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Chapter 44. 쌍방과실 (2)
이 집에 방문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달 전에 와본 적이 있다. 거의 반년 전, 아직 이세아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시절.
앙큼한 목적을 품고, 과제를 핑계로 발을 들였고, 가진 정보의 차이로 참패했다. 집을 나온 다음 대형 사고도 하나 쳤고.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목적이 같고, 당시 얄밉게 방해하던 애와 절친한 친구가 됐고, 이번엔 목표도 자신을 반겨준다.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두렵다고 피할 수는 없는 상대다.
떨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은 그녀가 인사한 직후.
“왔어?”
“둘 다 공부 열심히 했어? 유리는 오랜만이네.”
부엌에 있던 두 사람이 그녀를 반겨줬다. 목적인 이도진과 경쟁자인 한세라. 둘 다 상당히 격식을 갖춘 차림이다.
“앗, 안녕하세요……!”
허리를 숙이며 다시 한번 공손하게 인사한 진유리는 두 사람을 흘끔 살폈다.
집에 온 지 얼마 안 된 걸까. 어쨌든 정장이 멋있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파혼했다지만 의미가 없는지 사이도 되게 좋은 것 같고.
‘알고 있었어.’
익히 알던 일이다. 실망하니 뭐니 당장 그런 마음을 먹을 자격도 없고. 자기 집이라 대충 들어온 이세아에 이어 가지런히 신발을 정리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녁 준비하시게요?”
“너희 공부한다고 배고팠지? 뭐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말해줘. 어제 장 봐서 재료로 쓸 거 많거든.”
이도진이 정감 있는 목소리로 건넨 말. 이세아와 한세라가 말했다.
“옷 갈아입고 올게.”
“도진이 너도 옷부터 갈아입고 와. 나랑 유리랑 재료 꺼내고 있을게.”
한세라 본인이야 별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겠지. 하지만 듣는 진유리로선 사뭇 긴장되는 제안이다.
‘둘이?’
얼굴이 안 보이는 메신저에서는 그럭저럭 편하게 대화했다지만…… 뭔가, 뭔가 좀 많이 부담되는데.
천만다행히 이세아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너도 옷 빌려줄 테니까 갈아입고 있어.”
“아, 정말?”
진유리는 반색하며 답했다. 올봄에 잰 키가 167cm.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거의 안 자라다가 샬럿 테이트와 훈련을 하며 다시 조금씩 크고 있으니 지금은 168쯤 될 거다.
반면 이세아는 159cm? 진유리가 알기로 160은 안 된다.
신장 차이가 꽤 나긴 해도 이세아보다 자신이 더 슬림한 체형이니 가볍게 입을 티셔츠와 바지 정도는 빌릴 수 있겠지.
편한 옷을 입는 것도 좋고, 한세라와 둘이 남지 않는 것도 좋아 그녀는 화색을 띤 얼굴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한데 그때.
“근데 넌 그렇게 입고 안 불편하나?”
“괜찮아. 어쩔 수 없지.”
이도진의 물음에 한세라가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답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서 입기엔 불편한 옷차림이다.
“세아 옷은 안 맞을 거고…….”
“아니면 도진이 네 옷 남는 거 없어?”
이도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한세라가 묻는다.
“내 옷?”
“작은 거보다 큰 게 편하잖아.”
“아니, 그것도 적당히 커야지.”
진유리는 마음속으로나마 백 번 동의했다.
한세라는 키가 크다. 173cm라고 들었고, 체형도 과하게 마른 게 아니라 쭉 뻗어서 늘씬하다는 느낌이다. 키 차이가 15cm 가까이 나는 이세아의 옷은 당연히 안 맞겠지. 하지만…….
‘교수님이랑도 그만큼 차이 나잖아.’
이세아의 옷이 작은 만큼 이도진의 옷도 클 거다.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클 텐데. 무슨 논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옷 안 갈아입게?”
이세아가 불쑥 말을 건넨다. 뭔가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아…… 응, 입어야지.”
애처롭게 부엌을 본 진유리는 끌려가듯 이세아를 따라갔다. 성인 둘이 나누는 대화에 그나마 안도가 된다.
“있어 봐. 새로 사서 안 입은 거 있는데 그거 줄게.”
“굳이? 다 세탁한 거잖아.”
그냥 집주인이 주는 대로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불만을 되뇌며 진유리는 이세아와 함께 방에 들어갔고, 방문을 닫은 직후에 이세아가 그녀를 조용히 흘겨본다.
