고? 맞아. 한 선배 보니까 생각이 났는데 도진이 너 맨날 연구만 하고 지낼 수는 없지 않냐. 안 그러냐?”
“저는 제 생활 만족하는데-”
“아니, 너는 만족 못 해. 작년까지 그렇게 놀자판이었던 놈이 만족할 리가 없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조카가 너보다 두 살 어리거든. 애가 되게 예쁘고 착해.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고, 친구 한 명 소개받는다 생각하고-”
“유니, 그건 헛수고지 싶은데.”
다행히 아르노 뒤레가 말을 끊었다. 또 별명으로 불린 윤의성이 눈을 찡그렸고, 자랑처럼 설명이 이어졌다.
“자네 전에도 이런 말 꺼낸 사람이 많았는데 진이 다 거절했거든.”
“누구누구?”
대여섯 명 됐지. 자기 조카, 둘째 딸, 기타 등등. 다만 윤의성만큼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한태강까지 언급한 건 후환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 영웅의 특권이려나. 그즈음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얘기는 얼추 다 끝났고?”
한태강이 부드럽게 묻는다. 아르노 뒤레, 서상욱 교수, 그 외 참석자들과는 간단히 눈인사를 주고받았으나 윤의성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사실 한태강의 성격상 당장 목을 분질러버리지 않는 것만 해도 인내심을 발휘한 걸 테고.
식사도 거의 끝나가고, 이 자리를 오래 끌면 좋지 않을 듯해 나는 공손히 답했다.
“네, 충분히 말씀 나눴습니다.”
“그러면 가면서 세라도 집에 데려다주려무나. 나는 따로 업무가 있어서.”
“부탁 좀 해도 돼?”
세라가 웃으며 물은 말. 지켜보던 참석자들과 윤의성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선선히 답했다.
“그래, 인사만 드리고 나가자.”
한데 그때.
“음, 아니면…….”
조금 뜸을 들인 세라가 이어서 말했다.
“그냥 너희 집 같이 갈까? 내일 나 오랜만에 휴일이니까 푹 쉬게. 아빠, 그래도 되죠?”
이게 갑자기 뭔 소린가 했는데, 한태강이 흔쾌히 허락한다.
“너무 늦게까지만 있지 말고.”
“……우리 집 온다고?”
“요새 바빠서 세아 못 보기도 했고,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세아한테는 미리 얘기해뒀거든. 학회 끝나고 너랑 같이 갈 수도 있다고.”
“그거 난 처음 듣는데.”
“응? 세아랑 나 보는데 너한테 꼭 말해야 하나?”
세라가 피식 웃으며 반문한다. 따지고 보면 아니긴 하지. 둘이 친한 거고,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다. 좀 당황스럽긴 해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세라와 회장을 나섰다. 등 뒤에서 윤의성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선배, 이럴 거면 파혼은 왜 시켰습니까? 괜히 기대했잖아요. 무조건 소개해준다고 장담해놨는데.”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어라? 오늘 어째 평소보다 까칠한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저도 나이가 오십이고, 상처받는 중년인데.”
역겨운 불평. 나와 세라는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아저씨 혼자 계셔도 괜찮으려나?”
“괜찮으니까 너랑 나 보내셨겠지. 걱정하지 마.”
그리고 차에 탄 우리는 아까보다 훨씬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생명력 말할 때 윤의성 표정 볼 만하더라.”
“그랬어?”
내가 오늘 무엇을 발표할지 세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윤의성이 은근히 내비친 불편한 심기. 그걸 세라에게 일러줬다.
“각성자들 공장에서 찍어낼 거냐고 하던데.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감추려고 해도 단어 선택에서부터 심기 불편한 게 티가 나네.”
놈은 각성자들을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여기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영웅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을 고귀한 존재라 여길 테고.
그러니 생명력 이론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내가 노린 것도 정확히 그 지점이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세라에게 말했다.
“일단 다음 주는 지켜보고 주말 전에 계획 알려줄게.”
“알겠어. 아, 잠깐만?”
차가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세라가 손을 살짝 움직였다.
위유우웅-
세라가 앉은 조수석 앞, 마력으로 구성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얼굴을 보인 사람은 서연희. 그녀가 대뜸 묻는다.
[가는 길이야?]
“네, 말했죠? 세아 보러 간다고.”
세라가 무척 냉랭하게 답한다. 딴 데 보다가 사고 나면 안 되니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물었다.
“언제?”
서연희한테는 또 언제 말한 건데. 세라는 답하지 않았고, 서연희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한다.
[아까 한 시간 전쯤? 뜬금없이 세아 보러 너희 집 간댔어.]
“거짓말도 아니고, 도진이 운전하고 있으니까 그만 끊을게요. 딱히 할 말 없으면 용건 있을 때 연락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역시나 쌀쌀맞은 말투. 하지만 서연희가 딱히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알겠어. 도진아, 세라 가고 나서 밤에 연락할게. 오늘 고생했어.]
그리곤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통신 마법을 마쳤다.
