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Chapter 44. 쌍방과실 (4)
***
이도진의 집에서 이세아와 말다툼이 일어난 시점부터, 그다음 차를 타고 영원 길드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진유리의 마음은 당황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나 왜 여기 있지······?’
당장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중간고사 기간인데.
본래 계획은 오늘 귀가하면 밤을 새워 공부하고, 내일은 점심 때쯤 일어나 시험 범위를 최종 정리하면서 컨디션 조절.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해서 첫날 시험에 임하려고 했는데.
한데 뭘 하다 영원 길드에 발을 디디게 된 걸까.
주차장에 차를 댄 이도진이 세 사람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오려는 듯했고, 차에서 내린 한세라가 앞장서며 이세아와 진유리에게 일렀다.
“나도 요즘은 자주 온 건 아니거든. 업무 늦게 끝나고 두어 번 왔는데 시설 더 괜찮아졌더라. 세아 기억나? 어릴 때 여기 와서 놀고 그랬던 거.”
“응.”
이세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착각이 아니라면 침울하게까지 들리는 것 같다.
이곳에 오며 그녀와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둘만 그런 게 아니라 차 안이 몹시 조용했다.
운전석의 이도진.
뒷좌석의 진유리와 이세아.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둘과 전혀 대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탄 한세라만 그들을 연결해주는 가교였고, 그건 어느 건물로 향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야.”
한세라의 말에 진유리는 건물 외관을 바라봤다.
전체 3층. 층수는 많지 않았으나 건물이 넓고 깔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들어서니 여자 목욕탕.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조용하고 얼핏 보기에도 시설이 훌륭했다.
진유리와 이세아에게 탈의실 키를 하나씩 건네준 한세라가 말했다.
“큰 곳도 있긴 한데, 우리 세 명밖에 없고 거기는 청소해놨을 거니까 작은 곳 쓰자. 탈의실에 옷 두고 나오면 돼.”
그러곤 자기부터 중간쯤에 있는 탈의실로 들어간다. 이세아는 그 옆 칸. 혼자 남은 진유리는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다 벗고 나와야 하나?’
그야 목욕탕이니 그게 맞겠지. 하지만 조금, 아니, 상당히 부끄러웠다. 같은 방에 살면서 서로 속옷 차림도 신경 안 쓰고 지냈던 이세아는 그렇다 쳐도 한세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같이 목욕까지 할 사이는 아닌데.
‘······비교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여기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어 진유리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넓고 쾌적한 공간. 다행히 무척 커다래서 몸을 칭칭 감을 수 있는 수건이 비치되어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쉰 그녀는 수건을 두르고 탈의실을 나왔다. 한세라와 이세아도 같은 차림새. 자판기로 샀는지 요구르트 세 병을 바구니에 넣은 한세라가 개중 제일 규모가 작아 보이는 문을 열었다.
“와······.”
적잖이 놀란 진유리는 탄성을 냈다. 규모만 작을 뿐이지 내부 공간은 아주 고급스럽게 갖춰 놓았다.
샤워 부스가 다섯 대. 적당히 따뜻한 탕과 열탕과 냉탕이 하나씩. 건식과 습식 사우나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곳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샤워만 간단히 하고 들어가자. 여기 물에 마력 흐르게 해둬서 피로 푸는 데도 좋아.”
이 또한 다행스럽게도, 샤워 부스가 칸막이라 아무도 볼 수 없다. 몸을 씻고 재빨리 수건으로 가린 진유리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적당히 따뜻한 탕에 들어갔다.
“하아······.”
“흐으······.”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한숨. 나란히 소리를 낸 진유리와 이세아가 서로를 봤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황. 챙겨온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자기 것도 한 모금 마신 한세라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둘 다 속상했지?”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해준 말을, 진유리는 숨죽이고 들었다.
꽤 긴 이야기였다.
이세아의 까칠한 말과 성격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도진을 이전보다 훨씬 잘 알게 됐다.
서러웠던 건 대부분 풀렸고 남은 거라곤 두 가지. 난처함과 서운함.
그중에 난처함은······.
‘어떡하지······.’
진유리는 이도진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세라도 정말 좋은 사람 같다.
차분하고 세련된 말투도, 사려 깊은 생각도, 화장기 하나 없는데도 빛나는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전부 다 너무나 멋지고 예뻤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녀와 이도진이 잘 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그래서 난처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서운함.
“잠깐 나갔다 오자.”
목욕을 마치고서 만난 이도진을 한세라가 데리고 나간 직후.
“······미안해.”
단둘이 되자마자 이세아가 한 말.
그 사과를 듣고, 서운함은 눈 녹듯이 풀려버렸다.
***
“애들이랑 무슨 얘기 했어?”
같이 옥상으로 올라가 나한테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든 세라에게 물었다. 이걸 피울까 말까,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이던 세라가 웃으며 답한다.
“우리끼리 비밀 얘기라서 너한테 말은 못 해주는데.”
“그래?”
후우-
되물으며 희뿌옇게 연기를 내뿜자 세라도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다. 이거 내가 괜히 애 하나 흡연자로 만든 건가 싶은데.
“너랑 있을 때, 너 피울 때만 가끔 피우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무슨 말 했나?”
“눈빛과 표정으로?”
편안하게 웃은 세라가 말을 이었다.
“조금 시간은 걸릴 수도 있는데 너한테 나쁘게는 안 될 거야. 세아랑 유리 둘 다 착하잖아. 어른스럽게 기다려봐.”
“아까는 좀 어른스럽지 못했지?”