“왜……?”
뭔지는 몰라도 시퍼런 기에 눈치를 본 진유리가 물었다. 곧장 공격해온 데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그리고 이세아가 대뜸 말한다.
“당당하게 있어.”
“어?”
영문을 몰라서 되물었으나 이세아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장 치수가 넉넉한 티셔츠와 바지를 골라서 건네줄 뿐이었다.
방학 동안 한집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지냈으니 서로 속옷 차림을 신경 쓰진 않았다. 보고, 안 보고, 아무 생각이 없다.
괜히 죄지은 기분이라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진유리는 하소연처럼 뇌까렸다.
‘나는 뭐 안 당당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당당하고 싶은데, 자꾸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걸 어떡하라는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말한 이세아 본인도 원망스럽다.
‘네가 자꾸 눈치 주잖아…….’
응원을 할 거면 응원해주고.
훼방을 놓을 거면 훼방을 놓고.
둘 중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눈치는 눈치대로 주고, 쭈뼛거리는 건 또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방 안.
오늘 일어날 다툼의 불길은 그렇게 연기부터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
몇 달 전 진유리와 알게 된 이래로, 한세라는 그녀를 대함에 있어 원칙을 하나 세웠다.
친절하게 대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게 하지 않는 것.
이세아의 친구라서.
이도진이 가르치는 학생이라서.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진유리 자체로도 마음에 들었다.
의욕 있고, 열심히 하려는 게 눈에 보이고, 속마음이 다 드러나는데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게 귀엽고.
한마디로 잘해주고 싶은 애다.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나니까, 이제껏 그녀가 알게 모르게 처리한 애들과 똑같이 대하기도 좀 그랬고.
다만 전제조건이 있다.
‘나도 열심히 해야 하니까.’
진유리에게 잘해주고 싶은 건 맞지만, 그걸 신경 쓰다가 본래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아니어야 한다.
가령 지금처럼.
이도진에게 건네받은 티셔츠의 포장을 열며 한세라는 조금만 미안하게 생각했다.
‘원래 갈아입을 거였고.’
진유리가 오늘 왔든 안 왔든, 하려는 일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
이도진은 분명 한세라 자신의 옷이 불편한 걸 배려할 테고, 네 옷 남는 거 없냐고 물어보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부분까지 진유리를 신경 써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요리하고 식사하기에 정장이 불편하긴 했다. 이도진이 새 옷을 꺼내줄 것도 알았고.
입던 옷을 입니, 흔적을 남기니, 도를 넘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이 그 정도까지 음습하지는 않다. 다소 속셈이 있었던 건 인정하지만.
‘옷 사서 올 필요는 없잖아?’
옷 빌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일부러 준비하고 싶지는 않은 정도. 딱 그만큼만 음습하고 떳떳했다.
개중에 품이 좁고 치수가 작은 걸 골라서 줬다곤 해도 이도진의 옷은 한세라에게 너무 큰 감이 있다.
적당히 옷매무새를 다듬은 그녀는 욕실을 나서며 물었다.
“안 이상한가?”
“이상한 건 아니고.”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눈빛과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이세아와 진유리도 방에서 나왔다. 기왕 집에서 모였는데 거나하게 식사를 차릴 계획이었고, 자기가 도울 게 있냐는 이세아의 물음에 한세라와 이도진은 웃으며 사양의 뜻을 표했다.
“그냥 있어도 돼.”
“언니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겉으로 내보인 말도, 속으로 생각한 마음도 둘이 통했다. 겉으로 내보인 말과 속으로 생각한 마음이 달랐고.
‘휴…….’
한세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요리를 꽤 잘한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도 소질이 있었고 이후 실력이 더 늘었다. 이도진이야 십 년 전부터 이 집 식사를 도맡았으니 솜씨가 훌륭하고.
하지만 재능 자체가 부족한 데다 오빠가 밥해주는 걸 먹기만 했던 이세아는…… 과거 그녀가 끓여준 라면을 힘겹게 먹은 기억이 있다. 좀 많이 힘들었다.
‘도진이가 너무 감싸고 돌아서 그런 것도 있지?’
순전히 이세아의 잘못은 아니겠지. 동생이 부엌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실력을 키울 기회조차 박탈한 오빠의 책임도 있을 거다. 다만 오늘까지는…… 그냥,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좋겠고. 그때 진유리가 말했다.
“저 재료 다듬는 거는 도와드릴 수 있는데…….”