“후…….”
세라가 옅은 한숨을 쉰다.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 보이는데, 다음 순간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하게 웃으며 말한다.
“가서 저녁은 뭐 먹을까?”
“……집에 가서 정하자.”
지금은 내가 뭘 함부로 말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바로 그 직후.
우웅,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응?”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세라가 뭔가 의외라는 듯 화면을 본다. 그러다가 전화를 받고 쾌활하게 물었다.
“응, 유리 왜?”
유리? 진유리?
전화를 건 사람은 놀랍고, 편하게 받는 세라의 말투는 그러려니 했다. 진유리 쪽은 어려워해도 세라는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했으니까.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말. 이번에는 정말로 의외였다.
<아, 언니, 안녕하세요. 그, 어제 톡방에서 언니랑 세아랑 말했던 거 말씀인데요…….>
톡방? 세라랑 세아랑 말했던 거? 너희 셋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
내가 황당해하며 되뇐 의문은 모르고 진유리가 말을 이었다.
<그게, 지금이라도 되면 저도 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세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한다.
“글쎄? 난 괜찮은데, 집주인 생각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기다려봐. 바꿔줄게?”
<아앗……!>
마침 정지 신호라 차가 멈춰 있었고, 세라가 내게 휴대전화를 건네줬다.
“여보세요? 유리니?”
<아, 교수님! 축하드려요! 기사로 방금 연구 발표하신 거 읽었어요.>
다짜고짜 축하부터 전한 진유리가 이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그러니까…… 어제 세아랑 세라 언니한테 들었는데요…….>
***
시간을 조금 되돌린 시점. 도서관에 와 있던 진유리는 뒤편에서 쏘아보는 시선을 감지했다.
“…….”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 뒤.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웠던 이세아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진유리가 보는 중이던 인터넷 기사를 확인한 거다.
놀란 그녀가 휴대전화 화면을 껐지만 뭘 보고 있었는지는 들키고 말았다. 자리에 앉은 이세아가 노트에다 꾹꾹 글씨를 눌러썼다.
-공부 안 하고 뭐 해.
옳은 말이다.
중간고사 공부를 하려고 같이 온 거니까. 하지만 이세아에게 타박을 듣는 게 뭔가 약 오르기도 했고, 또한 묻고 싶은 게 있어 진유리도 문장을 적어나갔다.
-생명력이라는 게 뭐야? 교수님한테 들은 거 있어?
수 시간 전 이도진이 학회에서 언급했다는 개념.
이미 기사로도 나왔고, 한국의 모든 각성자 커뮤니티가, 아니, 그런 걸 따질 것 없이 온 세간이 떠들썩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었다. 비각성자를 각성자로 만드는 힘이라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고 천재라곤 하나 쉬이 믿기지 않는 위업. 비각성자를 각성자로 만든다는 건, 그건 정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
해서 이도진의 연구를 가장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던 이세아에게 물어본 것인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생명력?
-??
-그게 뭐야?
안 되겠다 싶어 진유리는 펜 위쪽으로 이세아의 팔을 쿡 찔렀다. 열람실 나가서 얘기하자는 제스처. 그리고 함께 나선 이세아에게 자세히 물었는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딱 한 마디 혼잣말처럼 흘렸을 뿐이다.
“아…….”
“왜? 들은 거 있어?”
“그냥, 우리 학교 후배들 더 많이 입학할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런 뜻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 진유리는 결심했다.
“근데 세아야.”
“왜?”
“어제 톡방에서 말한 거 말인데…….”
여름에 휴가를 다녀오고서부터 진유리의 메신저 앱에는 단체 대화방이 하나 더 생겼다. 그녀 자신과 이세아와 한세라, 셋이서 만든 대화방. 거기서 들은 게 있었다.
“그으, 혹시 지금도 되면…… 나도 가도 돼?”
이세아는 조금 있다 도서관을 나서기로 돼 있었다. 학회를 마친 한세라가 집에 놀러 온다고 해서.
그리고 한세라가 제안했다. 진유리도 시험공부를 마치고 놀러 오지 않겠냐고.
물론 셋이 얘기를 끝낸다고 될 일은 아니고 이도진의 허락을 구해야겠지.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진유리는 미리 거절 의사를 표했다.
‘눈치 없고 싶지는 않아.’
예전부터 친했던 셋이 모이는 자리다. 방학 때처럼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가봐야 별말도 못 하고 집에 올 것 같아서. 그러기는 싫었다. 하지만…….
‘아니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눈치도 없이 끼어드는 게 아니라, 가서 더 친해지는 게 발전적인 일 아닐까 하는 생각.
이세아는 친한 친구고, 이도진은 친절하고, 한세라도 성격은 정말 좋은 사람 같으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진유리는 진취적인 결론을 끌어냈다.
‘눈치 없는 거랑 용기 있는 거는 많이 다르잖아.’
전자가 아니라 후자로 행동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실례하겠습니다…….”
사뭇 긴장한 목소리로 인사한 그녀는 친구와 교수님 집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