“음······ 부정은 못 하겠네.”
세라는 당연히 알 거고, 아직 어려서 감정 조절이 능숙하지 않은 세아와 진유리도 그 정도는 알 거다. 집에서 내가 화를 낸 게 어른스러운 이유가 아니었다는 걸.
화낼 일에만 화낸 게 아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의 책임을 세아와 진유리에게 전가했다.
런던에서 겪은 일을 알리지 않은 걔들의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해도, 아무리 좋게 봐줘도 쌍방과실이다.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마셨다가 들이 내쉬고, 나는 세라에게 일렀다.
“고마워.”
“고맙긴. 너랑 세아 일이면, 지금 당장만 놓고 봐도 최소 절반은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맞아.”
“그렇게 말해주니까 다행이네.”
내 대답에 세라가 기쁘게 웃는다. 담배는 다 피워가고, 들고나온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근데 쟤들 둘이 화해 안 했어? 보니까 서로 말 안 하는 것 같던데.”
“아, 쟤들 여기 와서부터 아직 한마디도 안 했어.”
“화해는 못 시켰어?”
조금 걱정스러웠다. 화해 안 한 애들 둘이 놔두고 왔다가 다시 말다툼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세라가 웃으며 답한다.
“글쎄? 내가 본 것까지는 그랬는데, 아마 지금은 화해하고 있을걸?”
그때 허공에 마력이 일렁였다.
서연희에게서 온 연락이다.
근처에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통신 마법을 활성화했다.
“네.”
[토끼한테 연락해봤는데······ 어머?]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서연희의 시선에 의아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곤 미묘한 어조로 묻는다.
[세라 너 담배 피웠니?]
“네, 도진이가 피우잖아요.”
[그래서?]
“그 이유 말고 달리 설명할 건 없는데요. 제가 당신한테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이 험악한 대화에 개입할 수는 없고, 나는 본론을 물었다.
“이제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대답 빨리 왔네요. 토끼가 연락은 받았어요?”
[응, 참여하겠대. 다음 주는 일정 없다고 정확한 날짜만 알려달라네.]
“그래요?”
이걸로 다음 작전의 멤버는 정해졌다.
나와 유해빈.
토끼 가면.
그리고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단원 한 명.
어느 정도 생각해둔 바도 있어 나는 서연희에게 일렀다.
“주중까지 기반 작업부터 해두고, 토요일에 진행하는 게 좋겠어요. 세부적인 건 내일이나 모레 다시 의논해요.”
“나도 같이 가서 도와줘도 괜찮은데.”
세라가 조금 아쉬워하며 한 말. 서연희가 은근히 지적하듯이 충고했다.
[의욕이 있는 건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건 아니지? 네가 나서야 할 자리만 나서는 게 최선이잖아?]
“걱정 안 해주셔도 대체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제가 언제 나서야 할지는 아니까요.”
[그러니?]
너 참 뻔뻔하다는 식으로 되받은 서연희가 나와 몇 마디를 나누곤 통신 마법을 마쳤다. 옥상에 침묵이 감돈 다음, 세라가 약간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방금 좀 어른스럽지 못했나?”
이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라에게 딱 한 번만 말하기로 했다.
“음······ 부정은 못 하겠네.”
“그대로 돌려주네?”
피식 웃은 세라가 내 어깨를 툭 두드렸고, 우리는 건물 내부로 돌아왔다. 둘이 사이좋게 앉아서 구운 달걀을 하나씩 까먹고 있던 세아와 진유리가 이쪽을 본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유리가 내게 말했다.
“교수님, 진짜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었다고 말씀 안 드려서······.”
“내가 미안하지. 혼내는 것처럼 말해서 미안하다, 유리야.”
“아니에요······.”
진유리가 안도처럼 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세아는 앉아서 딴 곳을 보고 있다. 내가 시선을 향해도 모른 척하면서.
손가락이 움찔거리고,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 망설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배고픈데 나도 하나만 줘.”
“두 개만 샀어.”
겨우 그런 대답만 돌아오고 나서, 곧바로 일어난 세아가 척척 걸어가 달걀과 식혜를 가져왔다. 세라가 웃으면서 물었다.
“도진이랑 언니 먹으면 돼?”
“······유리랑 나는 배불러.”
세라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고, 여전히 딴청을 피우면서도 세아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내 동생이지만 솔직하지 못한 애다.
그래도, 내가 미안해하는 마음도, 세아가 미안해하는 마음도, 둘 다 전해졌으니까.
가족끼리 모든 순간에 말로 꺼내서 마음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우선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스파를 나오면서 세아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오늘 유리 집에서 공부하고 올 거야. 늦을 수도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세아는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귀가했다.
저녁은 먹고 왔다고 하고, 그대로 방에 들어가서 밤새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치러진 중간고사.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서선 시험을 치고, 밤늦은 시각에야 귀가했다.
진유리에게 슬쩍 들으니 자기랑 같이 도서관이나 집에서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화해하고 더 친해진 건 좋지만······ 나도 다투기 전처럼 대해주면 좋을 텐데. 살짝 욕심을 부리면 이전보다 더 살갑게.
그렇게 금요일이 되어 중간고사가 끝났고, 주말이 찾아왔다.
10월 23일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빠 아저씨 뵙고 올게. 저녁까지 집에 올 거고, 혹시 더 늦어지면 전화할게.”
“······다녀와.”
퉁명스러운 세아의 배웅.
집을 나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오늘, 피를 꽤 많이 봐야 한다.