“유리 집에서 요리 해봤어?”
“그게…… 가끔요.”
머뭇거리며 답한 말.
한세라가 보기엔 거짓말 같았다.
‘별로 안 해본 거 같은데.’
척 보기에도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이세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일러바친다.
“얘랑 나랑 비슷해.”
“아앗, 아니에요.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나랑 비슷한 게 왜?”
핵심을 절묘하게 찌른 이세아가 이어서 말했다.
“나랑 유리랑 같이 보조해줄게.”
“그래, 넷이 만들면 되지.”
슬쩍 일어난 언쟁을 이도진이 수습했고, 그 시점부터 한세라는 의아하게 여겼다.
‘얘들 좀…….’
다투는 것까지는 아닌데. 경쟁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를 경계하는 것 같다. 식사를 만들면서도, 다 먹고 한세라가 둘의 중간고사 공부를 봐주면서도.
“연결하는 식을 이렇게 잡아서…… 어때? 이게 계산 더 빠르겠지?”
“아, 네! 이해했어요!”
진유리가 잽싸게 답했다. 하지만 이세아는 침묵.
둘이 시선을 마주친다. 진유리는 움찔하고, 이세아는 작게 말한다.
“……한 번만 다시 설명해줘.”
좀 더 쉽게.
그보다 조금 더 쉽게.
세 번째 설명을 듣고서야 이세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실제 구현은 정반대.
스으으으-
이세아의 손 위로 마력 구성체가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진유리는 이세아보다 확연히 흐릿한 마력만 구현해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도진은 나설 수 없고, 한세라가 두 번 더 도와준 다음에야 진유리도 이세아와 동등한 수준의 빛을 자아냈다.
‘좀…… 그러네.’
한세라는 약간 근심하며 되뇌었다.
진유리와 이세아. 안 친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티격태격한다.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서로 조금씩, 기분이 서서히 나빠지는 것 같다.
‘아무리 친해도 안 맞는 날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그렇게 여겼다.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같은 스승에게 배우는 경쟁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열여덟 살 예민한 나이니까 이런 날도 있는 거겠지.
그대로 자리를 마쳤다면 한세라가 생각한 만큼만 갈등이 일다가 가라앉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 그 생명력이라는 게 각성자한테는 크게 소용이 없는 거네요?”
“그렇지? 마력을 쓰면서 이미 생명력도 같이 소모하고 있으니까. 각성자가 그 둘을 분리해서 사용하기는 힘들 거야. 비각성자는 생명력 하나로만 다 감당해야 해서 성장 폭이 가파르지 않을 사람들이 더 많을 거고, 연구하면서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어.”
“흐으…… 좀 아쉽다.”
옅은 숨결을 내쉰 진유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집에 막 왔을 때보다 훨씬 편하게 이도진을 대하고 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인 이세아가 과자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고, 이제 진유리가 이세아를 보며 말한다.
“난 각성자들도 강해질 수 있는 건가 했는데.”
“욕심 많으면 벌 받아.”
입가에 초콜릿을 살짝 묻히며 입을 우물거린 이세아가 이른 말. 진유리가 입을 비쭉이며 답했다.
“아니, 욕심이 아니라, 더 강해질 방법이 있으면 우리 그때 복수도 더 빨리-”
“……복수?”
정말로 낮은 어조의 물음. 순간적으로 놀란 진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이 굳은 이도진. 그가 나직하게 묻는다.
“유리야. 복수라는 게, 너랑 세아랑 방학 때…… 무슨 일 있었니?”
“얘 말은 그게 아니라-”
해명, 혹은 변명하려던 이세아가 말을 멈췄다. 이도진은 진유리만 쳐다보고 있다. 너한테 설명을 듣고 싶다는 것처럼.
“아…… 그게…… 그냥…….”
여름방학 당시를 말한 게 아니니, 진짜로 누구와 싸운 게 아니라 대련을 한 거라느니, 진유리는 그런 변명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거짓말을 해도 들킬 게 뻔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아는 거겠지. 사실은 이도진이 벌써 진상을 대부분 알아챘다는 것도.
한세라도 추측해냈다.
런던에서 테러 행각을 벌인 토끼 가면.
이세아와 진유리도 그녀와 만난 거라고. 이도진에게 알리지 않고 위험한 일을 겪었고, 어쩌면 목숨까지 위험했을지 모른다고.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
자신도 토끼 가면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한세라는 이도진을 살폈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
그걸로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화가 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